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두만강'이라는 경계, 그리고 소통 [영화]

영화 '두만강'
글 입력 2021.05.1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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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경계를 마주하는 방법


 

영화 <두만강>은 두만강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사이에 둔 탈북민과 조선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이들이 서로에게 가진, 나아가 우리가 이들에게 가진 심리적 경계를 포착하게 한다. 물리적인 동시에 심리적인 ‘경계’로 나눠진 소속 안팎에서 그들은, 우리는 구분된 서로를 어떻게 마주 할 수 있을까.

 

 

 

경계를 넘는 법1


 

두만강2.jpeg

 

 

영화 속, 두만강 변의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두만강은 별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이들은 강을 넘나들었다. 생사를 바쳐 오가면서도 그 경계는 아주 보통의 것이 되었다. 얼어붙은 강 위의 시체를 치우는 일, 또는 아이들이 죽는시늉을 놀이처럼 하는 일은 그들의 일상 중 하루일 뿐이다.

 

물리적 경계를 넘어 펼쳐진 새로운 세상에서, 경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비록 그곳을 넘다가 죽을지라도 무서운 일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탈북민’과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구분 지은 공간의 경계는 생각만큼 거창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에게 두만강은 경계이기도 했지만 넘을 수 있기에 통로이기도 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그토록 흐릿하고, 두만강은 이를 뚜렷이 할 경계이자 소통의 상징이다.

 

 

 

경계를 넘는 법 2


 

두만강1.jpeg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언어'가 민족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고 공동체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탈북민과 조선족은 언어로 소통이 가능하다. 언어는 이들의 심리적인 경계를 허문다. 영화의 인물들은 ‘강 건너 사람들’, ‘저쪽 사람들’이라 부르고 불린다. 이는 이들이 강을 기준으로 주거 공간을 나누고 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로 대립하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언어는 이들의 관계 속에서 타자성을 찾지 못하도록 한다. 나고 자란 곳을 물길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여 서로가 서로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영화의 큰 줄기를 이끌어가는 조선족 창호와 북에 사는 정진의 우정을 보면, 교류와 관계에 아무런 문제도 차별도 없다. 둘의 관계는 정말 평등하다. 친구니까. 그들의 약속은 명령이나 이행이 아닌 자신의 의지와 의리이며, 밥을 얻어먹고 도움을 받는 것도 둘 사이의 어떤 지배력이 작용해서가 아니라 우정에서 비롯된 호의였다.

 

 

 

경계, 순희


 

그러나 평화롭던 마을을 영화는 평화로이 두지 않는다. 불미스러운 사건들의 잦은 발생으로, 마을은 혼란에 휩싸인다. 혼란을 짊어질 누군가가 필요했고, 공간의 다름이 지목의 기준이 된다.

 

‘강 저쪽 사람들’이라는 이름은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교체되고, 정부의 개입과 함께 본격적인 구분 짓기 작업이 시작된다. 구조의 개입이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 낸다. 선악, 상하 같은 위계가 구조적인 경계가 되어 고개를 든다.

 

 

두만강3.jpeg

 

 

영화는 이 구조적 경계를 넘기 위해 순희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 앞서 언급한 소통의 역할을 한 언어는 순희에게는 경계다. 그런데 오히려 그 경계는 순희 앞에서 무용(無用)해진다. 그가 언어와 불통하므로 특정 프레임이나 경계의 적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언어로 소통하는 이들은 권력의 개입이라는 경계의 생성을 막지 못하지만, 순희에겐 언어적인 것들은 의미가 없었다.

 

순희는 탈북민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지만, 여전히 탈북민에게 친절하다. 오해의 여지가 있어 덧붙이자면, 그를 향한 부정적 감정이 탈북민이라는 집단 전체로 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순희가 그들 모두를 탈북자라는 프레임에 넣어 타자화하는 것이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경계를 무력화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순희는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한다. 말하지 못하므로 경계를 무력화한다던 순희의 소통의 한계는 어쩌면 다른 형태의 경계이기도 하다. 경계는 그 존재를 알아야만 넘을 수 있기 때문에 경계에 들어서는 것이 소통의 시작이라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막바지에 등장하는 순희의 “창호야”는 소통이자 경계의 인정을 뜻한다.

 

 

 

다시, 경계를 마주하는 방법


 

<두만강>은 나 아닌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개입하는 여러 요소를 ‘두만강’이라는 상징으로 풀어냈다.

 

영화의 두만강은 경계가 될 수도 소통이 될 수도 있는, 삶을 주기도 하고 죽음으로 인도하기도 하는, 경계이자 소통이었다. 삶과 죽음이 평행선 같지만 사실 닿아 있듯, 경계와 소통 역시 아주 멀지만 아주 가까이 있었다. 이곳의 조선족과 탈북민처럼.

 

경계를 인식할수록 한없이 배타적일 수도 있고, 경계를 인식할수록 소통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경계의 역할이 배척이나 소통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결국 경계 건너 무엇의 ‘다름’을 찾는 대신 그곳에도 당연히 있을 나 같은 ‘사람’을 찾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 믿는다.

 

‘나와 당신’을 갈라놓은 수많은 선이, 경계를 위한 경계가 아닌 통로이자 다리가 되어 ‘우리’로 연결하기 위한 선이기를 바라므로.

 

 

[송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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