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립고 아름다운 별나라를 꿈꾸며 - 결혼전야

글 입력 2021.06.0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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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이후 한국 사실주의의 기준을 보여주는 연극 <결혼전야>. 작품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 경기도 송탄 시의 미군 부대 앞의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기지촌의 한 작은 클럽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세 여인의 일상을 포착한다. 명자, 숙희, 영란이 그 주인공이다. 명자의 결혼식을 앞두고 클럽의 문을 닫고 그곳에서 브라이덜 샤워를 준비하는 장면으로부터 극이 시작된다. 막이 열리면 테이블 위에 식기와 술잔 등이 정성 들여 차려져 있고, 콧노래를 부르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명자가 등장한다. 숙희는 카운터에 앉아 결혼식 비용 손익을 계산하고 있다.

 

만찬 준비를 하는 도중, 붉은 망사스타킹을 신은, 화려한 옷차림의 영란이 등장한다. 샴페인, 꽃가루 광주리, 케이크 등을 떠들썩하게 바닥에 내려놓고는 한껏 들떠 있는 상태로 애인 캐빈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명자가 내일 입을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오며 결혼식 반주가 울려 퍼진다. 그들은 선물을 교환하며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다 함께 춤을 추며 결혼 전야의 설렘과 진한 아쉬움을 함께 나눈다.

 

행복과 서글픔에 명자가 눈물을 흘리자, 영란은 그녀의 눈이 퉁퉁 부었다고 놀리다가 살인죄로 수감되어 있는 명자의 옛 애인 길수 얘기를 엉겁결에 꺼낸다. 숙희는 그런 영란을 나무라고, 말다툼을 벌이다가 영란의 옛 애인인 죽은 스티브와 도망을 간 마틴의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다툼이 심화 되고, 영란이 먼저 울음을 터뜨리며 모두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함께 끌어안고 울다 웃는다.

 

그러던 도중, 길수가 어딘가에서 소식을 들은 모양인지 꽃 한 다발을 들고 명자를 찾아온다. 숙희와 명자는 자리를 피하고, 정적이 이는 공간에서 길수는 꽃가루 광주리에 있는 꽃가루들을 한 움큼 집어 그녀의 머리 위에 뿌린다. 이내 그 손길은 격해진다. 결국 광주리 속 꽃가루를 있는 힘껏 그녀에게 다 털어놓고 나서야 그는 꽃다발을 남기고 자리를 떠난다. 죄라도 진 마냥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명자의 모습을 비추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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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언니, 나 같은 애가 나올까 봐 아기를 못 갖겠어"

 

때는 세기말 1990년대. 송탄 미군부대 앞 클럽에서 일하는 영란, 숙희, 명자. 이들은 각기 다른 사연으로 그곳에 오게 되었지만 우정만은 하나이다.

 

막내 명자의 결혼에 그들은 이별을 앞두고 담담한 파티를 벌이는데. 과거의 이야기를 회상하다 몰랐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들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극적 정교함, 하이퍼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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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는 내내 잘 만들어진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연극은 과장 되지 않고 대단히 일상적이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며 섬세한 연기를 통해 심리적인 흐름을 보여준다. 나는 두 번째 줄에서 연극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의 변화도 관찰할 수 있었기에 극 중에 처한 배우들의 상황이 더욱 실감이 났다. 보통의 연극이었다면 빠른 전개를 위해 삭제하거나 간소화시키는 장면들을 이 작품은 길게 따라가서 조명하며 그 안의 일상적 갈등요소와 깊은 내면 독백에 의한 행동을 담는다.

 

이 극적 정교함을 극단 측은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즉 극사실주의라고 명명한다. 러시아 유학파 1세대 전훈작가의 작품은 차범석 작가 이후 침체 되었던 사실주의 연극에 다시 불을 지핀 신사실주의로 규정되어 지기도 한다.

