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현실적이라서 더욱 아름다운

글 입력 2021.04.24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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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어른이었던 사람들, 그리고 새롭게 어른이라는 영역에 진입한 사람들 모두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고충들을 겪는다. 그리고 그 고통은 중단되지 않는다. 어른인 이상, 그리고 어른으로서 이 사회를 헤쳐 나가는 동안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또한 영원하다. 우리는 모두 아이로 태어나지만, 어른으로 죽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도 동화가 필요하다. <피터팬> 속 아이들만 갈 수 있는 네버랜드와 같은 공간이 어른들에게도 절실하다.


그러나 최근 이와 같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수식어는 이제 서서히 진부함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는 듯하다. 그 이름부터 뭔가 특별하고 근사한, 그야말로 ‘미명’ 아래 너무나 많은 콘텐츠들이 ‘이게 바로 너희들을 위한 작품’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세상에 나왔고, 이러한 어쭙잖은 위로는 도리어 우리를 실망시켰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본디 매우 눈치가 빠르고 변덕 역시 심한지라, 2021년 현재는 이제 이와 같은 이름을 거는 것만으로 더 이상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다. 어른들은 ‘진짜’ 위로가 필요하고, 그 위로가 잠깐의 위안 끝에 남는 찝찝함이지 않길 바라며, 잠깐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다 떠나서 모든 것을 잊고 잠깐 엉엉 울 수 있게끔 만드는 그 무언가가 간절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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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이 작품, <소울>도 애초부터 무언가를 기대하고 본 것은 아니었다.

 

영화관에 잘 가지 않는 나지만, 디즈니 그리고 픽사의 작품이 나올 때면 최소한의 리뷰나 줄거리도 찾아보지 않고 관성적으로 영화관을 찾곤 했기 때문이다. 관람하고 난 후 무언가 켕기는 것이 남아있지 않은 콘텐츠를 선호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현실에서 잠깐이마나 도피할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 항상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는 디즈니, 픽사의 영화들은 한 마디로 항상 ‘평균 이상은 하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소울>과의 만남 역시 그렇게 시작됐다. 그 시작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상영관을 나오는 내 몸, 특히 어깨에는 알 수 없는 힘이 한껏 들어가 있었다. 현실을 잠깐 잊으려고 본 영화인데, 정작 나는 어느새 영화를 보며 내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이 현실은 생각보다 꽤나 긍정적인 것이었다.


*

 

이 세상, 그리고 특히 우리가 사는 여기, 한국에는 정해진 삶의 길이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대학에 진학하고, 1학년부터 재빠르게 진로를 정하고 학점 관리를 한 이후, 치열한 취업 준비 생활을 거쳐 최소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해야 한다. 이후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한두 명 낳고 나면, 또다시 소처럼 일해서 본인의 명의로 된 집 한 채 정도는 장만해야 하며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교육시켜야 한다. 그리고 또다시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우리가 그랬듯이 좋은 짝과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 한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내 실패자, 또는 적어도 ‘특이한 사람’라는 수식어가 붙기 마련이다. 나름의 생각과 주관을 가진 사람에게도 사회의 분위기라는 것은 좀처럼 거역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주변의 온갖 회유와 협박과 걱정으로 가장한 조소의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곧잘 기존의 무모한 꿈들을 버리고 곧 ‘정상의’ 궤도로 돌아오곤 한다. 누구나 으레 가리라고 생각했던 길에서 과감히 벗어나 예상치 못한 성공을 이룬 이들을 우리는 대단하게 바라보지만, ‘저 사람은 조금 특별한 사람일거야’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성공을 일명 ‘될놈될(될 놈은 된다)’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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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조’는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선택을 한 듯 보인다.

