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흑백의 삶을 살고 계신가요?

영화 소울이 내게 남기고 간 것
글 입력 2021.05.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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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삶


 

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것저것 끄적이는 것이 좋아졌고 그래서 학교에서 열리는 글쓰기 대회란 대회는 모두 참가했다. 하지만 입상 성적은 늘 그저 그랬다. 가장 잘 받은 것이 동상에 미치는 게 다였다.

 

그래서 남들보다 글을 잘 쓰는 편에 속했지만, 막상 잘 적힌 글 사이에 있는 내 글은 어디선가 읽어봤을 만한, 조금 잘 다듬어진 글에 불과했고 나도 그런 사실은 잘 알았다. 그래서 때때로 서글픈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정말 큰 좌절감은 나를 덮치지 않았다. 글쓰기에 그만큼의 열정은 없었고 그래서 나는 좌절에도 닿지 못했다.


글쓰기 이외에는 흥미도 취미도 딱히 없었다. 밤새워서 게임을 한다는 친구들을 보면 한심한 생각보단 오히려 경외감이 들었다. 저런 마음은 어디서 생겨나는지, 그 열정이 신기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모두 마니아(덕후)라고 하는데 나는 어느 분야에도 그런 기질도 열정도 없었다.


그렇게 십대 전반에 걸쳐 나에게는 어떠한 재능도 열정도 두드러지지도 않았고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극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학교에서 받는 동색의 상장이 전부인 나의 십대는 아주 잔잔하게 지나갔다.


성인이 된 후에는 그나마 좋아하던 글쓰기와도 멀어졌다. 바쁜 대학생활에 글쓰기는 더욱 뒷전이 됐고 모든 것에는 더욱 무던해졌다. 고작 20대인데 벌써 그러냐는 반응이 나올지는 몰라도 정말 그랬다. 모든 것이 조금 시시하게 느껴졌고 타오르는 열정을 가지게 하는 건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점점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느슨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밤새워서 영화나 드라마를 봤다는 사람만 봐도 질투가 났고 모든 것에 늘 보통의 온도만 지니게 되는 내가 어딘가 고장 난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둠 속 등불 없이 헤매는 막막한 느낌은 계속됐고 타오르는 열정이 어디선가 솟아오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때 나는 영화 소울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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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은 영혼의 목적이 아니에요.

 

 

불꽃은 영혼의 목적이 아니란 말과 조이가 지나간 삶을 회상하는 장면, 자전거를 타며 무심코 본 파란 하늘, 옅은 바람과 함께 손에 내려앉은 나뭇잎, 모든 일상, 늘 우리와 함께했던 아주 가까이서 누렸던 그 모든 것, 손만 뻗으면 정말 잡힐 것 같은, 아니 잡을 수 있는 살아 있는 그 모든 것이 짧지만 아주 오랜 시간 영화 속에 펼쳐졌다. 그 장면을 보자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흘렀다. 슬프다는 감정은 뒤늦게 따라왔고 어떤 구체적인 깨달음이 생기기 전에 그 장면이 내게 내려앉았다.


나는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친한 친구들과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을 할 때는 더없이 즐겁다. 때때로 타이밍이 맞아 내가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때는 기분이 한없이 들뜨기도 하고 우연히 알게 된 음악 한 곡에 아주 귀중한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랜만에 깊게 잠든 내 위로 햇살이 내리쬐는 걸 알아채고 눈을 뜬 그 순간에는 정말, 그 순간을 영원으로 연장하고 싶다.


그런 사소한 것에 파묻히는 내가 야망이 없는, 그릇이 작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일까 두려움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반짝이지 않고 작은 미색으로 잊히는 것이 두려웠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떠올렸을 때 그저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남는 게 죽도로 싫었다. 하지만 왜 몰랐을까, 내 인생은 단 한 순간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 아니라 아주 긴 파노라마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상대할 것은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을.


 

 

삶의 매 순간을 즐긴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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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깨달음을 얻은 조는 다시 한 번 지구에서 살아갈 기회를 얻은 후,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글쎄요. 하나는 확실해요. 매 순간을 즐길 거라는 거.”


영화 소울을 본 후 나는 아트인사이트의 에디터에 지원서를 냈다. 밤새워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더라도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때때로 누군가 내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 내가 어딘가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타오를 듯한 열정은 아니라도 나는 그런대로 행복하고 나는 이제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파노라마로 지나가는 내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만 색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순간이 미색일지라도 흑백이 아니길 바란다. 그래서 죽기 전 머나먼 세계로 가는 밝은 빛 앞에 선 나는 영화의 마지막 조이가 그랬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서 있고 싶다. 그리고 그 머나먼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디딜 때 내가 떠올린 가장 행복한 기억은 더없이 일상적이고 따분했으면 좋겠다.


아마 이 글을 다 적은 후 나는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산책을 할 것 같다. 그리고 산책을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오늘의 공기, 도시의 야경, 너무나 살아있는 그 생생한 것들, 그것들을 만질 수만 있다면 손을 뻗을 것이고 깊게 음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오는 길, 갑작스레 깊은 구멍에 빠져 당장 머나먼 세계로 간다고 해도 나의 삶은 전혀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머나먼 세계로 가는 나의 발걸음을 가벼울 것이다. 영화 소울은, 내게 그걸 남기고 갔다.



[신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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