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 시대의 오디세우스 [영화]

영화 <인사이드 르윈>(2013)
글 입력 2021.06.16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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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끊임없이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며 새로운 삶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다시 쓰일 만큼 가치가 크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잊힌다. 그렇다면 신화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신화를 재구성하는 시점에서 신화의 가치를 평가할 때, 오로지 시간적인 측면의 태고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에 <오뒷세이아>가 고전의 선두이자 서구 문화의 출발점이 된 것은 그것이 가장 먼저 쓰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다시 쓰일 만한 가치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뒷세이아>의 옮긴이 천병희는 <오뒷세이아>가 다른 서사시보다 근대적인 가치관과 인간상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온갖 고난을 자신의 지혜와 끈기로 극복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오디세우스가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새 시대의 가치관을 닮았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오디세우스는 서사시의 마지막 주인공이라고 불리며 기존의 신화적 영웅관을 해체한 존재가 되었지만, 기존의 관습을 해체함으로써 얻어낸 근대성은 그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얻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행적에서 드러나는 근대성과 별개로, 그가 숱한 고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역시 비범한 능력을 지닌 영웅이자, 아테나의 총애를 받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리아스>와 같은 작품에서 신의 미움을 산 영웅이 어떤 최후를 맞는지 지켜본 바 있다. <오뒷세이아>가 그리스 신화의 운명론적 색채를 조금 덜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돌아갈 곳이 있는 비범한 영웅의 귀환담을 지금 여기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다소 어려워 보인다. 루카치는 서사시를 선험적인 시대, 즉 목표가 정해진 시대의 이야기로, 근대의 소설을 신에게 버림받은 시대의 이야기로 정의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신도, 영웅도, 목표도 없는 시대에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어떻게 다시 쓰이고 새로운 삶을 얻는가?
 
 

표류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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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영화 <인사이드 르윈>은 다시 쓰인 <오뒷세이아>다. 영화는 <오뒷세이아>에서 두드러지는 두 개의 모티프,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떠돌다가 고생 끝에 고향에 돌아온다는 귀향자 모티프와 바다를 항해하던 선원이 풍랑에서 겨우 살아남아 온갖 경험을 한다는 선원 모티프를 독특하게 변주한다. 영화의 주인공 르윈 데이비스도 가수(공연자)라는 직업부터 다소 오만하고 감정적인 성격에 이르기까지 많은 점에서 오디세우스를 연상케 한다(<오뒷세이아>의 9권부터 12권은 오디세우스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주는 내용으로, 연회에 참석한 청중들은 그의 뛰어난 언변과 신비로운 이야기에 매혹된다). 그러나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르윈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영웅이 아니며, 그에게는 돌아올 곳이 없다는 것이다.
 
르윈은 카페 공연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포크송 가수다. 원래 듀엣으로 활동했지만 자살로 파트너를 잃고, 마땅히 지낼 곳도 없어 밤마다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지만 그를 반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다. 영화의 초반부는 좁은 공간을 이리저리 떠도는 르윈의 이미지로 가득한데, 도시를 수직/수평으로 가로지르는 답답한 실내(엘리베이터, 지하철)와 좁고 깊은 복도는 그의 방황이 어떤 의미인지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외에도 선원이라는 가업과 선두(船頭)의 모양을 연상케 하는 지인의 집 구조는 그의 인생에 표류의 이미지를 더한다. 오디세우스에게 표류의 끝은 집으로의 귀환이었지만, 의지할 사람도, 집도 없는 르윈에게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표류는 목표를 향한 선형적인 과정이 아니라 반복적인 순환에 가깝다.
 
이외에도 르윈은 여러 면에서 오디세우스와 다르다. 영화는 <오뒷세이아>의 각종 세부 요소를 비틀어 르윈이라는 인물을 구축한다.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는 아내 페넬로페와 현명한 아들 텔레마코스는 르윈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낙태를 결심한 전 애인 ‘진’과 ‘다이앤'으로 변주된다(다이앤의 경우 결국 낙태를 하지 않았고, 르윈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영화 중반에 알게 된다). 치매를 앓는 르윈의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누나도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의 뜻이 ‘증오받는 자’임을 생각하면, 르윈은 어떤 면에서 오디세우스보다 더 오디세우스다운 인물인 셈이다. 이외에도 르윈이 실수로 문을 열어놓는 바람에 지인의 집에서 뛰쳐나간 고양이를 겨우 찾아서 데려왔지만 알고 보니 전혀 다른 고양이임이 밝혀지는 장면은 오디세우스의 충견 아르고스가 20년 만에 걸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단번에 알아보는 대목을 완전히 비튼다. 오디세우스가 거쳐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켰듯, 르윈의 존재는 여러모로 민폐가 될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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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르윈의 표류는 새로운 목적지를 설정함으로써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전 애인 진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가수 ‘트로이’가 시카고에 있는 유명한 클럽 ‘뿔의 문’의 주인이자 유명한 매니저인 버드 그로스먼에게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르윈은 앞서 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양이(고양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와 함께 무작정 시카고로 향한다. 그러나 시카고로 향하는 그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다.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오디세우스와 함께했던 부하들의 모습을 닮았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섬에 정박하기만 하면 문제를 일으키고 그를 곤경에 처하게 했던 것처럼, 이들 역시 차가 멈출 때마다 문제를 일으킨다. 결국 르윈은 이들을 뒤로 하고 다른 차를 얻어 타 힘겹게 시카고에 도착한다.
 