 

대단한 집안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안정적인 학교 정규직 음악 선생님의 자리를 포기하고, 수입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막연한 음악 일을 하겠다는, 그의 어머니의 말처럼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을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도전은 주변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을 만한 성공으로 끝난다. 그토록 원하던 라이브 카페에서의 공연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우상으로 생각하던 사람에게서 실력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토록 원했던 목표의 달성,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경험해보지 않았던 것 앞에서 조는 불현 듯 공허함을 느꼈고, 그래서 당황했다.


*

 

가장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대학생이 되면서,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나는 행복의 역치가 점점 작아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오로지 남에게 인정받고, 큰 상을 받고, 시험에서 최상의 성과를 내는 것에만 주목했다면, 요즘은 과제를 내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목표한 것을 적당히, 완벽하지는 않게 이루는 삶에서도 기쁨을 느낀다.

 

더불어 요즘은 이런 거창한 성취에서 오는 것보다,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이 잦아졌다. 고요한 밤 나 혼자만의 방에서 글을 쓰고, CD 플레이어에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음반을 틀어 놓고, 점심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마시는 시간 등이 바로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간들이다. 놀랍게도 예전에는 행복이라고 전혀 느끼지 못했던 사소한 매일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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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퇴근길에 직접 찍은 꽃 사진

 

 

더불어 예전에는 차마 ‘행복’이라는 이 두 글자를 사적인 다이어리에 쓰는 것조차 부끄러워 잘 쓰지 않았던 내가, 매일 새로운 ‘행복’할 거리들을 찾아나가고 있다는 점 역시 큰 변화다. 4월, 교생 실습에 한창인 요즘 찾은 새로운 행복은 학교에서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길 그 자체에 있다. 좀처럼 밖에 나가지 않는 나를, 피곤한 와중에도 저절로 밖으로 이끌게 하는 요즘의 화창한 날씨, 그 아래에서 하는 산책, 그리고 이러한 풍경을 평소 잘 찍지도 않던 사진으로 담는 것도 요즘의 나의 새로운 행복 리스트에 추가된 것들 중 하나다.


이러한 나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당연하게도, 그저 환영의 목소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행복은 아직도 누군가에게는 분명 이와 같은 사소한 것들이 아닌, 무언가 큰 성취를 이루고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후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에 집중했던 나를 보아온 엄마에게도, 분명 이런 변화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테다.

 

엄마는 예전과 달리 꿈이 작아지고 그럼으로써 끝내 평범한 아이가 되어버린 나를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곤 하셨다. 포부가 작아진 나의 모습에 적극적으로 실망감을 표출하셨고, 그럼으로써 아마 내가 원래의 나로 돌아오길 바라셨을 것이다. 고등학생 때의 나는 아직 어렸고, 그래서 엄마가 바랐던 대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이내 조금 더 자란 나는 더 이상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도, 엄마가 바라는 대로 예전의 ‘야망차고 포부 넘치는’ 나로 돌아가지 않았다.

 

*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을 보며 살고 싶다는 의지를 다진 작품 속 ‘22’의 모습은 적어도 나에게는 낭만적인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닌 현실 그 자체였다. 벌써 이십 몇 년째를 살고 있는 나도 이렇게 매일 어제 몰랐던 세상의 새로운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행복해하는데, 이제 막 세상에 발걸음을 디딘 22에게는 모든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아름답게 다가왔을까. 살고자 하는 의지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소한 매일의 일상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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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나아가, 죽음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고 해도 경험하지 못한 자로서의 막연한 공포가 아닌, 예전보다는 조금은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무언가로 다가온다고 한다면 과연 거짓말 같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매 순간 매일의 삶에서 가장 많은 행복을 발견하고 있는 요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죽음에 대해 그만큼 많이 생각한다. 죽음을 무조건 나와 먼 것,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과거는, 그것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자의 무조건적이며 필사적인 방어와도 같은 것이었음을, 이제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아, 그러고 보면 도입부의 말은 바꿔야겠다.

우리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화가 아닌 현실이다. <소울>에 담긴 것과 같은 현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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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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