[Opinion] 서툴게 표현되는 욕구들의 화살, 연극 <난폭과 대기>

글 입력 2021.06.2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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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난폭과 대기>


2020년 4월 4일 (토) 19시

대학로 선돌극장


제작/기획

프로젝트아일랜드


스태프

예술감독 : 서지혜

극작 : 모토야 유키코

번역 : 이홍이

연출 : 곡수인

조명 : 김성태

영상제작 : 한윤정

일러스트레이터 : 윤성호, 이명준

액팅코치 : 남동진

조명오퍼 : 서효영

기획 : 정선미, 안유진

디자인 : 최민영

사진 : NAM


배우

야마네 히데노리 役 정영록

오가와 나나세 役 최민영

가나모리 아즈사 役 정선미

반조 다카오 役 김수영




요즘 같은 시국에 오랜만에 혜화에서 연극을 봤다. 바로 제작, 기획의 '프로젝트아일랜드' 작품인 연극 <난폭과 대기>이다.

 

결론적인 감상평으로는 엄청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주 추천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그러나 요즘 같은 시국에 너무 집에만 있어 몸이 근질근질하다면 혜화로 나와 가볍게 볼 만도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기로 한 이유는 이 작품의 제작, 기획인 '프로젝트아일랜드'의 이전 공연인 연극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서지혜 연출) 작품을 정말 재밌게 봤기 때문이다. 2018년에 개최된 제39회 서울연극제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나 재밌게 봤어서, 그 이후로 서지혜 연출와 관련된 평론글이나 연출가 인터뷰까지 꾸준히 찾아봤었다. 게다가 나는 연극계에서 활약하는 대부분의 여성연출가들의 공연은 일종의 연대의식으로 믿고 보는 편이기 때문에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서지혜 연출이 아니라 '프로젝트아일랜드'의 신인 연출가인 곡수인 연출이었지만, 그래도 부푼 마음으로 극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온 혜화였어서, 연극을 보러 가는 길에 눈길에 닿는 혜화의 모습 하나하나가 너무 좋았다. 혜화는 서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하나이다. 이전부터 그랬다. 혜화에만 오면 뭔가 가슴이 벅차고 설렌다. 비탈길마다 치열하게 붙은 공연포스터가, 누군가의 간헐적인 손길로 그럴싸하게 연명하는 극장들이, 줄지어 다니는 연인들, 낙산공원과 마로니에공원까지 전부 다, 너무 좋다. 나중에 내가 서울에 아예 정착하게 된다면, 그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혜화였으면 한다. 어쨌거나, 공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작은 옷가게에 들렸었다. 몇 가지 안되는 여성 옷과 식물들을 팔고 있었다. 사고 싶을 정도로 끌리는 건 없었지만 몇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정성스럽게 걸려진 옷과 그 사이를 비집고 식물들이 자라나는 모습이 꽤나 볼만 했다.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가꾼 작은 공간은 그게 방이 되었든, 가게가 되었든, 매번 알 수 없는 애정이 간다.

 

사담이 길었다. 공연이 시작됐고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한번의 손소독과 두 번의 열체크와 전신 소독과 장갑을 착용한 채 극장으로 겨우 출입할 수 있었다. 관객과 관객 사이에는 한 좌석 씩 건너 앉아야만 했다.


그리고 대략 100분쯤 지났을까, 그리 '추천할만 하지 않은' 공연은 끝이 났다.


연극 <난폭과 대기>는 일본 극작가 겸 연출가 '모토야 유키코'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 일본에서는 연극 공연 후 소설이 출판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일본의 버블경제 시대를 겪고 자란 제로세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공연이다.

 

작품의 주요 공간적인 배경은 [야마네 히데노리]와 [오가와 나나세]가 함께 사는 집이다. 둘은 남매도, 애인도 아니지만 그렇게 6년을 같이 살았다. [야마네 히데노리]는 6년 동안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 [오가와 나나세]는 그런 히데노리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코미디 연습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히데노리의 직장 후배 [반조 다카오]가 집을 찾아 온다. 반조는 나나세에게 흥미를 느끼고,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의 여자친구인 [가나모리 아즈사]를 소개하며 히데노리와 나나세의 관계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일본 작품을 원작으로 두는 공연들은 늘 일본 문학 특유의 색깔이 짙어서 그런지 늘 별로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지금까지 본 작품 중 가장 괜찮았던 일본 작품 원작인 공연은 국립극단의 연극 <나는 살인자입니다>(전인철 연출)이었던 것 같다.

 

현재까지 본 일본 작품을 원작으로 둔 연극에서 드러난 특유의 특징은, 첫째, 표면적으로 드러난 중심 갈등이 붕괴되며(반전) 새로운 갈등으로 치닫는 구조(혹은 갈등의 원전 자체가 붕괴되는 허무주의적 결론)이다. 둘째, 여성 캐릭터의 설정은 지극히 전형적이고 소모적이다. 즉 틀에 박힌 여성성이 드러나고 낮은 젠더 감수성의 모습이 나타난다. 셋째, 목적 달성을 위한 주인공 인물의 맹목적인 감정(분노, 슬픔, 원망, 복수 등)이 드러난다. 특히 현재 일본 작품을 원작으로 둔 연극에서는 특유의 허탈한 허무주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며 결론을 맺는다.

