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 당신의 위로 [영화]

글 입력 2021.05.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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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기타 레슨을 받다가 이야기를 들었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음악을 하겠다고 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면서. 오랜 시간 레슨을 하다 보면 묘하게 정말 음악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지, 혹은 깊은 고민 없이 단박에 음악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약간은 구분이 간다고 했다. 그 둘 사이 어디에도 없는 사람으로 신기한 이야기였다. 갈증이 있는 경우는 재능이나 꿈을 펼치지 못해서일 테고,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관심이 생겨서 음악을 하려는 사람 역시 지금이 모든 것의 시작일 수도 있다. 이상하게도 배울수록 음악은 나와는 더 멀게 느껴졌다. 여전히 즐겁고 재밌지만 괴롭기도 하다. 음악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은 무척 많고, 나는 그 어디에도 들어맞는 느낌은 아니어서일 것이다.


유명한 한 마디처럼 누군가 내게 '가수가 되고 싶어?'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바로 '잘 모르겠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상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고민을 해봤을 법한 질문, 예를 들어 '잘 살고 싶어?' 혹은 '사랑이 하고 싶어?'라는 말에도 이상하게 '잘 모르겠다'라는 비슷한 답을 해버릴 것 같다. 잘 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고, 사랑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닐 텐데. 마음먹는다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반드시 원하는 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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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삶도, 사랑도 다르지 않다. 영화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은 있을 법한 이야기라서 좋았다. 동네 약국을 운영하는 남자 인구와 동대문에서 옷을 파는 여자 혜란이라서. 인구는 아픈 형이 있어서, 혜란이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놓은 빚 5억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힘들다. 형 때문에 결혼을 생각하던 여자와도 헤어졌고, 혜란은 빚을 갚기 전엔 애초에 결혼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동생이 빚도 지겹고 아이도 생겼겠다 결혼하겠다고 하니 매정하게 애를 지우라고 말했을 정도로. 빈말이었지만 정말 빈말인 것도 아니었다.


2006년에 개봉한 영화를 보니 일종의 성지순례를 온 기분이었다. 사랑도, 결혼도, 아이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우리의 미래를 짐작이라도 하고 영화를 만들 걸까? 아니면 예전부터 우리의 현실은 그랬는데, 영화와 드라마에선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왔던 걸까. 모든 걸 다 가진 재벌과 열정과 희망만 가득 찬 가난한 캔디의 드라마를 너무나 많이 봤다. 하지만 다른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한 가지만은 공통점이 있었다. 사랑에는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


