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초월성의 순간,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와 블라지미르의 성모자 [문화 전반]

초월성의 예술을 인문학적으로 탐구하다.
글 입력 2021.05.06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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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성의 아름다움이 인간을 어떻게 안심시키고 동시에 전율하게 하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초월성은 왜 인간에게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낼까? 이는 인간은 한계 앞에서 절망을 느끼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초월성의 아름다움이 예술 안에 담겨있다면, 우리는 그 작품 앞에서 커다란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 순간만큼은 초월의 존재 앞에 고개 숙인 미물이라는 무상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 초월의 감각을 경외하는 황홀경 속의 일원이 되었다는 고양감이 들기도 한다. 나아가 그 초월의 순간조차도 인간의 창작과 수용을 통해 창출되었다는 점까지도 인상적이다. 예술과 인문학의 관계가 긴밀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이러한 초월의 순간을 느끼게 하는 예술 작품을 직접 살펴 보며 논의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치졸함에 마모되는 마음이 지칠 때에 찾게 되는 영상이 있는데,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의 엔딩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는 조르주 돈이 라벨의 볼레로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 장면은 1981년 파리의 트레카데오 광장에서 유니세프의 자선 행사에 영화 속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전쟁과 삶의 엉킨 단면들을 쫓아나가다 엔딩의 무상한 폭발감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20세기의 격동을 견디며 생을 축조한 인물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관계의 연결감과 무뎌져가는 상처의 감각을 인정하게 하는 수단으로 음악과 무용이 이용된 것이다. 엔딩 장면을 처음 보는 이들은 무심한 아름다움에서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무심함에 위로를 얻게 되기도 한다.

 

 

 

 

조르주 돈의 안무는 모리스 베자르의 창작무용으로, 발표 당시에는 선정적이라고 평가되었다고 하나 21세기 우리의 관점 하에서는 오히려 세련되고 익숙한 몸짓들로 구성되어 있다. 무용의 음악으로 쓰인 라벨의 ‘볼레로’는 미니멀한 반복 속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이는 인생의 중요하고 당연한 사실과 맥을 같이하는 특성으로 엔딩 장면을 이룬다. 인생은 반복이며 파도의 고저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말이다. 죠르주 돈의 몸짓 역시도 붉은색 테이블 속에서 반복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움직임들로 구성되어 있는 춤 속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지고 세심한 사랑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또한 인생을 위한 메타포일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나도 차분한 표정으로 춤을 추는 죠르주 돈의 얼굴이 클로즈업 될 때에 오히려 극적인 감정이 요동친다. 무엇보다도 미니멀하고 무심한 노래와 춤, 표정들에서 가장 극적으로 생동하는 ‘안도’라는 감정이 꽃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압도당하며 스스로 그 속의 본질과 사랑을 전이하고자 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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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보다도 생활이 더욱 극적이던 격동의 생을 영화는 보여주었다. 그 삶을 캐릭터들과 함께 구른 관객들은 엔딩 장면에서 느껴지는 삼삼한 카타르시스를 즐기게 된다. 생은 무상하나 소중하다. 현실과 발을 조금 띄우고 살고 싶어지는 때에, 죠르주 돈이 무대 위에서도 한 단계 위 테이블 위에서 몸짓을 이어나가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춤을 추는 이도 노래를 부르는 이도 그걸 바라보는 이도 모두 홀린 듯 심취하는 모습 안으로 관객들도 함께 심취의 공기의 누린다. 그렇다면 초월성의 중요한 전제 중 하나가 심취라는 것을 전제해보게 된다. 몰입하여 주변의 많은 것들이 소거되는 감각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거대한 단위로 사유하는 초월성이 미미한 것을 수용하며 무디게 만드는 것과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다.

