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나간 인연에 잠 못 이룰 때 - 내게 무해한 사람 [도서]

글 입력 2021.04.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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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온갖 잡념들이 찾아온다. 잠의 공백을 그대로 놔둘 수 없는 유난스러운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과 하는 놀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요즘은 주로 과거의 장면들을 엮어 만든 아주 긴 영화를 시청하는 것이다. 심술궂게도 정지버튼을 숨겨놓은 탓에 한 번 시청을 시작하면 좀처럼 멈출 수 없다. 이렇게 놀고 나면 다음날의 컨디션은 엉망이 되어버린다. 여러 번 겪어본 후유증이 두려워 열심히 문을 걸어 잠그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문을 열어주고 만다.


최근 틀어주는 영화의 제목은 <지나간 인연들>이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사람들, 한때는 자주 연락했지만 이제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온다. 나는 이 영화가 싫다. 영화가 끝나면, 그때 이렇게 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자책과 후회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애매한 사이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소식을 SNS로 전해 들을 때마다, 괜히 아쉬워져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의미 없는 가정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의 단편 “모래로 지은 집”을 읽은 뒤로 감상평이 조금 달라졌다. 냉철하지만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 때문이다. 작가는 관계에 대해 미숙한 모습을 꼬집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관계의 불공평함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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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로 지은 집”은 모래와 나비, 공무라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20대 초반의 이야기이다. 고등학생 때 자신이 누군지 알리지 않은 채 자신만의 닉네임으로 인터넷에 글을 쓰던 모임이 해산을 앞두자,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는 공무의 제안으로 세 사람이 만나게 된다. 이 세 명은 이후에도 모래의 주도로 만남을 이어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각자의 가정환경, 꿈, 사랑 때문에 세 사람의 관계는 처음처럼 원만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모래와 나비의 관계에 마음이 갔다.


모래는 섬세한 감정을 지닌 사람이다. 항상 세 명의 만남을 주도하고, 오랜 기간 타지에서 생활하게 된 나비를 만나러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갈 만큼 다른 이를 위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전혀 티를 내지 않고, 타인의 감정에 예민한 만큼 자신의 감정에도 예민하다. 그만큼 외로움도 많이 타기 때문에 힘들거나 슬펐다고 주저 없이 친구들에게 털어놓고, 전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나비는 이런 모래에게 여러 감정을 지닌다. 모래의 섬세함과 적극적인 주도 덕분에 세 명의 우정이 유지됐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속으로는 모래를 재단한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으면서 어떻게 경제적으로 힘든 나를 이해할 수 있는지, 전 남자친구와 다시 사귀기로 한 것은 자신인데 왜 징징거리는지, 세상에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관계가 멀어지는 게 두려워 애처럼 울고 있는지 등. 섬세하고 다정한 모래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면서도 타인에게 의존하는 나약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런 모습을 철저히 단죄한다.


결국 모래는 나비와 공무를 떠난다. 모래가 남긴 편지를 읽고서야 나비는 모래를 이해하게 된다. 관계에 대한 모래의 성실함, 솔직한 감정을 토로하던 말과 눈물은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왔음을 깨닫는다. 상대방을 재단하며 메마른 사랑을 줬던 자신과 달리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주었던 모래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간다.


 

나는 다그치는 사람,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 오해하고 단죄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 누구보다도 모래에게 마음을 기댔던 사람, 이 모든 사실을 부정했던 사람... (중략) 나는 언젠가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고통스러운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준 나 자신이었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조차 등을 돌리게 한 나의 메마름이었다.

 

p.180-181

 

 

이야기를 읽고 나서 한동안 부끄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나비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다가가지 않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던 모습에 멀어진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모습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었겠지.


모래와의 관계를 돌아보며 나비는 사랑이 불공평한 감정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감정의 크기는 같을 수 없다고. 누군가가 이기적이고 착해서가 아니라 원래 사랑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라고. 아프게 할 의도가 없었더라도 선천적인 다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는다.


나비도 누군가에게는 모래처럼 한없는 애정을 표현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나 역시 여러 관계에서 모래가 되기도 했고, 또 나비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책의 제목처럼 내게 무해한 사람은 사실 없는 것 같다. 무해해 보이는 사람만이 있을 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이 관계를 위해 무던히도 자신을 깎은 결과일 것이다.


이제 영화가 끝나도 나는 마냥 자책하지 않는다. 의도와 달리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관계의 필연적인 모습임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모래에 가까운 사람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지금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만날 새로운 사람들에게도. 다른 이의 무해함을 가장한 노력에 기대지 말고 먼저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최예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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