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 아무튼, 여름 [도서]

다시, 여름이 온다
글 입력 2021.05.1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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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가.

 

이 질문에 근사한 답변을 내어놓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장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더라도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정도의 구체적인 계획이 있고, 원대한 포부를 품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런 경우, 보통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꿈 혹은 장래희망과 같은 따위의 것들과 직결된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면, 매 순간 상기할 정도로, 자주,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날의 날씨, 그중에서도 햇살이 눈이 부신, 여름이라는 계절이었다. 일반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E로 시작하는 MBTI 유형을 가진 나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얻는 편이다. 낯을 가리긴 하지만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대체로 즐기며, 바깥 활동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계절은 꽤 중요한 요소였다. 봄이면 이곳저곳에서 움튼 새싹들과 인사를 나누러 공원들을 순회했고, 호젓한 시간을 보내는 가을이면 주변 친구들에게 이어폰 한쪽을 빼앗기며 “이런 음악을 들으니까 그렇게 가을을 타지!”라며 질책을 받기도 했다. 추운 날씨는 오히려 포근함을 극대화하여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지만 나는 캄캄한 밤이 빠르게 오는 겨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쓸쓸한 광경을 볼 때면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 들었고, 자의와 상관없이 추위로 인해 집에 갇히는 것이 외출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끔찍하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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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태어나서일까. 그 계절이 주는 활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초입에 이르러서는 대책 없이 들떴고, 해가 갈수록 사악해지는 더위에 “이게 날씨냐”를 연발하다가도 그 특유의 낙관적인 에너지가 느껴질 때면, 갓 돌이 된 아기의 무해 한 눈웃음과 마주한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곧 6월. 다시, 여름이 오고 있다. 지난주에는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어도 지하철을 타니 끈적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왔다. 여름과 불쑥 가까워진 듯한 기분에 아끼는 여름 도서를 꺼냈다. 김신회 작가의 <아무튼, 여름>. 여름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읽음과 동시에 쓰고 싶다는 욕구가 들고 마는 책이다. 이 책을 핑계 삼아 여름에 대한 사랑 고백을 해보고자 한다.

 

 

 

여름에는 여름과 닮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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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여름만 되면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하는 나, 왠지 모르게 근사해 보이는 나, 온갖 고민과 불안 따위는 저 멀리 치워두고 그 계절만큼 반짝이고 생기 넘치는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 왜 그렇게 여름이 좋냐는 질문 앞에서는 늘 대답이 궁해진다. 그렇지만 그냥, 이라고 얼버무리기에 여름은 그렇게 단순하게 넘겨버릴 게 아니어서 그럼 한번 써볼까, 했다. 마치 여름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처럼, 여름이 좋은 이유에 대해 써보는 거다. 나는 너의 이런 점이 좋아. 그래서 좋아. 별로일 때도 있지만 결국은 좋아. 1년 내내 여름만 기다리며 사는 사람으로서 내 여름의 기억과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었다.

 

<아무튼, 여름> 중에서

 

 

여름을 떠올릴 때면, 기억은 그 위에 얇은 막이 하나 겹쳐져서 재생된다. 그 막의 이름은 ‘미화’ 혹은 ‘환상’일 것이다. 그 여름의 기억은 막 샤워가 끝나고 뿌연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 것과도 같다. 히사이시 조의 'Summer'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반복 재생되며, 한풀 꺾인 더위 속에서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락앤락 통에 담긴 네모나게 잘린 수박을 포크로 쿡쿡 찍어 먹는 모습이 떠오른다. 휴가철 끈적한 여름 밤바다에서는 백예린의 'La La La Love Song' 커버곡이, 학창시절은 에프엑스와 디오의 'Goodbye Summer'가 기억을 대신한다.