 

죠르주 돈의 힘찬 몸짓과 서글프면서도 결연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심취의 초월을 공유한다. 생의 상처가 완전히 봉합되는 일의 어려움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전쟁을 거친 20세기의 인물들이, 그 상처를 봉합하는 것에 실패하였다고 해서 여생의 모든 공백이 고통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고 영화는 역설한다. 상처가 무뎌지며 무상해질 때에 오히려 작고 미미한 것을 담담히 쓰다듬을 용기도 생기는 것이다. 혁명적인 몸짓으로 춤을 추는 죠르주 돈의 몸짓은 강렬하지만, 왜인지 저 무심한 아름다움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초월성 안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이다. 영화의 제목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처럼 우리의 생은 회한과 사랑을 담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엔딩의 초월성에서 우리는 오히려 깨닫게 된다. 그 간단하고도 소중한 사실을 말이다.

 

 

 

블라지미르의 성모자 이콘화


 

이어 이러한 무상함에 안심하게 되는 다른 작품이 있다. 유명한 러시아 이콘화 중 하나인, 블라지미르의 성모자 이콘이다. 이 이콘화 속 성모의 얼굴은 마치 예수가 겪게 될 고난을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림 너머를 향해 있다. 그러나 위협이나 원망보다도 초탈에 가까운 얼굴 속에는 옅어진 슬픔만이 보인다. 예수와 볼을 맞댄 포즈에서는 부드러운 애정이 느껴진다. 한 겹의 베일 너머에서 예수와 인간들의 생을 바라보고, 질문하는 듯한 이콘화는 오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면 부드러운 사랑을 기저로 하는 몸짓으로, 이콘화를 바라보는 이들까지도 덤덤한 포근함을 함께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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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화는 우리가 서양화라고 인지하고 있는 르네상스적인 섬세하고 실제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먼 그림이다. 그렇기에 이 이콘화에서 성모의 눈은 리얼한 질감 없고, 따라서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묘연하게 느껴진다. 이 때문에 성모님이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은 결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알고, 보고, 심지어는 이미 다 수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감상을 주게 된다.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의 기원은 초월성에 있다. 경외감의 기본이 공포에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은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존재를 무서워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치명적 특성인 유한함을 극복한 순간들에 함락당한다. 인간은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초월의 존재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된다. 이 이콘화가 바로 그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매력적이고 유명한 이콘화이지만, 비율에 있어서는 의도적이고 시대적인 엉성함이 보인다. 아기 예수가 현실적인 신체 비율로는 절대 불가능하게 팔을 빙 둘러 성모 마리아의 볼에 손을 대고 자신의 어머니를 껴안고 있는 모습에서 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우스워하기 이전에 느껴지는 그러한 접촉의 따뜻하고 서글픈 감정이 전해져온다.

 

이 블라지미르의 성모자 이콘화의 부드러운 강력함은 오래 기억에 남을 감상 경험이 된다. 퉁명스럽고 투박하기까지한 그림임에도 홀린 것처럼 성모 마리아와 눈을 맞추게 되며, 신앙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초월적인 감각에 압도되기도 했다. 결국 예술작품은 그 배경 맥락과 조형성이 어우러지는 총체적인 분위기로 인간에게 다가오며, 그 맥락과 조형성을 조합해낼 수 있는 인문학적인 감각에 따라 아주 간단한 그림에서도 수만 가지의 감각이 팽창할 수 있는 것이다.

 

러시아 여행 중에 이러한 블라지미르의 성모자 이콘과 매우 닮은 이콘화가 마련되어 있는 카잔 성당에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 때가 마침 러시아 정교회의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조용하게 웅성이는 성당 내부에서 사람들은 이콘화에 손을 맞대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다가 나오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황홀경 속에서 압도와 안도를 동시에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곳 성당의 공기에서 충분히 잘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이러한 투박한 귀염성을 가진 이콘화들이 가진 힘들이 사람들이 스스로 경외감을 느끼며 손을 맞대고 기도하게 하는 동력 중 하나라는 점이다. 어긋나고 상처받는 것들 사이에서 더욱 극적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바로 초월성이자 경외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초월성의 감각을 창조해낸다. 일상의 지리멸렬함 이상으로 무섭고 아름다운 순간들은 역으로 일상의 마멸들에게 커다란 위로를 전해준다. 무섭도록 아름답고, 위대하기에 무심한 예술작품들은 인문학적인 본질과도 매우 맞닿아 있지 않은가?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감정의 기반을 이러한 초월성을 특징으로 한 작품을 통해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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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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