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경계를 지우다: 모든 것의 모든 모양 [영화]

글 입력 2021.06.09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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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평생을 걸쳐 두려워할 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물’이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귀에 물이 들어가는 것을 병적으로 걱정할 정도이다. 수영은 고수하고 짧은 잠수 한번 제대로 해본 기억이 없다.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면 꼭 생과 사의 경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두렵다. 어쩌면 물은 인간이 닿기에는, 또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근원적이고 또 온전할 지도 모른다는 핑계까지 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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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과장하자면 물 공포증을 지닌 나이지만, 닿을 수 없는 곳이기에 환상이 짙은 것도 사실이다. '경외'라는 단어도 있듯이, 공포와 경이는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물과 관련된 이미지가 나를 강하게 매료할 때가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영화나 책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 물결에 안겨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잦아드는 순간을 감각하는 건 어떨 기분인가 자주 상상한다. 물의 흐름에 몸을 이루는 곡선을 맞추며 헤엄치는 건, 그 자체만으로 이세계(異世系)를 경험하는 일이 아닐까.

 

물에 대한 환상은 어릴 때부터 유구했던 것 같다. 빈 학교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친구를 구경하며 듣던 물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으며,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범고래이고, 처음 회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이고, 인간은 사실 물에서 왔으며 아가미의 흔적 기관이 존재한다는 누군가의 낭설에 낭만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나에게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그야말로 꿈 같은 작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관람한 것은 기예르모 델 토르 감독의 명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물을 운명 삼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인력이 작용했다. 나와 극점에 위치한 이들의 서사는 필시 끌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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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모양’이라는 제목도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물은 모양의 없음을 모양으로 삼는 물질이 아닌가. 부제 ‘사랑의 모양’과 동치시켜 살펴본다면 물의 본질적 속성은 용기에 따라 담기는 모양이 변함에 있으며, 사랑도 그 감정을 담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그 결이 달라짐을 뜻한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일축하자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모양이 없는 것의 모양을 부여하는 서사’가 아닐까.

 

소외 집단의 일원으로 사회에서 그 어떤 모양도 제대로 지을 수 없던 엘라이자와 누군가에 의해 모양이 파괴된 크리처는 사랑이라는 인류 보편적 감정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모양을 빚어주게 된다. 이 서사적 줄기를 바탕으로 영화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나름의 관점으로 소제목을 부여해보았다.

 

 

 

1960년대 미국이 품은 일상적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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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미국은 우주에 대한 선망, TV의 가정 보급, 독특한 색감으로 가득 찬 거리, 세련된 패션 스타일 등으로 인한 낭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특정 집단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쌓은 환상임을 영화는 꼬집는다.

 

기득권 층, 특히 백인 남성 집단은 여성,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다른 생물 종 등을 교묘히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로 끌어들인 뒤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들의 발화를 저지하며, 자신들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다. 인간 그 자체로서의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감독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지표로 이러한 현실적 문제점을 드러내는데, 이를 거대 담론으로 끌어 나가기 보다는 소수자 개인에게 어떠한 상흔을 입혔는지에 집중한다. 개인적으로 ‘일상적 재난’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부분이다. 엘라이자는 샤워를 하고 달걀을 요리하며 출근을 하는 일상을 반복하지만, 시대적 재난에 의해 ‘언어 장애인 여성 청소 노동자’ 이외의 정체성은 모두 거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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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이자가 미소가 아름다우며, 사실은 꽤나 강단 있고 솔직한 성격이고, 발을 굴러 춤을 출 줄도 안다는 사실은 같은 소수자인 자일스나 젤다 앞에서만 드러난다. 심지어 아가미로 호흡할 수 있는 물의 운명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육지의 인간들에 의해 지워진다. 스스로를 드러내고 살 수 없음은, 제대로 발화할 수 없음은 곧 재난에 가깝다.

 

특히 냉전이 가속화되던 시기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대가 품고 있던 다름에 대한 배타적 감각은 ‘양서류 인간의 발견’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극단화된다. 온 몸이 딱딱한 비늘로 뒤덮혀있고, 지느러미와 아가미가 끊임없이 끔뻑대며 괴성을 내지리곤 하는 인어는 그 외형만으로 쉽게 국외자로 분류되며, 이는 곧 추악함 등의 가치로 이어진다.

 

뱀파이어를 소재로한 최초의 영화 <노스페라투>는 독일 표현주의를 이끌며 세계영화사에 한 궤적을 그렸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은 오늘날 묘사되는 인외 존재와는 그 외형과 특성이 많이 다르다. 꽉 끼는 크록코트, 기형적인 외형, 소통이 불가하고 음습한 특성은 당시 민족주의에 큰 가치를 두던 이들이 '국외자'의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형상화한 결과였다.

