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간을 초월하는 대화의 시간 -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

글 입력 2021.05.2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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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스톡출판사는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시리즈 중 하나로 스페인의 고도 톨레도에 있는 엘 그레코 미술관을 선정했다. 그곳에 방문하여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와 하룻밤을 보낼 작가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작가 레오노르 드 레콩도이다. 작가는 책에 초반부터 도메니코스와 사랑을 나누러 왔다고 밝힌다. 물론 ‘각자의 시간성을 무화(無化)하지 않는 한(20)’ 그가 자신을 찾아올 리는 없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레콩도는 시간성을 무화하기 위한 몇 가지 시도를 작가로서 레콩도는 도메니코스를 만나기 위해 툴레도를 방문한 짧은 여행기와 화가 도메니코스의 일생을 교차한다. 엘 그레코 미술관에 찾아온 이야기부터 작가가 가진 도메니코스에 대한 기억으로 여행기는 시작하고, 재구성된 도메니코스의 이야기는 그가 성상화가가 아니라 화가로서의 삶을 꿈꾸며 크레타 섬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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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의 그림을 따라 도메니코스의 이야기 속 시간도 흘러간다. 크레타 섬을 떠나며 겪게 된 연인 아리아나와의 이별, 베네치아에서의 도전과 성장, 스페인 마드리드로의 떠남과 다시 톨레도로의 여정이 차례로 펼쳐진다.


크레타섬, 베네치아, 로마 어디에서도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도메니코스가 선택한 톨레도는 마드리드보다 더 크고 부유한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에 이어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수도원 교회를 위한 데단화 작업에 착수하며 머물렀고 또 다른 사랑을 만난다. 사랑도 잠시 헤로니마는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나고 도메니코스의 곁에는 아들 호르헤 마누엘이 남았다.


주변과 교류하지 않던 도메니코스는 나이가 들어가며 이웃과 인사하고 주변 화가와 함께 작업하며 삶의 안정을 찾는다. 70대가 되어 세상을 떠나는 도메니코스는 음악과 함께 지나온 삶을 회상하는 것으로 도메니코스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하지만 책 속에서 도메니코스는 레콩도에게 현재의 체험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두 번째 방법이 나타나는데, 서로의 예술로 소통하는 것이다.


 

미 아모르 도메니코스, 보는 사람을 경탄하게 하는 기술이라는 것이 따로 있나요? (34)

 


소개에 따르면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일명 엘 그레코는 16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541년 그리스 크레타섬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났다. 당시 크레타섬은 베네치아공화국 지배하에 있었다. 크레타에서 비잔틴 정교 전통에 따르는 이콘화 화가로 일했던 도미니코스는 스물다섯 살 무렵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베네치아로 떠난다.


지역으로는 그리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스타일로는 그리스식과 라틴식. 이러한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로서 엘 그레코는 ‘자신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스페인의 공통어를 구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의 내밀한 언어로 간주하는 것’으로 타인과 소통했다. 그에게는 ‘외국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난해한 언어, 즉 그의 그림’이 중요했다(22).


엘 그레코의 그림은 그만이 가진 언어다. 엘 그레코의 행적을 뒤쫓으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체험하고자 했던 레콩도는 엘 그레코의 작품 앞에서 그에게 말을 건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며 엘 그레코의 삶을 떠올리기도 한다. 엘 그레코가 전하는 이야기가 끝나자 레콩도는 바이올린을 들어 음악을 연주한다. 레콩도의 언어로 그에게 말을 거는 셈이다. 일방향적이었던 대화가 쌍방향 소통으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그리고 세 번째 방법은 두 사람이 춤을 추는 것이다. 춤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상상에 불과할 것이기도 하고, 레콩도만의 경험이기도 하다. 다만 작가가 피부가 맞닿은 것만큼의 밀접한 소통을 느꼈다는 점에서 이를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도메니코스, 당신을 보러 내가 톨레도에 온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다른 길들을 모색하는 것이에요. 나의 아버지를 마주하는 것,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 내가 그 수첩을 발견한 순간을 회상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서랍 깊숙한 곳에 수첩이 있었어요. 잊힌 수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140)
 


레콩도에게 도메니코스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고 돌아가게 되는 무언가다. 재구성된 이야기 속 엘 그레코가 종종 크레타를 떠올리는 것처럼 레콩도에게 도메니코스에 대한 기억은 떠나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다. 그리움을 촉발하는 대상과 춤을 춘다는 것은 그리움 그 자체를 마주한 것과 같다. 양식과 사조와 같은 것을 초월한 예술가인 엘그레코를 만나 레콩도는 과거의 자신, 과거의 아버지와 마주할 수 있었다. 시간을 초월한 만남이 하나 더 만들어진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대화는 오래된 이야기를 읽는 데에서 가장 많이 나타날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장소, 지나간 건물, 미술관의 그림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오래전 그곳에 잠시 들렀던 누군가와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조금 더 상상해본다면 레콩도와 엘 그레코처럼 우리도 과거의 누군가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승희_네임태그_컬쳐리스트.jpg

 

 

[이승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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