<오뒷세이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앞서 언급한 몇 가지 상징을 통해 이 영화가 오디세우스 신화의 요소들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트로이는 오디세우스의 귀환담이 시작된 장소이며, 뿔의 문은 그의 아내 페넬로페의 꿈에 나오는 장소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라면 ‘뿔의 문’으로 나오는 꿈들은 누가 그것들을 보든 꼭 실현되기에, 우리는 트로이와의 만남을 계기로 각종 고난을 이겨낸 후 뿔의 문을 거쳐서 금의환향하는 르윈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뿔의 문에서 르윈은 그의 앨범 이름처럼 내면의 이야기(inside Llewyn Davis)와 예술관을 노래하지만, 그의 노래는 버드 그로스맨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이 파이아케스족 사람들을 매료시킨 것과는 대조적이다. 안 팔리는 음악은 때려치우고 자신이 기획하는 트리오에 들어오라는 버드 그로스맨의 조언을 뒤로 한 채, 르윈은 세상에 없는 그의 음악적 파트너 마이크의 부재를 느끼며 돌아갈 곳 없는 뉴욕으로 향한다.
 
물론 돌아가는 길도 순탄하지는 않다. 오디세우스가 파이아케스 사람들의 으리으리한 호송선에서 잠을 자며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향하는 사이, 남의 차를 얻어타는 대신 운전을 하는 르윈의 처지는 정확하게 반대된다. 운전을 하던 르윈은 전 애인 다이앤과 세상에 없는 줄 알았던 자신의 (생물학적) 아들이 있는 애크론으로 향하는 도로를 응시하지만 그는 마음대로 방향을 돌릴 수 없고, 근본적으로 혈연이 있는 땅은 그가 돌아갈 곳이 되지 못한다. 르윈은 모험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깨닫는다. <오뒷세이아>의 모험이 최종적으로 상실을 극복하는 모험이라면, <인사이드 르윈>의 모험은 상실을 자각하는 모험이다.
 
뉴욕으로 돌아온 르윈은 음악을 포기하고 다시 선원이 되기로 마음먹지만, 그것조차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간신히 돈을 끌어모아 조합 회비를 냈지만 배를 타는 데 필요한 선원증을 잃어버렸고, 선원증을 다시 발급하려면 또 돈이 필요하다는 조합장의 말에 그는 아연실색한다. 이 부분에서 조합장은 그를 보더니 갑자기 ‘혹시 휴 데이비스의 아들이냐’고 묻는데, 이는 음악을 하던 때에도 언제나 누군가의 대타이자 객체(마이크의 동료)였던 르윈이 도망치듯 선택한 새로운 삶에서도 객체가 되는 슬픈 아이러니다. 결국 르윈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원이 되기를 포기했고, 운명은 얄궂게도 그를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게 만든다.
 
 

두 명의 오디세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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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 르윈의 무대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 전체에 걸쳐 드러나는 상징 중 하나인 고양이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선원이 되기를 포기한 직후 르윈이 골파인 교수의 집(영화 초반부에 르윈이 눈을 뜬 곳이기도 하다)에 묵는 장면에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자 반전이 드러나는데, 영화 초반에 교수의 집에서 빠져나와 르윈과 잠시 뉴욕을 돌아다녔던 고양이의 이름이 사실은 ‘율리시스(오디세우스)’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 장면은 영화가 <오뒷세이아>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줄곧 르윈을 오디세우스로 생각했던 관객들에게 진짜 오디세우스가 누구인지 묻는다. 오디세우스는 르윈인가, 고양이인가, 아니면 둘 모두인가?