 

그뿐이랴, 환상 없이도 여름날은 찬란할 수 있다. 여름밤에 반팔 박스 티셔츠에 린넨 바지를 아무거나 주워입고 덜 말린 머리를 머쓱하게 비비면서 동네 친구들과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기울이는 소주잔을 떠올린다. 코끝에는 샴푸 냄새와 함께 덥고 습한 포장마차의 공기가 닿는다. 바스락거리는 얇은 원피스에 맨 살결이 그대로 닿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는 여름을 한껏 만끽하면서도 다급하게, 출발하려는 버스를 타러 타닥타닥 뛰어가던 발소리를 떠올린다. 시원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그 뒷목에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를 떠올리고, 고집스러운 매미 소리와 구멍이 송송 뚫린 여름 니트와 하얀 린넨 셔츠의 감촉을 떠올린다.

 

겨울에는 위의 문장들을 일기장 가득 적어놓고 겨울을 버텼다. 문장으로 적었을 때 와닿는 감정이 큰 편이라서, 그 순간으로 이동하고 싶을 때면 나는 일기장을 애용한다. 여름이 떠오르는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나는 조금 느긋해졌고 한가로워졌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 책에서 위의 모든 문장들을 집약해둔 적절한 표현을 발견했다. 바로 여름이 주는 ‘대책 없이 낙관적인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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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여름의 순간들에는 모두 대책이 없을 정도로 사람을 낙관적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실제로 플로리다처럼 사계절 따뜻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느긋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여름에는 여름과 닮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날씨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실수투성이인 나를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여름의 기운을 받으면 햇살을 받으며 광합성을 하는 식물처럼 기죽지 않고 자라났고, 한껏 신이 나서 활기차게 새로운 목표에 도전했다. 여름이면 살아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를 외치는 만화 주인공처럼 능동적이고 독자적인 삶을 계속해서 꾸려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름은 담대하고, 뜨겁고, 즉흥적이고, 빠르고, 그러면서도 느긋하고 너그럽게 나를 지켜봐 준다. 그래서 좋다. 마냥 아이 같다가도 결국은 어른스러운 계절. 내가 되고 싶은 사람도 여름 같은 사람이다.

 

<아무튼, 여름> 중에서

 

 

무언가를 오래 좋아하면 닮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여름이 좋았다. 여름에는 여름과 닮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여름 같은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책은 일종의 안주다 – 책맥


 

 

혼자 여행할 때는 가방에 늘 책을 한 권씩 넣어 다니면서 시간에 공백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읽는다. 책 제목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 시간이 준 느낌만큼은 선명하다. 존재만으로도 안정감을 주는 누군가가 내 옆에 딱 붙어 있는 느낌. - <아무튼, 여름> 중에서

 

문고본은 여행의 필수품이다. 특히 나는 대체로 혼자 여행을 떠나 시간이 넘친다. 그러니 가져간 책은 마치 함께 여행하는 친구 같은 존재다. 그 책이 나에게(혹은 여행하는 장소에) 맞지 않으면 약간 비참한 기분이 든다. 방대한 시간, 나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불안과 고독이 뒤섞인 기분을 계속 질질 끌고 가게 된다. - 가쿠타 미쓰요, <보통의 책읽기> 중에서

 


‘책이 읽고 싶어지는 책’이었다. 이 책은. 여름날의 환상을 자극하는 것만큼, 책을 읽다 보면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함께 맥주 가게의 야외 테라스에서 홀로 책을 읽고 싶어진다. 그래서 작년에 이 책을 만나고 나도 자주 책맥을 했다. 책맥은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을 뜻한다.

 

책맥이라니, 지금이야 한 TV 프로그램에 연희동의 심야서점 '책바'가 소개되는 등 책을 읽으며 술을 마시는 공간들이 몇몇 생겨났기에 그 단어가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책을 접한 그때는 단어마저 생소했다. 술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혼자서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은 좋지만 홀로 술을 마시면 깊은 곳으로 한없이 침잠한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다니? 심지어 집이 아니고 술집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책을 본다니. 아주 생소했고 역시나 도전정신이 넘치는 여름의 나는 그 분위기를 느끼고자 장소를 물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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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합정동에서 전시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늦은 저녁에는 약속이 있었고 마침 두 시간 정도가 비어있었다. 그날은 유독 더위가 난폭했고 나는 시원한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마침 그늘진 테라스가 있는 펍 앤 카페, 술과 커피 등의 음료를 함께 팔고 있는 공간을 발견했고, 이런 때를 노린 듯이 가방에는 여름의 기운이 담긴 가벼운 에세이가 담겨 있었다.

