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테디셀러의 관록과 에너지, 뮤지컬 '시카고' [공연]

글 입력 2021.06.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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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뮤지컬 <시카고>와의 첫 만남



내가 뮤지컬 <시카고>를 처음 접했던 건 4년 전 딱 이 맘 때쯤, 대학에서 보내는 첫 학년 첫 학기가 끝난 날이었다. 누가 같이 보자고 조른 것도, 이 작품에 딱히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서도 아니었다. 그렇다. 당시 내가 이 작품을 택했던 이유는 그저 ‘유명한’ 작품이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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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가 관람한 뮤지컬 <시카고> 내한 공연의 캐스트

 

 

70~80년대에 탄생해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는 고전 뮤지컬로 영국의 <오페라의 유령>이 있다면, 미국에는 단연 <시카고>가 있다. 197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이후 지금까지도 본토인 미국을 비롯, 세계 각국에서 활발하게 공연 중이다. 가장 오래 공연된 미국 뮤지컬, 그리고 2014년을 기준으로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여러 번 공연된 리바이벌 뮤지컬로 오페라의 유령에 이어 2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 작품인 만큼, 당시 그저 뮤지컬을 ‘좋아할’ 뿐 결코 잘 알지는 못하던 내가 단순히 그 유명세에 이끌려 관람을 결정한 것도 결코 큰 우연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만족스러운 관람이었을까?


아니, 아쉽게도 당시의 시카고는 나에게 큰 감명을 주지 못했다.

 

마침 내가 관람했던 공연이 오리지널 내한팀의 공연이었던지라, 줄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작품의 ‘정서’였다. 작품 자체에서 풍기는 진한 미국의 향기, 살인, 간통, 탐욕 등 인간의 모든 죄악을 다소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버무려 놓은 작품의 소재, 대사와 안무, 의상의 높은 수위까지. 사실 시카고를 처음 보고 나오면서 했던 생각은 실망스럽다기보다는 ‘신기하다’라는 것이었다.

 

이 작품의 정서가 배경이 되는 미국과 너무나 다르고, 또 보수적인 편인 한국에 먹힌다니(?), 말 그대로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시카고는 국내에서 2000년 초연한 이래, 올해 21주년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한 공연이 아닌가. 관객들의 수요와 흥미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공연들이 빠르게 내려가고 사라지는 치열한 공연계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기록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기록들과 극찬에도 불구하고 분명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며 극장에서 나가는 누군가는 있을 터. 그날의 이 관객이 바로 나였다.

 

 


(관심이) 꺼진 작품도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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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생각하던 것과 조금 시각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로부터 3년 후, 우연히 영화 <시카고(2002)>를 보면서부터였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생각 없이 누른 클릭 버튼은 이후 약 2시간 동안 내가 지금까지 이 작품에 대해 완전히 잘못 판단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금발의 이미지에서 올 수 있는 스테레오 타입을 활용해 ‘록시’라는 캐릭터 특유의 백치미, 푼수미를 100% 발휘한 르네 젤위거, 앞머리 내린 단발도 이렇게 도도하고 날카로워 보일 수 있구나,라는 것을 처음 알게 해 준 벨마 역의 캐서린 제타 존스, 이들과 그 외 모든 이들의 연기를 한 층 돋보이게 하는 감독 롭 마샬의 연출까지. 보통 원작 영화를 뮤지컬로 옮기는 패턴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시카고>는 이례적으로 뮤지컬 작품이 원작이 되어 영화화된 작품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니, 그렇다면 뮤지컬을 무조건 다시 봐야겠어!

 

 


다시 극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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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직접 관람한 5월 30일 오후 6시 30분 공연, 6월 9일 오후 3시 공연의 캐스트

 

 

2021년 올해, <시카고>는 올해로 한국 초연 21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또 다시 갈아치웠다. 또한 이러한 대기록에 걸맞게, 지금까지 작품을 꾸준히 이끌어왔던 관록의 배우들과 새로운 배우들을 적절히 섞은 캐스트를 선보임은 물론, 여전히 죽지 않는 작품 고유의 힘을 과시하며 지난 4월 첫 공연 이후 그야말로 가장 ‘핫’한 공연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마치 4년 전의 내가 한국인의 정서 운운했던 것이 다소 부끄러워질 정도로 관객들은 <시카고>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으며, 그 사이의 나 역시, 배우들이 모두 퇴장하고 나서도 이어지는 브라스밴드의 열정적인 연주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


이제 나에게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른 뮤지컬들과 차별화되는 작품만의 강점으로 다가오는 <시카고>의 특징은 다름 아닌 ‘전형성의 결여’다. 관객들, 특히 당시의 나처럼 공연 관람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뮤지컬과 같은 장르에서 으레 기대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 장치, 뚜렷한 서사와 기승전결, 시원한 고음 위주의 넘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시카고>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시카고>는 화려한 무대로 우선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고 들어가는 일반적인 대극장 뮤지컬과는 달리 무대가 그야말로 심각하게 단출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뭐가 하나도 없다’. 2막 후반부를 장식하는 벨마와 록시의 보드빌 무대에서 내려오는 반짝이 무대 정도를 제외하면 무대에 아무런 전환도, 변화도 없다.