르윈과 모험을 함께했다는 점에서 고양이 율리시스(이하 율리시스)를 르윈의 또 다른 모습이자 그의 내면(inside Llewyn)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쉽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영화의 초반부터 율리시스는 르윈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르윈의 삶이 안으로 침잠하는 삶이라면, 율리시스의 삶은 외부를 향한 욕망으로 가득하다. 집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율리시스의 시선은 언제나 창문 밖을 향한다. 특히 지하철 안에서 르윈과 율리시스의 시선이 반대를 향하고 있는 장면은 두 존재의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율리시스는 결국 르윈의 친구인 진의 집에서 밖으로 도망쳤고, 르윈이 율리시스로 착각하고 데려온 고양이는 비슷하게 생긴 떠돌이 고양이였다. 시카고로 향하는 여정은 자신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또 하나의 율리시스와 함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진짜 율리시스는 바깥 구경을 마치고 골파인 교수의 집으로 돌아온다. 진짜 율리시스는 진의 집에서 트로이를 만난 후, 자신만의 모험을 한 뒤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즉 전통적인 <오뒷세이아>의 서사 구조를 따르는 존재는 르윈이 아니라 율리시스인 셈이다. 고양이의 이름이 드러나는 장면은 앞서 말했듯 르윈이 오디세우스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디세우스의 다른 형태임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모험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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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윈과 고양이,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결말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진다. 결말에서는 귀향자 모티프의 핵심인 ‘귀환’이 수미상관이라는 형식을 통해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은 모두 르윈이 카페에서 공연을 한 다음 개인적인 이유로 그를 찾아온 괴한에게 얻어맞는 구성을 취하는데, 오프닝과 엔딩의 미묘한 차이는 르윈이 모험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 혹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유추할 수 있는 핵심 요소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죽음에 대한 노래를 부르던 르윈은 엔딩에서 과거 마이크와 함께 불렀던, 떠나간 사람을 추억하는 노래를 부른다. 르윈을 오디세우스 그 자체로 본다면, 그는 모험을 통해 동료의 죽음을 극복하고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전후 맥락이 약간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 엔딩이 오프닝과 완벽하게 똑같은 장면으로 구성된 것을 생각하면, 엔딩은 모험을 통해서 바뀐 현실이라기보단 똑같은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본 것에 가깝다. 엔딩이 오프닝의 재구성이 아니라, 오프닝이 엔딩의 재구성인 셈이다. 재구성된 현실에서는 르윈이 죽은 마이크와 함께 만들었던 노래를 부르는 것과 괴한에게 얻어맞은 이유만 빠져 있고 나머지는 그대로다. 그리고 영화가 전개되면서 관객은 오프닝에서 빠진 장면들이 그의 상실, 결함과 깊게 관련된 부분임을 알게 된다. 르윈은 지금껏 마이크의 죽음에 대한 부채 의식과 본인의 내적 결함을 외면해 왔고, 모험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상실과 결함을 마주본다. 결과적으로 르윈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던 장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비범한 능력도, 돌아올 집도 없었던 우리 시대의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현실의 개변이 아니라 현실의 새로운 인식으로 마무리된다.
 
*
 
코엔 형제는 <인사이드 르윈> 이전에도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2000)를 통해 오디세우스 신화를 다시 쓴 바 있다. 두 작품은 전통적인 영웅관을 해체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지향하는 바는 확연히 다르다.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는 주인공을 영웅이 아니라 바보, 또는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로 설정하고, 그들의 모험을 통해 당시 사회의 비정상성을 부각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이 이런저런 고난을 겪고 사회의 내부로 복귀하는 결말은 잃어버린 가치의 회복을 통한 정신적 이상향을 지향한다. 반면 <인사이드 르윈>은 오디세우스 신화를 해체하고 비틀면서 사회에서 배제되었지만 배제되지 않은, 무력한 개인의 덧없는 삶의 굴레를 그려낸다. 순환하는 구조를 가진 이 영화에서 지향점, 즉 방향에 대한 논의는 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인사이드 르윈>은 삶의 비극성에 대한 이야기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인사이드 르윈>은 말하자면 삶의 반복과 순환에서 생기는 퇴적물에 대한 영화다. 평론가 이동진은 <인사이드 르윈>을 “삶의 폐곡선에 물처럼 고인 우수”라 평했는데, 여기서 핵심은 물처럼 고인 ‘무언가’일 것이다. 인생의 지난한 반복에서 간혹 생기는 균열은 삶의 폐곡선 안에 알 수 없는 퇴적물을 남기고, 이는 잠겨 죽을지도 모르는 늪인 동시에 삶의 폐곡선을 무너뜨릴 가능성이다.
 
<인사이드 르윈>은 모험을 통해 상실을 마주하는 과정이기에, 최종적으로 르윈이 상실을 극복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회복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고, 자신의 상실을 마주했을 뿐 삶의 비극적인 순환에서 빠져나가지는 못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코엔 형제가 다시 쓴 <오뒷세이아>의 핵심이 이와 같은 다층성이며, 이를 통해 영화는 관객 각자의 다시 쓰기를 통해 또 하나의 신화로서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다층적인 캐릭터와 서사가 <오뒷세이아>가 2000년 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듯, 이 영화의 다층성은 시간이 지나도 이 영화가 기억되는 힘이 되지 않을까.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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