 

배우들은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법을 몸으로 익힌다. 러시아 출신의 배우 겸 연출가인 콘스탄틴 시르게예비치 스타니슬랍스키는 틀에 박혀있는 신파조의 연기를 거부하며 사실주의 연기를 주장한다. 그는 실제로 맡은 배역과 동일하게 살아보며 직접 심리 체험을 하고, 배우의 내외적인 능력들을 유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잠재적인 창조 과정을 실천하는 지침을 제시한다. 그는 보여지는 외적인 행동들을 좀 더 자연스럽고 확실하게 표현하고, 실제 삶도 무대 위에서 맡은 배역의 삶인 것처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배역에 스며들어 그 사람 자체가 된 느낌을 받았다. 작품은 국내 연기 입시 교재로 이용된다고도 한다.

 

 

 

여자들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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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들의 의리’라는 말은 자주 들었다. 그만큼 남자들의 끈끈한 우정에 관한 작품들은 툭 하고 튀어나올 만큼 찾기 쉽다. 그러나 여자들의 우정을 다룬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있다고 해도 성 역할 고정관념에 의한 한계에 부딪힌 경우가 부지기수다. 문화예술계도 시대에 발맞추어 변화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인식 개선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더 많이 찾아보고 소비하려고 한다.

 

<결혼전야>는 여자들의 우정을 다뤘다. 극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적 상황이 드러나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염된 세상 속에서 묵묵히 보통의 하루를 살아내는 세 여자들의 애잔함과 처연함을 따라갈 뿐이다. 결혼 선물로 침대를 사라며 200만원이 들어있는 자신의 통장을 선뜻 건네주기도 하고, 서로를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가 자신처럼 살까 봐 걱정하는 명자. 그러나 그들의 억척스러운 삶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시대가 그들의 삶을 흔들어 놓았을 뿐. 어떠한 상황이든 순수하고 끈끈한 우정과 사랑은 존재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성들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이긴 해도, 이 또한 낭만적인 사랑과 안정을 주는 정착의 수단으로 결혼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다. 제목에 이미 드러나 있기도 하고,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여자들의 우정’이라는 대목에 기대하고 간 것이 이유였는지 개인적으로는 무언가 채워지지 못한 갈증이 있었다. 관람할 때에는 이 부분보다는 극사실주의 극과 당시 시대의 일상을 체험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가시기를 권해본다.

 

 

 

장미, 오오, 순수한 모순의 꽃!


 

 

장미, 오오, 순수한 모순의 꽃.

 

겹겹이 싸인 눈꺼풀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잠이 되는 기쁨이여.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비명이다. 릴케는 사랑하는 여인 루 살로메에게 장미를 꺾어주려다 가시에 찔려 죽음을 재촉한다. 작은 상처는 백혈병을 유발했고, 급기야 목숨까지 앗아가게 되었다. 그는 생전에 장미를 좋아했고 많은 시에서 장미를 노래했다. 지독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미. 그러나 조그마한 가시는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런 장미는 순수한 모순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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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숙희는 계속해서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부른다. 개인적으로 아주 애정을 담고 있는 곡이기에, 그녀가 구슬프게 노래하는 장면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백만 송이 장미는 사랑을 할 때 피는 꽃이다. 가진 것이 없어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마음은 존재하고 그럴 때 백만 송이 꽃은 핀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그녀 자신이자 별나라를 그리워하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가시처럼 모순적인 현실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사랑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

 

일상의 단면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었고 배우들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감정적 변화를 밀접하게 따라가는 극이기에, 자칫하면 지루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전개 방식이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55분의 러닝타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배우들은 모두가 매력적이었고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란 역을 맡은 이지현 배우님의 연기가 놀라웠다. 연극이 끝나고 그녀의 인터뷰 영상을 보기도 했는데, 전혀 다른 이미지와 말투를 가지고 계셨다. 실제로 그는 억척스럽고 강한 연기를 위해 욕쟁이 할머니의 영상을 보며 학습했다고 한다.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세상 속에서 두 다리로 꼿꼿하게 버티고 서는 여자들의 순수한 우정이 심금을 울렸다. 어떤 시대이든 진심은 전달되기 마련이다. 함께라면 더 많은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서 배웠다.

 

장미, 오오, 순수한 모순의 꽃. 그립고 아름다운 별나라를 꿈꿨던 그들이 그 이후에는 조금 더 편안해졌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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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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