 

대신 특이하게도 15인조 브라스밴드 및 지휘자(음악감독)이 완전히 무대 전면에 노출되어있다. 그리고 이들이 무대장치 및 엑스트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4년 전 봤던 내한공연에서 가장 뚜렷이 기억에 남았었던 장면이 바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 지휘자가 열정적으로 연기하고 지휘하던 장면이었는데, 한국 버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국내 공연에서는 음악감독이 극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주인공인 록시는 물론, 록시의 남편 에이모스, 그리고 변호사 빌리 플린 역시 모두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심지어 극 중 캐릭터들과 직접 대화를 하는 장면도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연주자나 음악감독이 극 중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여담으로 내가 ‘개인적인’ 평가를 내린 것과는 별개로, 당시 내가 관람했던 2017년 공연은 최근 몇 년간의 각종 뮤지컬 내한공연 역사에서 가장 전설적인 공연으로 손꼽히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발걸음을 옮긴 당시의 나에게 지금이나마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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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 연주자나 밴드 연주자들만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극의 도입부에서 키티 역의 배우가 관객들을 1920년대 시카고로 이끄는, ‘사회자’로서의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시작으로 극이 끝날 때까지 다양한 배우들이 이와 같은 다소 부자연스러운, 즉 극적인 흐름 속에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넘버 ‘All That Jazz’의 전주가 흐르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극장 안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등장하는 벨마나, ‘소개합니다!’라는 사회자의 멘트에 이어 등장하는 마마와 빌리, 2막의 록시의 재판 장면에서 나오는, 얼핏 마임을 떠올리게 하는 인위적인 재연 장면들까지. 이처럼 <시카고>는 극 중에서 벨마와 록시의 선망의 대상이자 1920년대 미국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하는 보드빌 무대 형태를 차용한다. 즉, 서사와 연결점에서 느껴지는 어딘지 모를 현실과의 괴리감은 이와 같은 극중극 형식에 있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연기’임을 전제로 하는 배우들의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연기, 현실의 인물인 밴드 및 관객과의 소통은 이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잠시 극에 몰입했다가도, 이내 현실로 돌아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그저 폭소하게 만든다. 사실 이 장치는 이 작품의 성격을 고려할 때, 굉장히 핵심적인 장치다. 아무도 살인이, 간통이, 위선이 판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한다. 대신 이것들이 영화로, 쇼로, 그리고 오락으로 소비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웃을 수 있고 또한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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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무대가 비어있는 만큼,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커지는 극이 바로 <시카고>다. 화려한 무대를 통해 어느 정도 분산시킬 수 있었던 관객의 시선이 온전히 배우들 개인의 몫으로 돌려진다는 것이다. 특히 1막에서는 보드빌 무대에서의 ‘2인조’의 역할을 혼자, 2막에서는 재판에서 검사를 꼬드기기 위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벨마 역의 배우나, 밴드를 제외하고 무대 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독백과, 이에 연이은 넘버로 8분 이상의 무대를 온전히 채워야 하는 록시 역의 배우에게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노련한 배우들에게도 굉장히 도전적인 극이 아닐까 싶다.


또 넘버보다는 대사로 처리되는 연극적인 장면이 많으며, 넘버도 곡 자체의 기교와 고음보다는 해당 넘버에서 보여주는 종합적인 퍼포먼스에 집중하는 극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이 퍼포먼스의 중심에는 낮고 무거운 재즈 선율에 어울리는 안무가 밥 포시의 안무가 있다. 그의 안무는 일반적인 안무들처럼 큰 몸짓보다는 손끝과 발끝 등, 주로 몸의 작은 부위를 이용한 디테일하면서 어딘가 기이한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느리고 절제된 몸짓을 통해 이 작품 특유의 관능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낸다. 이처럼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무대 공간으로의 집중을 유도하는 디테일한 요소들로 가득한 <시카고>는, 그래서 오히려 관객들에게 단 한순간의 이탈도 허용하지 않는다. 잠깐이라도 눈을 돌리는 순간 그는 이 은밀하면서도 균일한 흐름에서 외면당하며,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카고>는 앞서 언급했듯이 1920년대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하는 극으로, 그 시대적 배경이나 문화적 배경 모두 2021년 현재 대한민국과는 크게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관객의, 소비자의 외면을 당하는 작품들이 모두 이들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공통점을 보았을 때, 21세기 그리고 2021년 지금 여전히 유효한 <시카고>의 인기 요인 역시, 그 동시대성에서 비롯된 이 시대 사람들의 공감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절대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대놓고 보여주기 위한 극중극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담겨있는 풍자는 더욱 신랄하며,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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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진실과 정의를 대중에 알려야 할 기자들이 벨마에서 록시로, 더 잔인한 살인을 저지른 키티로, 그리고 또 다시 다른 사건으로, 오로지 자극적인 특종에만 목을 매고 달려가는 모습은 어딘지 낯설지 않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랑 뿐’이라면서 5000달러의 수임료를 얻기 위해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빌리, 죄수들을 일컬어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아이’라고 하면서 전화 한통에 50달러씩을 받는 간수 마마, 기자들과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하는 록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품의 스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 자체가 거짓이고 위선인 기자 메리 선샤인까지. <시카고>를 더욱 재미있게 보고 싶다면, 극 중 과연 어떤 이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유심히 관찰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7월 18일 일요일까지, 대성 디큐브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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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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