 

대략 이러한 특징들을 상기시키며 일본 작품을 보다보면 정말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렇다. 일본 작품에서 반전이 공개되기도 이전에 반전을 짐작한 경우가 꽤 있어서 드라마의 재미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역시나 이 연극에서도 밝혀지게 된 반전은, 갈등의 원전 자체가 붕괴되어 버리는 효과를 냈다. 그리고 반전 그 이후의 구조가 펼쳐지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중심 갈등이 붕괴된, 이 망망대해에 놓인 작품 속 인물들은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아니면 사는 것을 아예 포기할텐가? 따위와 같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며 관람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본 이 연극은 이러한 갈등 뒤의 '뒷심'이 다소 약했다. 뒷심이 약했다고 느꼈던 이유는 드라마 그 자체의 문제이기 보다는, 인물이 잘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난 아직도 주인공 [야마네 히데노리]가 왜 벽장에 숨는 행동을 했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관음증일까?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는 벽장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절망했을까? 흥분했을까? 관음증이 아니라면,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은 죄의식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관음증-죄의식의 콜라보? 잘 모르겠다. 일본은 참 관음증 따위의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주연 외에 두 인물, [가나모리 아즈사]와 [반조 다카오]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반조 다카오]를 연기한 배우는 화술 훈련이 덜 된 배우처럼 보였다. [반조 다카오] 역은 작품에서 정말 중요한 인물인데, 대사 전달력이 떨어져서 아쉬웠다. 캐릭터의 구축 자체도 문제였다. 내가 연출가고 오늘날 이 연극을 올려야 한다면, [반조 다카오]의 원작 속 꽤 많은 대사를 배우와 함께 손봤을 것 같다. 오늘 본 작품에서 이 인물은 그저 그루밍 성폭행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연출은 [반조 다카오]의 동기를 수정하여 보다 더 매력적인 캐릭터로 둔갑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찌질하고 도태된 성폭행범으로 아예 묘사해버렸어야 했다. 그게 아니고서 현재 이 인물이 더러운 욕구를 푸는 것이 마치 하나의 주요 해프닝이 되고 결국엔 화기애애하게 결말 맺는 것은, 글쎄,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분명 이 연극은 사회극이 아니다. 나 또한 연극 속 모든 인물들을 검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창작진은 하나의 작품이 갖는 힘을 그 어떤 사람보다도 믿고 있다. 아니 믿고 있어야만 한다. 그건 일종의 사명이고 책임이다. 그렇다면, [반조 다카오]의 인물이 이렇게 그려진 것이 최선이었을까, 나는 창작진에게 묻고 싶다. 참 많은 생각이 든다. 이 인물에 대해, 그리고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캐릭터들에 대해서 불편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자체만으로 풍자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풍자가 아니라면 인용이고, 수긍이다. 수긍은 긍정의 의미이니,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추가적인 연출에 대한 글을 적고자 한다. 극장 자체가 많이 좁기도 하고, 다이나믹한 동선을 이용할만한 작품도 아니었다. 돋보이는 것은 공간의 활용이다.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되는 [야마네 히데노리]의 방이 무대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였고, 부엌(무대 왼편-하수), [야마네 히데노리]의 직장(무대 오른편-상수), 길가(무대 바깥쪽-다운), 길가에 놓인 가로등(무대 오른편-상수)의 공간 설정과 구분이 이뤄졌다. 공간 구분은 분명해서 좋았다. 좁은 무대의 경제성을 고려한 공간 설정을 통해, 공간이 갖는 힘을 잘 활용하였다. 특히 집과 그 밖의 분위기의 대조가 흥미로웠다. 집이라는 공간은 에너지가 정적인 반면, 그 밖의 공간은 에너지가 동적이었다. 연기적인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음향과 조명 효과 또한 그러한 대조를 보였다.

 

작품 중에는 간혹가다 세 번에서 네 번 정도의 나레이션도 등장했다. 부연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암전 중 녹음된 여성의 나레이션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이러한 나레이션이 어색하지 않고 무난하고 능숙하게 처리되어 좋았다.


작품이 끝나고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다. [야마네 히데노리]와 [오가와 나나세], 그들을 한 집에서 수 년 간의 시간 동안 살게끔, 그들을 옥죄었던 것은 단순한 증오도, 죄책감도 아니었다. 서투른 소통에서 비롯된 허무주의적인 결과였다. 연출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인즈 코헛의 말을 인용했다. '인간은 외로움이라는 심리적 결핍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반응에 과민하고 스스로 과장하거나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라는 말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일본의 버블경제 시대를 겪고 자란 제로세대 청년들이지만, 나는 현재 사회적,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한국의 n포 세대 청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청년은 홀로 감당해야 할 책임감의 무게가 점점 커지며, 차라리 포기하는 편을 택한다. 현재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잡은 사회에 대한 불신과 인간관계 단절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 이러한 단절은 결국 소통의 붕괴로 이어진다.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여 서툴게 표현되는 욕구들의 화살은 오갈 곳 없이 서로에게 향하고, 결국 자신에게 향하기 마련이다. 원작과 비교하여 이 기묘하고 엉뚱한 무드는 연극에서 다소 약하게 표현되어 아쉽지만, 원작의 메시지는 참 많은 담론을 내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주제로 나 또한 작품을 써보거나 올리고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피어나는 계기가 되어준, 그래서 그나마 보길 잘 했다, 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라는 것에서, 위안을 가지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다음 보게 될 연극은 무엇일까?

 

 

[이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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