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있지만 없었던' 노동자의 이름을 부르다 [미술/전시]

SeMA 벙커 기획전시 ≪있지만 없었던 Naming the Nameless≫
글 입력 2021.05.2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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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강제노역으로 동원하였던 전범 기업 미쓰비시는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이 없을 뿐더러, 2018년에는 징용 피해자와 유족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았음에도 위자료 지급을 미뤘다.

 

2019년 피해자들이 한국 내의 상표권, 특허권을 압류하도록 소송을 내고 매각 명령을 신청했으나 미쓰비시중공업은 자산 압류를 풀어 달라며 한국 법원에 항고했다. 이제는 일본 학계에서도 미쓰비시 측이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나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역사책에서 보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은 아주 먼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문제다.

 

SeMA 벙커에서 4월 30일부터 6월 6일까지 열리는 전시 ≪있지만 없었던 Naming the Nameless≫는 강제동원과 노동에 대한 전시다. 강제동원이란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권력에 의해 실시한 인적·물적 자원에 대한 동원정책’을 뜻한다. 강제동원은 1938년 ‘국방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인적’ 및 ‘물적 자원’을 ‘통제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는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강제동원 피해 지역은 한반도 전역을 비롯하여 일본, 러시아, 중국,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 등으로 다양하며 국가총동원법과 관련 법령에 의한 노무동원, 군인동원, 군속동원, 여성동원이 실시되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서 공개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노동자들은 개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닌 강제적인 방식으로 동원된 경우가 많았고 장시간 노동과 폭행, 임금체불 등 근무환경이 열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있지만 없었던≫은 강제노동자의 삶을 증언하고, 그들의 삶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왜 기억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전시다. 전시는 강제노동자들의 삶이 담긴 아카이브 자료와 조덕현, 최원준, 정재훈, 김영글, 차재민, 오민수, 김소영, 안해룡 작가의 작업으로 구성된다. 윤병렬 컬렉션과 정혜경 아카이브를 통해 강제노동자들의 생활이 담긴 사진과 자료, 구술채록 아카이브를 보여주며 8명의 작가의 작업을 통해 전시의 주제를 현대의 노동, 노동자라는 존재 자체로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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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준, <전선식 아카이브 중 집으로 보낸 편지_1977-1982>, <얼굴의 역사> 설치 전경

 

 

‘조선땅의 우리집은 저녁밥을 먹건만은 나는어찌 일을가나 삽을 잡고 생각하니 / 이때쯤에 우리집은 잠을 같이 자건만은 여기나의 이내몸은 수만길 땅속에서 / 주야간을 모르고서 이와같이 고생하고 남모르게 나는 눈물 억수많이 울었다오’

 

1942년 미쓰비시광업 오유바리 광업소로 동원되었던 강삼술이 작성한 ‘북해도고략가’의 일부다. 가족을 떠나 타지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최원준의 <전선식 아카이브 중 집으로 보낸 편지들_1977-1982>에서도 집을 떠난 노동자의 심정이 드러난다. 작가는 1970-80년대의 중동 파견 근로자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경제 성장’, ‘중동 붐’이라는 말 뒤에 가려져 있는 노동자의 개인적인 삶을 조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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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준, <얼굴의 역사>, 2019/2021, 디지털 C-프린트, 라이트 박스, 아카이브 설치, 가변설치, 김문환, 전선식, 조춘만, 최성열 자료제공

 

 

<전선식 아카이브>는 전 대림건설 토목담당으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 근무했던 전선식이 집으로 보낸 수십 통의 편지를 보여준다. 수신인과 발신인이 전부 같은 수십 통의 편지는 기적처럼 일어난 듯이 여겨지는 경제 성장의 뒤에 더디게 흐르는 노동자의 시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선식 아카이브와 나란히 전시된 <얼굴의 역사>는 견고한 건축물 이미지 위에 파견근로자의 얼굴을 덧입히며 관객에게 노동자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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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렬 컬렉션> 중 징용고지서, 수당급여통지서

 

 

전시실 한쪽에서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제공한 윤병렬 컬렉션을 볼 수 있다. 1942년, 하루 3원의 임금을 준다는 말에 모집에 응한 윤병렬은 홋카이도 가모이탄광으로 동원되었다.

 

해방 이후 윤병렬은 가모이탄광에서 일하면서 사용했던 담배갑, 편지 봉투, 영수증 등을 모두 가지고 돌아왔고 이를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기증했다. 전시에서는 그에게 교부된 징용고지서와 수당급여통지서, 사용했던 여행용 트렁크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지폐 등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물품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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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현, <언더그라운드 엘레지 2>, 2021, 사운드, 디지털 액자, 흙, 혼합매체, 가변설치

 

 

벙커 복도와 계단에 설치된 조덕현의 <언더그라운드 엘레지>는 <아주까리 등불>을 노래한 가수 최병호의 삶을 설치 작업으로 풀어낸다. 작가는 친구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과정에서 한번 마주쳤던 친구의 아버지 최병호가 일제 강점기에 고쿠라 탄광으로 끌려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최병호는 1941년에 히트곡 <아주까리 등불>을 발매한 유명 가수였음에도 이후 징용대상자로 소집되어 일본 규수 지방의 고쿠라 탄광으로 동원되었다. 그곳에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최병호는 일부러 미치광이 짓을 계속해서 풀려났다고 한다.

 

작가가 어린 시절 마주친, 이미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은 뒤였을 최병호의 모습은 전시장에서 들려오는 <아주까리 등불>로 재현된다. 그와 동시에 계단에 흙과 함께 설치된 디지털 액자에서는 중국 항일 영화 <대로>의 장면이 상연되고, 영화의 주제곡인 <개로선봉>이 들려온다. 영화 속의 강인해 보이는 노동자들의 모습과 최병호의 구슬픈 노래가 대조되며 시대의 흐름에 순응해야 했던 개인의 슬픔을 드러낸다.

 

작가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노동자를 기록하고 기억한다. 물류센터에서 일어나는 노동자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오민수의 <제자리 구르기>, 용역 노동자가 케이블을 설치하는 손동작과 케이블을 들고 좁은 골목을 누비는 모습을 보여주는 차재민의 <미궁과 크로마키>, 한국에 이민해 식당을 운영 중인 고려인 2세 김 알렉스의 삶을 담은 김소영의 다큐멘터리 <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 타슈켄트> 등의 작업을 통해 전시는 강제동원이라는 역사적 주제를 노동과 노동자라는 포괄적인 범위로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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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고노마이광산의 조선인 노동자들

 

 

강제노동자들의 단체 사진을 보여주며 시작한 전시는 그들의 증명사진과 이름을 하나하나, 또렷하게 보여주며 끝난다. ‘Naming the Nameless’, 이름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다는 전시의 영제가 말해주듯 이 전시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따라서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피해자들의 존재를 가시화한다.

 

전시에 참여한 8명의 작가는 타지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 노동자로 살면서 존엄성을 지키는 것, 그러다 자연스레 잊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영글의 <해마 찾기>는 ‘하지만 그런 건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이 장면이 끝나면 어차피 우리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있지만 없었던≫은 그렇게 잊힐 수도 있었던 수많은 이름을 기록하고 기억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참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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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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