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수트가 권하는 애티튜드 - 사토리얼리스트 맨

글 입력 2021.05.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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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내 꿈이 패션 디자이너였던 적이 있다. 무려 6년 동안 그랬다. 초등학생 때 일이었다. 미술을 좋아하고 소질이 있다 여겼을 무렵, 어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미술 관련 직업은 딱 세 개였다. 미술 선생님, 화가, 패션 디자이너. 개중에 패션 디자이너를 선택한 것은 그때의 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폼 나는 직업이라 그랬던 것 같다.


머리가 크고 미술에 대한 이해와 시각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레 앞에 붙던 ‘패션’이라는 분야는 사라졌다. 어릴 적 꿈을 계속 키워가기엔 옷에 대한 내 애정이 부족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패션은 언제나 내 동심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패션의 세계는 환상을 준다. 그래서일까, 나는 패션에 대한 관심도 미미하고, 남성의류는 더욱더 먼 나라 이야기임에도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에 끌렸다.

 

 

”남자들은 변했다. 여자들도 변했다. 성별에 따른 역할과 규범은 과거의 것이 됐다.”

 

 

책을 여는 순간 우리는 전환점을 한참 지난 후 정의된 젠더 프리의 세계와 마주한다. 제목부터 쓰인 남성의 옷이 곧 남자다운, 남자들만 입는, 남자들의 전유물 따위의 수식어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는 책을 처음 받았을 때, 표지에 그려진 슈트 차림의 누군가를 보며 내가 이걸 봐도 되나 했던 잠깐의 우려가 있었는데, 조금은 안심해도 되겠다 싶었다.

 

 

 

스프레차투라!


 

이 책은 슈트를 중심으로 그 안의 요소들과 부가적인 액세서리들의 명칭, 특징, 매칭 방식을 소개한다. 즉, 아주 잘 갖추어진, 꾸밈과 정돈이 의도된 옷을 위한 책이다. 책에 서술되어 있듯, 정장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라는 발언을 옷으로 만든 느낌이다.

 

책에서 볼 수 있듯이 잘 맞춘 슈트 하나에는 정말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재킷 하나, 셔츠 하나 어느 하나 뭉텅이로 퉁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재킷만 해도 그렇다. 스타일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르고, 재킷의 어깨, 허리, 주머니도 모양마다 이름이 붙는다. 소매길이, 재킷 총장의 길이, 단추의 배치, 그 속에 입을 타이나 셔츠 등 재킷 하나만 해도 신경 쓴다면 생각할 것들이 수두룩한 것이 정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놓고 뽐내기를 위한 옷인 정장을 무심함과 서투름으로 포장하려 하는 ‘스프레차투라’는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약간 헤롱헤롱한’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인 스프레차투라는 묘하게 어긋난 패션 어법들로 자신이 패션에 들인 공을 숨기기 위한 기술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비슷한 말로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학창 시절 밤새 시험공부를 해놓고 다음 날 공부 안 했다며 발뺌하거나 대단한 노력과 얻은 성취를 낮추며 너스레를 떠는 것은 국가를 막론하고 다들 그런가 싶어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남성 패션의 뮤즈, 제복!



구김 하나 없이 쫙 펴진 채 날카롭고 정갈한 각을 자랑하는 제복, 작가는 그것에 도전하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제복은 흔히 알고 있는 특정 직업군, 혹은 응집성과 통일성을 위한 유니폼보다는 이를 자신 혼자에게만 적용한 특별한 복장을 뜻한다.


책에서는 이 추상적인 이야기를 한 남자로  설명한다. 노보루 카쿠타는 항상 파란색, 흰색, 회색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갈색으로 포인트를 준 옷을 입는다. 작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그가 다른 색깔 옷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가 환상적이지 않은 차림을 한 모습을 본 적 없다.”



그의 사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그의 패션은 그렇게 대단할 것이 없다. 작가가 칭한 환상적이라는 수식어는 그가 입은 옷이 혁신적이고 시대를 앞서나갔다던가, 참신하고 파격적인 옷도 완벽히 소화하는 마네킹 같은 남자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본인만의 스타일 규칙과 언어를 만들어내고, 이를 엄격하고 일정하게 지켜나가는 그의 주관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 자신의 강점을 내세울 수 있는 것들을 고찰한 그의 노력들이 옷으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수트가 권하는 애티튜드



작가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신사를 아나 지메노 브루가다라고 답했다. 사실 그 인물에 대해 잘 몰라 찾아보니 패션 스타일리스트이자 컨설턴트라고 한다. 남성 의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에서 최고의 신사로 한 여성을 소개했다. 함께 실린 사진들은 치마가 아닌 바지를, 원피스가 아닌 정장을 입은 아나를 선보인다.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아나의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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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류, 남성의류 사이에 쳐진 부실한 경계선을 걷어내고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속한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건너편의 것들이 있다. 작가는 그 건너편으로 넘어가 뭐든 얻어내라 말한다.


이는 단지 패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래된 사회가 규정하고 세워놓은 낡은 벽들은 시간이 흘러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 우리는 늘 그 벽의 존재가 나쁜 것을 막아주고 우릴 지켜주는 고마운 성벽이라 여겼지만 사실은 더 큰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가둔 감옥의 창살인 경우도 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웠던 지점은 책에 수록된 많은 남성들 중 노인들의 사진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 많은 어른들의 이야기에 젊은이들은 귀 기울이지 않지만, 몇십 년의 세월을 견디며 적립해온 연륜은 패션을 이끄는 신세대보다도 앞선 걸음으로 자신의 멋을 찾을 줄 안다.


이처럼 책은 남성 의류, 그중에서도 슈트를 중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나 성별과 나이, 관습을 벗어난 자신만의 철학, 태도의 중요성을 잊을 때마다 상기시킨다. 결국 옷차림이라는 보임의 근본이 되어줄 자아를 찾을 것. 이것이 이 책이 전해주려는 정보와 동떨어져 있던 내가 얻은 아주 감사한 꿀팁이다.



[오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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