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전을 사랑하세요 [문화 전반]

글 입력 2021.05.0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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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예술 공부를 하고 있는 필자는 '고전'의 중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반추하게 된다. 흔히 '전위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한 시대에 반향을 일으킨 예술 사조나 작품들의 공통점은 '이전의 것의 너머를 상상했다' 에 있다. 예술의 상대적인 특징 때문에 이를 꼭 '발전'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의 존재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명암은 빛을 잡아먹는 어둠, 어둠을 키는 빛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말이다. 피카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피카소는 이미 청소년 기에 기존의 고전 회화를 마스터한 이였다. 그는 이 고전적인 회화를 바탕으로 큐비즘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담장 너머의 세계를 보는 방법은 옛것이 산적한 언덕을 오르는 것이다. 그곳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더 높은 곳을 상상하게 한다. 오늘은 각각 문학과 영화 분야에서, 내가 사랑하는 고전들을 하나씩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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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문학에 대한 기억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와 같이 그 의미가 성장하는 게 고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내 밖의 거시적 세계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게 한 고전이 있다. 이미 너무도 많은 이들의 삶의 이정표가 된 책이지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꼽고 싶다. 처음 <데미안>을 펼쳤을 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당시 나의 공책 한 구석을 채운 것은 가장 유명한, 그러니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구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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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단순히 자신의 내부에 세계를 지니고만 있느냐, 혹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느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는 일이오!’하는 피스토리우스의 말이었다. 그 구절이 내 알에 첫 번째 균열을 그은 문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으로 내 안의 방대한 소우주를 발견한 기분이었고, 그것을 마주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스스로의 선함과 악함, 또한 그 경계의 모순까지도 모두 껴안는 행위이기에 아주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아직까지도 그것들을 모두 껴안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 삶을 데웠던 <데미안>을 떠올리면 다시 시동을 걸게 된다. 또한 위험할 정도의 충격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 1년 후에 원서로 <데미안>을 읽고 싶은 욕심에 다시 책을 펴들었고, 첫 번째 독서와 달리 방황하는 이들에 대한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싱클레어는 자라 누군가의 또 다른 데미안이 될 것이고, 또 다른 싱클레어를 만날 것이다. 인간이라는 업을 지닌 그로서는 알 안에서 수 없는 몸부림 끝에 그를 깨고 비상한 새라도 제 안보다 더욱 큰 바깥 세계에 또 다른 방황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앞세워 인간만이 능히 가질 수 있는 ‘방황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느낀 것은 그때였다.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때론 절망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위로의 의미로 다가왔다. 마음껏 방황하고 그에 따른 고통을 인간답게 마주하라는 메시지가 지금까지도 몸을 길게 덮은 이불처럼 지친 밤에 나를 위로하는 것 같다. 이것이 내게 남아있는 가장 강렬한 고전에 대한 경험이다.

 

 

 

고전 영화에 대한 기억


 

이어서 고전 영화에 대한 기억을 돌아본다. 내 기억 속 가장 처음으로 궤적을 그린 고전 영화는 찰리 채플린의 작품들이었다. 유쾌한 슬랩스틱 코미디로 사회의 일면을 꼬집는 그의 연출적 방식은 어린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표현 방식과 표현 대상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미묘한 뒤틀림은 아직까지도 나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특히 <모던 타임즈>는 영화 자체가 당대 사회에 대한 커다란 은유로 읽혔다. 첫 장면, 즉 화면 가득히 바쁘게 움직이는 소떼와 지하철 출구로 나오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교차편집 한 것부터 이 영화가 ‘읽을’ 가치가 있는 하나의 은유적 텍스트임을 암시한다. 특히 찰리 채플린의 유머가 여전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웃음으로 찌르는 듯한’ 알싸한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분석할만한 가치를 가진 영화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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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주목할 지점은 '무성 영화'라는 특징이다. <모던 타임즈>가 유성 영화 시대에 제작된 무성 영화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무성과 유성 사이에서 다소 서성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해서 이 영화를 온전한 무성영화로 정의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거듭 장면들을 돌이켜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무성 영화로 분류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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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가사를 적어 놓은 소매를 잃어버린 채플린이 엉터리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뜻을 알지 못해도 충분히 웃음 지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찰리 채플린의 지향점이자 그의 영화와 유머만이 지닌 평등함이다. 시대를 역행해 무성 영화를 고집한 이유는 분명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영화에서 음성이라고 할 것은 감시 모니터를 통한 공장장의 명령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정도가 전부이다. 배우가 직접적으로 대사를 말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감독은 라디오나 모니터 등의 매체를 통해서만 음성을 등장시켜 이를 OST와 같은 음향 효과의 일부로 사용한 것이다. 무성 영화는 인물의 움직임을 그대로 음표로 옮긴 것 같은 OST들에 집중함으로써 블록버스트 영화에 눈과 귀가 길들여진 우리에게 색다른 감각 경험을 선사한다. 비극과 희극이 한 데 교차한 <모던 타임즈> 특유의 서사적 분위기를 위해서는 어쩌면 대사보다도 더 대사 같은 역할을 해주는 영화 음악을 쓰는 게 효과적임을 인지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무성 영화를 고집한 감독의 선택이 매우 적절했음을 강조하고 싶다.


두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시대’이다. <모던 타임즈>를 논하며 시대적 배경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만의 독특한 갈등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안타고니스트가 시대 사조 그 자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르게 말하면 주인공은 근대성이나 산업화라는 배경과 지속적으로 갈등하게 되는데, 결국 그에게 승리하는 방식이 가히 채플린답다고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대와의 갈등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즉,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 극중 주인공이 사는 시대, 그리고 여전히 이 사회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움직이고 노동자들을 그 거대 시스템의 일부로서 다소 수동적으로 노동력과 시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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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인간 주체가 사물화, 혹은 대상화 된 사회에서 노동자는 표면적으로는 자본의 명령에 따라, 시계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의 자아가 시대의 잔여물처럼 남아 있다. <모던 타임즈>의 주인공은 그러한 당시 노동자들의 공통된 자아가 극대화된 형태로, 이러한 딜레마를 교묘하게 만져준다.

 

그는 이방인만이 지닐 수 있는 특성으로 사람들에게 웃음과 위로를 건넨다. 이방인이라도 괜찮다는,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냐는 메시지를 특유의 위트로 뭉쳐내는 찰리 채플린의 유머는 인간 존재 따위는 무력해지고 마는 시스템의 절대성마저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매력을 지닌다. 기름칠을 해야만 돌아가는 차가운 톱니바퀴 사이에서, 응고된 사람들의 마음에마저 한 번의 기름칠을 통해 승리를 안겨준 채플린은 가히 위대한 예술가라고 칭할만 하다고 느꼈다.

 

이처럼 고전에 대한 기억은 나를 계속해서 나아가게 한다. 이는 과거를 거름 삼아 미래로 향하는 인생의 편방향적 속성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예술가가 그러하겠지만, 고전의 가치를 그저 역사성에만 둘 수 없는 이유는 현재의 우리를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위대한 고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품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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