 

최근 미디어에서는 인간적이며 외형적으로 우수한 인외자를 드러내 환상을 극대화한다면, 당시 사람들에게는 국외자를 비롯한 이형의 존재에 대한 배척 심리, 공포심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양서류 인간은 그 탄생이 꼭 노스페라투를 닮았다고 느꼈다. 1920년대 독일과 1960년대 미국에 흘렀던 유사한 정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 초반에서 스트릭랜드는 스스로를 신이자 인간의 기준으로 세우는데, 이때 우리는 진정한 ‘인간됨’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전기봉으로 크리처를 찌르며 웃고, 망설임 없이 총기를 난사하며, 여성과 타인종에 대한 멸시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성적 착취까지 시도하는 그가 진정 인간의 기준을 세울 자격이 되는 지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젤다를 비롯한 흑인 여성, 청소 노동자, 언어 장애를 지닌 엘라이자, 성소수자인 자일스 등을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열거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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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질적인 외형의 크리처조차 스트릭랜드와 비교했을 때 더욱 극단의 인류애를 보인다. 이는 ‘인간’이라는 외연을 양서류 인간으로까지 넓히는 행위이다.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답보 상태에서만 머물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해 확신에 찬 비난을 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엘라이자를 비롯한 소수자들의 일상적 재난을 묘사하고,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전부이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 환상의 일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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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엘라이자는 바로 아랫층에 위치한 영화관을 방문하는 대신 집에서 작은 TV로 영화를 본다. 영화관의 공간적 특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영화관은 대중들에게 열려 있다는 점에서 공적인 동시에 어둠에 묻혀 존재를 숨길 수 있는 아주 사적인 공간으로, 도시 속에서 환상에 매몰되어 현실을 잊기에 그보다 적합한 공간은 없다. 영화관 관계자의 친근한 초대에도 엘라이자가 그 공간을 찾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돌이켜 보면 엘라이자의 존재부터가 땅과 물 사이에, 현실과 환상 사이에 걸쳐져 있다.

 

엘라이자의 집은 항상 영화관의 사운드가 나직하게 흘러 들어오고, 수직으로 건물을 비추는 카메라는 그의 개인적 공간과 영화관이 한 축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엘라이자가 크리처의 이질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경계에서 언제든 환상 속으로 몸을 담글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관으로 도망친 크리처를 찾아 간 엘라이자는 영화관이 내뿜는 환상성과 크리처의 이질성을 한번에 끌어 안는다. 엘라이자는 필시 경계를 흐리는 '물' 그 자체이다.

 

실제로 크리처와 사랑에 빠지고 그를 시설에서 빼내며 함께 생활하는 일련의 과정은 ‘영화처럼’ 펼쳐진다. 물이 가득 차오른 욕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영화는 곧 건물 아래까지 흘러 들어간다. 진정한 영화는 영화관 윗층에서 (상영되는 것이 아닌) ‘벌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진정 삶의 영화됨의 표현이자 일상으로 스며든 영화를 보여준다.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엘라이자가 크리처와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부분에서 역시 간단한 조명 변화로 영화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다. 이처럼 엘라이자의 환상은 필시 현실과 등을 맞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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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물’이라는 소재 역시 이 소주제 하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오프닝과 엔딩 장면에서 물로 가득찬 공간에 잠들어 있는 엘라이자가 등장한다. 기억 속의 한 장면을 박제하는 용도로서 물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물의 역사적, 또한 현실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엘라이자와 크리처에게는 삶이자 사랑의 공간으로서 환상적인 이미지를 띄게 된다. 현실적인 재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것도 물이라는 공간에 의해서였다.

 

델 토로의 이전 작 <판의 미로>에서는 아이의 시각에서 본 환상의 세계와 참혹한 현실을 어느 정도 분리해 설명했다면,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물의 이중적 이미지를 사용해 두 세계가 일정 부분에서 포개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를 필시 환상의 일상화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는 영화와 픽션을 즐기는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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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모르 델 토로 감독

 

 

델 토르 감독의 관객으로서는 필시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셰이프 오브 워터>를 통해 이는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가끔 운명처럼 삶의 영화됨을 경험하고, 물리적으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을 감각하는 우리로서는 현실과 환상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보는 환영 역시 현실의 일부이고, 넓게 보면 현실 역시 실체 없는 환영일 지도 모르는 것이다. 엘라이자의 목에 난 ‘상처’로 인식됐던 것이 실제로는 그를 호흡하게 하는 ‘아가미’였음이 드러나는 것처럼, 현실과 환상은 서로를 보완하는 약이자 상흔으로서 끊임없이 변주한다. 내게 물이란 물질이 죽음의 공포로 가득찬 현실 공간인 동시에, 고래가 숨쉬고 파도가 부드러운 선경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델 토르 감독의 영화는 항상 놀랍도록 현실적이고, 또 환상적이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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