두 사람의 마음이 시의적절하게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도 힘든데, 둘만 좋다고 될 일이 아니다.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지도 않지도 않는다. 알고 싶어서 알게 된 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랬다. 결혼은 특히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니까 가족이 반대해서 어그러지는 경우도 많다. 어쩌면 결혼을 해야겠다 싶을 때쯤 적당한 사람을 만나 살게 되는 경우가 제법 많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떠올린 결혼이 행복한 가족, 결혼식, 신혼여행 같은 솜사탕 같은 그림이었다면, 이제는 결혼이라는 단어는 그리 로맨틱하지도 않고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진다. 갖고 있는 돈과 내가 처한 여건, 결혼으로 새로 생기는 가족과 새로운 역할. 머릿속에 결혼정보회사라도 있는 것처럼 견적이 안 나온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배웠던 것치고는 여기저기서 가치를 매기게 된 건 아닌가. 적당한 사람을 만나서 적당히 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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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김에 원나잇으로 시작된 사이라지만 둘의 반응이 대수롭지 않았다. 멜로드라마 국룰처럼 그날 일은 실수였다는 둥, 없던 일로 하자는 둥, 오늘부터 1일 하자는 둥의 설명이 없었다. 둘은 관계나 사건을 규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건 꼭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면 사랑할 때 무슨 이야기를 하라는 걸까. 말하지 않는 걸 끄집어낼 필요까진 없지만, 민망하고 머쓱하고 쪽팔리는 일,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내 감정이 어떤지 당신에게 이야기하라는 거였다. 말도 안 되게 간단한 답인데 그걸 막상 하려고 들면 두려워져서 다들 도망치는 답이다. 누군가에겐 맨 얼굴, 맨 몸, 신체 반응일 수도, 누군가에겐 말할 수 없는 콤플렉스나 트라우마, 누군가에겐 자신의 주변 환경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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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란에겐 아마 인구는 이상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거의 모든 이상한 부분을 알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싫은 내색이 없다. 정말 그 모든 걸 기꺼이 감당할 누군가가 있을까 싶게 인구는 그랬다. 혜란에게 머쓱할 만한 일도 인구에게 큰일이 아니었다. 잠이 안 온다고 수면제를 달라고 하자 대신 맥주를 주고서 같이 '캔나발'을 불었다. 혜란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인구는 장애인인 형 덕분에 많은 것을 무료 혹은 반값으로 할인받아서 살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동차 극장에서 혜란이 오줌소태로 자주 화장실을 가도 오히려 미리 조심하라고 걱정해 주고 그녀를 기다리는 화장실 앞에서 '달 밝네~'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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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에서 유명 브랜드의 디자인을 베껴서 라벨을 달아 파는 불법행위로 발각되어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갔어도 실망한 기색이 없다. 모르는 남자와 비 오는 날 큰소리를 내면서 싸울 땐 괜히 자기가 나서서 성을 냈다. 아주 멋진 싸움도 아니었고, 그가 인구의 차에 접촉사고를 낸 것도 아니었는데, 핑계김에 자기 차인 척하고 그러고선 이놈 저놈 하면서 실랑이를 해준 것이다. 차는 괜찮냐는 질문에 "그거 제 차 아니에요" 하며 아무렇지 않게 답하던 인구와 순간 스쳐가는 혜란의 표정이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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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에겐 혜란도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형이나 그를 어설프게 동정하지도 않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개기름이 많다는 그에게 피부가 좋겠다고 답해주었다. 그에겐 기름종이를, 형에겐 갖고 싶었던 활주로 테이프를 주었다.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많은 것들을 얘기해 주진 않았지만 미안한 일은 돌려 말하지 않고 두 눈을 보고 미안하다고 말해주었다. 미안한 걸 미안하다고 이야기해 주는 게 얼마나 마음 후련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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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만큼, 영화는 욕망에 대해서도 솔직하다. 인구가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가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그와 자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옷에 걸린 속옷 후크를 보고 방을 나온다. 신기하게도 바로 그날 혜란과 처음 술을 마시고 자게 된다. 모텔 주인이 '저 자식 오늘 바쁘네~'하는 게 묘하게 웃기다. 추가 금액 만 원은 괜히 심통 나서 더 받은 걸 거야. 인구의 심리는 잘 모르겠다. 이별 섹스를 하지 않은 것도 좋지만, 같은 모텔에 그녀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인사불성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 술이 취하긴 했고. 이미 별개의 일이었을 수도 있다.


약국을 정리하는 지인이 인구에게 성매매를 하러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너나 많이 하라며 거절했다. 막상 그는 형의 욕구를 채워주려 성매매를 시도했다. 장애인이더라도 당연히 욕구는 있는 법. 늘 잡지로만 로망을 채우는 형이 안쓰러워 한 결정이지만 막상 형은 실제로 만난 여자에게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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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구가 화가 많이 났던 건 그녀가 이야기하지 않고 그와 거리를 두었을 때였다. 그녀의 추억이 담긴 초등학교에서 '즐거운 나의 집'이 하굣길에도 흘러나오는지 확인하러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얘기하지 않고 무조건 차를 세워달라는 그녀에게 그때 그는 처음으로 화가 났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늘 거리를 두는 모습이 답답했겠지.


