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그 애니들 [문화 전반]

글 입력 2021.04.2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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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의 어느 여름날. 때마침 케이블 채널도 나오지 않는 우리 집의 고물 TV가 고장이 나면서, 엄마는 우리 남매의 교육을 위해 이를 고치지 않고 아예 새로 들여놓지도 않겠다는, 일명 ‘TV 없는 가정’의 시작을 선포하셨다. 그렇게 그날부로 우리 집의 무(無) TV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는 이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햇수로 12년 이상 꾸준히 이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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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없는 집의 모습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해서 내가 TV를 전혀 모르는 그저 ‘순수한’ 아이로 자라났을까?

 

우리 집에서 TV가 없어지기 수년 전부터, 필자는 이미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만화 비디오를 빌려보는 재미에 한껏 심취해 있었다. 당시 비디오로 나왔던 작품들은 TV에 방영된 지 몇 년 정도 지난, 즉 내가 태어나기 몇 년 전 또는 내가 말도 잘 못하는 아기였을 때 방영했던 작품들이 많았다. 예컨대 <세일러문>, <웨딩피치>, <디지몬 어드벤처>, <카드캡터 체리> 등의 작품이 바로 그것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어린이가 되기에, 당시의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리고 이 무렵은 2000년대 초반. 바야흐로 어린이 만화채널의 전성기, 황금기였다. 1998년 일본 문화의 본격적인 개방과 수입을 계기로 투니버스, 퀴니 등의 여러 케이블 어린이, 만화 채널이 앞 다투어 개국했던 시기다. 이 중 특히 지금은 CJ ENM 산하에 있는 ‘투니버스’의 활약은 특히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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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 중에서도 주로 저연령층을 주 타겟으로 한 몇 개의 작품들만이 끊임없이 재방송되는 요즘과는 달리, 당시의 투니버스는 주로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많은 애니메이션들을 공격적으로 방영하고 편성했으며, 그렇게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다양한 애니메이션의 길로 이끌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당시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나에게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으며 스마트폰은 커녕 핸드폰으로 인터넷 접속조차 되지 않았던 당시, 나는 나름대로 TV와 애니메이션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투니버스를 포함한 케이블 채널이 나오는 외할머니댁에서 실컷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었다. 엄마 역시 할머니댁에 가는 날만큼은 내가 아무리 많이 TV를 봐도, 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그곳에서 <달빛천사>, <아즈망가 대왕>, <후르츠 바스켓> 등의 또 다른 많은 애니들을 차근차근 접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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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투니버스의 일명 '리즈시절'을 이끌었던 애니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나루토>, <이누야샤>, <환상게임>, 그리고 <디지몬 어드벤처>

 

 

가끔 밤 10시가 넘어도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식구들 몰래 TV를 틀어 투니버스에서 방영해주는 심야 애니메이션을 몰래 보기도 했다. ‘15’라는 마크가 찍혀있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해서는 안 될 것을 하는 것 같은 약간의 죄책감과, 그래서 더더욱 보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이 매번 충돌해 떨리면서도 또 마냥 짜릿했던 날들이었다.

 

*

 

어느덧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나는 이제 그때와 같은 ‘15’ 마크에 그 어떤 죄책감이 들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고, 이제는 그 나이도 한참 지난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도 다시 TV가 생겼다. ‘TV 없는 가정’의 영향을 받는 어린이가, 이제 더 이상 우리 집에는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동시에 영원히 굳건할 것 같았던 TV의 위상도 점차 그 빛을 잃어갔다.

 

투니버스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이 다양한 장르의 애니메이션을 방영하지 않는다. 투니버스와 비슷한 시기 개국했던 애니메이션, 어린이 방송 전문 채널들은 이보다 더 빠른 내리막길의 길을 걸었거나, 심지어 폐국을 맞기도 했다. TV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제시간에 방영해주는 애니메이션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훨씬 많아졌고, TV 말고도 컴퓨터와 노트북, 그리고 태블릿을 통해, 어디서나 인터넷이 터지는 스마트폰을 통해, 그리고 그 외 다양한 기기들 및 플랫폼들을 통해 웬만한 콘텐츠들을 장소와 시간대를 불문하고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서서히 흐려져 가고, 이제 정말 어른으로서의 삶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던 몇 년 전은, 때마침 비디오로 보던 애니메이션들이 서서히 ‘2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를 맞이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 무렵의 어느 날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나는 우연히 오래전, 내가 그토록 열광했던 작품의 20주년 기념 신작 소식을 듣게 되었다.