 

좁은 술집에는 사장님의 친구로 보이는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테라스 한구석에 자리 잡고는 IPA 맥주를 주문했다. <아무튼, 여름>의 김신회 작가를 따라 나도 순식간에 반을 마셨고, 시원하게 목을 축인 뒤에 달아오른 얼굴로 천천히 책을 넘기며 남은 술을 마셨다. 그늘진 테라스 바깥에는 담장의 덩굴장미와 매미 소리, 후끈하고 습한 여름의 열기가 한창이었다.

 

간과한 것이 한가지 있었다. 저자와 주량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급하게 마신 탓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페이지에서만 시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같은 문장만을 반복해서 읽었지만 놀랍게도 어떤 내용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약속을 가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흐려지는 눈을 부릅떴다. 지금 떠올려봐도 무슨 책을 읽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과 같은 느낌. 그 느낌만은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맞다. 책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유난히 내성적인 덕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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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감성 에세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나 혼자서도 자주 감상에 빠지는 사람으로서, 이 한 몸 건사하기가 일생일대의 과제인 사람으로서 감성 에세이는 원치도 않은 감정의 홍수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글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힘들면 오늘은 집에서 푹 쉬세요.’ 식의 당연한 이야기만 하는 글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아무튼’ 시리즈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튼’ 시리즈란 작가 개개인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어떤 한 가지를 그들만의 문장으로 담아낸 에세이 시리즈다. 그건 계절이 될 수도, 음식이 될 수도, 사람이 될 수도, 그 기타 등등의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마치 러브레터처럼,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쓰여있는 거다. 나는 너의 이런 점이 좋아. 그래서 좋아. 별로일 때도 있지만 결국은 좋아. 예시로는 《아무튼, 여름》, 《아무튼, 메모》, 《아무튼, 하루키》 등 대상에 관계 없이 다양한 종류의 사랑 고백들이 존재한다.

 

내가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까닭. 그것이 무수히도 많지만, 그 온갖 것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인 수식어를 고르고 골라 적어내고, 아름답게 세공하여 쓴 노력이 드러나는 문장들이 가득해서 참 좋아한다. 누군가의 러브레터를 훔쳐보는 기분은 짜릿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저 그 자신으로 있어 주는 일로 그러한 사랑에 보답하는 대상. 사실 쉬운 일도 아니고 당연한 것도 아닌데, 그것이 응당 해야 할 일인 것 마냥, 그 자리에 사라지지 않고 존재함으로써 몇 인분의 몫을 해내는 것들을 보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아무튼’의 사전적 정의는 ‘의견이나 일의 성질, 형편, 상태 따위가 어떻게 되어있든’이다. 그러니까 이 시리즈는 어찌 되든 마르지 않는 애정이 담긴 대상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런 대상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

 

저자는 ‘아무튼’ 시리즈를 내성적인 덕후들의 목소리라고 명명한다. 얼마나 내성적이면 혼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곱씹고, 글 쓰고 책까지 내냐면서. 이 시리즈를 4-5권 정도 읽었을 뿐이지만, 내성적인 덕후들의 견고한 세계를 엿보면서 나의 ‘아무튼’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도 던져볼 수 있었다.

 

훗날 여름에 헌사 하는 여름 책을 내고 싶은 만큼 여름에 진심인 나였지만, 이미 김신회 작가가 근사한 솜씨로 선수를 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여름에 대한 진심을 담기에 내 생은 아직 짧았던 게 아닌가 싶다.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나를 알아가며, 언젠가 나의 ‘아무튼’을 발견하게 될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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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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