혜란과 인구 모두가 이해가 간다. 혜란 입장에서는 어차피 깊어지면 안 되는 사이라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알량해 보일지 몰라도 더 이상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구 입장에서는 무엇이든 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가 없다. 그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가 오히려 그가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려서라는 그 말을. 여러 가지 일도 다 알았는데, 그만한 일 하나 더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가 그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아 서운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인구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서운했고, 때로는 혜란처럼 상처 받을 줄 알면서도 거리를 두었다. 엄청난 모순이면서 어지간한 삽질이다. 누군가의 틈을 알고 싶어서 안달이었으면서 누군가에겐 틈을 잔뜩 막고 벽을 세우고 있다는 게. 하지만 그 누군가와 저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고, 그들에 대한 내 마음이나 반응도 다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 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모순적인 사람인 거라면 그저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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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인내심과 포용력은 상대적이다. 혜란에겐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했지만 인구는 화풀이를 하듯 집에서는 오만가지 화를 냈다. 형 인석이 다시 상태가 안 좋아졌을 땐, 형 때문에 힘들다고 잔뜩 성을 냈다. 아버지의 제삿날, 형이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집을 뛰쳐나가고 어머니는 형을 찾으려 나가다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제 형에겐 인구밖에 없다. 장례식장에선 상주로 할 일이 많아 무거운 표정으로 눈물도 흘리지 못하다가, 마무리를 한 후에야 젊은 시절 어머니와 어린 시절 형이 아버지에게 들려주던 노랫소리에 무너져 버린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2년이나 지나서 아버지한테 수 억의 빚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부모 빚이 자식한테까지 대물림되는 것도 그때 알았고요. 나 그 빚 갚아야 돼요. 근데 인구 씨 만나면서 그걸 깜빡 잊었던 것 같아요. 낚시터에서 나도 잠시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잠시... 여기까지만 하죠 우리."


"제가 예전에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가 있었어요. 결국엔 못 했어요, 형 때문에. 그쪽 집에서 반대가 아주 심했거든요. 살면서 형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그냥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줬으면.. 한동안 그런 생각 안 했었는데 혜란 씨 만나고부터 내가 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이제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형한텐 저밖에 없네요. 혜란 씨나 저나, 이게 참 쉽지가 않네요."

 


그게 영화가 마음 아프고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다. 왜 나에게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원망스럽기도 하겠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때로 눈물을 흘리고, 화도 내고, 술도 마시지만 내가 안고 가야 할 일처럼 받아들이고 만다.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어도 서로 앞에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인구는 늘 형에게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지만 자신의 기분을 털어놓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가 들려준 대답은 형과 산 정상에서 외친 "좋다 씨발!" "씨발 좋다!" 그 한마디에 많은 것이 담겨있다. 마냥 욕만 나오지도 않고, 마냥 좋은 소리도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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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란은 "씨발, 좋다!"는 아쉽게도 못 들었다

 

 

인구는 혜란이 선물해 준 기름종이를 이마에 붙이고 형과 등산한 사진을 그녀에게 보낸다. 혜란은 인구와 함께 코앞까지 왔다가 가지 못했던 초등학교에 들러 아직도 흘러나오는 '즐거운 나의 집'을 녹음해 들려준다. 때로 고통스러워하면서 살고 있는 형이 활주로의 노래를 찾고, 가족과 집 때문에 힘들어하는 혜란이 즐거운 나의 집의 노래를 찾는 건 숨은 소망은 아닌가. 활주로의 노래를 들으면, 즐거운 나의 집을 들으면 이제 혜란과 인구는 서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둘이 서로를 안타깝고 마음 아픈 사람으로 기억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하리만치 고맙고 따뜻한 사람.


혼자이고 싶어 혼자일 수도 있지만, 세상이 혼자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세상이 혼자인 사람에게 씌우는 굴레는 각양각색이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다거나, 무능력하거나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거나, 동정과 연민을 선사하기도 한다. 비정상적이라거나 예외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반면 함께여서 생기는 문제는 숨겨져 있다. 서로에게 말도 안 되는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거나, 한쪽이 전전긍긍하거나, 억지로 이어오는 사이도 있다. 하지만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벌어질 수 있는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일은 선뜻 생각하지 않는다. 이별이 최고의 선물인 사이가 제법 많은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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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인 건 이상하지 않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에 신경 쓰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누군가가 줄 수 있는 위로가 생판 남이었던 누군가 내게 보여줄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잠시 잊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나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어서 누군가 다가올수록, 깊어질수록 덜컥 겁부터 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나의 못나고 부족한 부분을 보고 혹여 비웃거나 핀잔을 주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스스로가 빈털터리 같아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사치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고, 누군가가 나에게 너무 과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치를 부리듯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아낌없이 주고 혹은 꽁꽁 닫혀있던 마음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건 이상하지 않다. 그것이 혜란과 인구가 우리에게 주는 위로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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