20년.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이며, 따라서 그 시대 이전의 모든 것들이 잊히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그 애니들은 20년 후, 본격적으로 다시 어른이 된 그 때 그 아이들의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이전과는 다른,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말이다.


 


1. 리메이크, 속편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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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개봉한 디지몬 어드벤처 시리즈 20주년 기념작 극장판 <디지몬 어드벤처 : 라스트 레볼루션>

 

 

상당수의 ‘그 시절 그 애니들’은 약 20년 만의 귀환 방법으로, 역시 가장 클래식하며 그만큼 화제성이 높기도 한 ‘리메이크 방식’을 택했다. 최근 몇 년간만 따져 보아도 이것의 면면은 화려하다. 우선 지난 2014년, 본국인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신드롬적인 인기를 얻었던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가 발매 15주년을 기념하여 속편 제작을 발표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비록 이 시리즈인 총 6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인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는 그 작품성이 예상보다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많은 혹평을 받긴 했지만, 이후 연이어 나온, 디지몬 시리즈의 20주년 기념작인 극장판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그리고 현재도 방영중인 <디지몬 어드벤처 리부트> 등은 앞선 작품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으며 순항 중이다.

 

3년 전인 2018년 초에는 또 다른 대히트작인 애니메이션 <카드캡터 체리>가 역시 20년 만에 속편 발매의 물꼬를 텄다. <카드캡터 체리 : 클리어 카드편>라는 이름으로 방영된 이 작품은 2021년 현재도 일본 현지의 만화 전문잡지 ‘나카요시’를 통해 매주 새로운 에피소드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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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이 아닌 리메이크 제작에 뛰어든 작품도 있다. 지난 2001년 방영되어 역시 큰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의 경우 기존의 작품을 토대로 하되, 작화를 완전히 바꾸고 일부 디테일을 덧붙여 재작년인 2019년 4월부터 방영을 시작했다. 다만 만화의 설정을 상당 수 배제하고 총 화수 26화라는, 팬들로서는 다소 아쉬운 끝맺음을 했던 구(舊) 버전의 작품과는 달리, 리메이크된 작품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모두 포함하여 총 3기, 70화가 넘는 호흡으로 작품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달 초부터는 이 중 마지막 이야기에 해당하는 3기, <후르츠 바스켓 : 더 파이널>이 절찬리에 방영중이다.

 

 


2. '콜라보' 굿즈 판매


 

국내의 다양한 업체와 협력하여 일명 ‘굿즈’를 선보였다는 점 역시 최근의 트렌드다.

 

90년대~2000년대 초반 많은 어린이들, 이 중에서도 특히 여자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장르 중 하나가 바로 ‘마법소녀물’이었던 만큼, 당시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착용하고 나왔던 각종 장신구와 무기들은 어린이용 완구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시간이 흘렀고 이것들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이제는 더 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지만, 이들 브랜드들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해 재빠르게 파고들었다. 다름 아닌 쥬얼리 브랜드들에서 이 장신구 및 무기들을 모티프로 한 상품들, 즉 굿즈를 선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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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국내 쥬얼리, 시계 브랜드인 ‘OST'는 지난 2019년부터 애니메이션 <카드캡터 체리>과 꾸준히 콜라보(협업)를 진행하고 있다. 1차, 2차, 3차 등 각 차수에 걸쳐 다른 디자인의 제품이 공개되고, 일부 제품은 한정수량으로 판매하기도 했던 이 콜라보 행사에서, 일부 인기 제품은 일찌감치 소진이 되기도 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실제 이 키워드로 포털창에 검색을 해보면, 수많은 구매 인증과 후기들이 넘쳐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 게시물들의 작성자들은 대부분이 어렸을 때 자신이 ’카드캡터 체리‘의 애청자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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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보물, '세인트 썸씽포'

 

 

OST와 마찬가지로 쥬얼리와 시계를 판매하는 브랜드인 ‘클루’ 역시 이러한 ‘추억의 애니’ 마케팅에 적극적이다. 클루는 역시 지난 2019년, 1995년 작품인 애니메이션 <웨딩피치>의 주인공들이 신부가 결혼할 때 가지고 있으면 영원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4가지의 물건, 일명 ‘세인트 썸씽포’를 앞세워 다양한 목걸이, 귀걸이, 반지, 팔찌 등의 제품들을 출시했다. 이 콜라보는 특히 애니메이션 속에서 주인공들이 직접 착용했던 장신구들을 그대로 구현해냈다는 데서 주 타겟인 2030 여성들 사이에서 단연 큰 화제를 모았다. 이처럼 성공적인 콜라보레이션을 바탕으로 클루는 이후 또 다른 ‘그 시절 마법소녀 애니’인 <천사소녀 네티>와의 콜라보를 진행하기도 했다.


고백하건대, 필자 역시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억의 애니’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작품들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필자지만, 특히 <웨딩치피>와 <카드캡터 체리>는 그야말로 나의 어린 시절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살까’, 또는 ‘다 사고 싶다’라는 나름의 치열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 얻어낸 나의 전리품들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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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숨겨둔 나의 애장품들

 

 

 

3. 그 때 그 시절, 그 목소리들



일본어로 된 애니메이션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기까지는 번역과 번안의 과정 이후, 성우들의 목소리를 주인공들에게 다시 입히고, 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해주는 주제가 역시 일본어에서, 우리나라 애니송 가수들의 익숙한 목소리로 바꾸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애니메이션의 본고장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성우나 주제가 가수가 연예인만큼의 인지도와 인기를 누리는 일은 전무했다. 그러나 활동 당시에도 그 애니메이션을 보는 연령층에게 연예인 못지않은 인지도가 있었고, 몇 년 전 한 대학 축제에서 해당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부르며 또 한 번 세대 대통합을 이뤄낸 전무후무한 성우가 있다. 바로 애니메이션 <달빛천사>에서 주인공 ‘루나’ 역을 맡았던 성우 겸 가수 이용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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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연말 열린 그의 단독 콘서트 포스터

 

 

2년 전 그가 모 대학 축제에서 <달빛천사>의 첫 번째 엔딩곡인 ‘New Future’을 부르는 영상은 2021년 4월 28일 기준 무려 150만에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이 영상이 화제가 된 이후로 그는 개인 유튜브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으며, 그해 말에는 한국 성우 최초로 단독 콘서트를 개최했고, 이는 오픈 몇 분만에 매진되며 또 한번 그 뜨거운 열기를 입증했다.

 

물론 <달빛천사>의 한국판 앨범 크라우드 펀딩 과정에서 저작권 문제로 인한 잡음이 생기는 등 진행 과정에서 이 프로젝트의 의미가 다소 퇴색되기도 했지만, 국내 방영 후 약 15년 간 당시의 어린이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깔려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밖으로 꺼내어 소환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 현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그가 그 누구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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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대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존재가 부각된 경우도 있다. <기동천사 엔젤릭 레이어>, <파워 디지몬>, <다!다!다!> 등 수많은 당대 애니메이션들의 주제가를 맡아 불렀던 정여진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1년 전, 추억의 가수들을 소환하는 프로그램인 JTBC의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3’에서 애니 주제가 메들리를 불러 화제가 된 바 있으며, 이 영상은 현재 유튜브에서 330만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 역시 현재 유튜브 개인 채널을 개설하여 활발히 활동 중이며, 이미 그 구독자수도 10만이 훌쩍 넘은 상태다. 목소리는 익숙하지만 정작 그들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그들과 소통할 기회도 전혀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 채널에서 그는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그들의 피드백과 요구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 애니메이션이 시작하고 끝날 때만 잠깐 흘러나와 일반적으로 1분에서 1분 30초밖에 들을 수 없었던 주제가들을 3분이 넘는 풀버전으로 재녹음하여 들려주기도 하고, 구독자들의 신청을 받아 다음에 부를 노래를 선정하기도 하며, <디지몬 어드벤처>의 삽입곡 'Power Up'을 부른 바 있는 동생이자 같은 애니송 가수인 튤라(TULA)와의 협업 역시 활발하게 진행하여 오늘도 구독자들의 추억 여행을 책임지고 있다.

 

*

 

이처럼 TV 앞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보던 시절은 어느 새 세월의 저편 너머로 사라졌지만, 그 때의 기억들은 지금도 우리의 삶 곳곳에 자리하며 또 다른 새로운 트렌드, 그리고 문화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기억은 물론 혼자 가지고 있을 때도 그 의미가 있지만, 함께 공유할 때 더욱 강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시절, 우리 모두가 좋아했던 그 애니들에서 비롯된 지금의 이 현상은 그 어느 것보다도 강하고, 독특하며, 또한 강렬한 것이다. 한 세대를 어우르는 이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는 특징 외에, 20년이 넘는 세월을 거슬렀다는 점에서 마침내 그 영속성까지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하나였고

또한 지금도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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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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