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폴라로이드 기억법 [사람]

폴라로이드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찍는 이유
글 입력 2021.04.0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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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필름 카메라가 한창 유행일 때, 부모님 방 서랍장 한 구석에 묵혀져 있던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거의 20년이 지난 과거의 유물이었지만 배터리를 새로 끼우니 새 것처럼 작동했고, 잔뜩 신이 난 나는 필름 여러 통을 사서 이곳저곳을 누볐다.

 

물론 친구들 사진도 많이 찍어줬다. 그런데 사실, 부끄럽게도 그때 찍은 사진은 여전히 필름 속에 머물러 있다. (친구들은 나에게 대체 언제 필름 인화하러 갈 거냐고 장난기 섞인 타박을 던지곤 한다. 이 자리를 빌려 친구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미안해, 올해 안에는 꼭!)

 

이건 다 게으름이라는 나의 고질병 때문이다. 찍을 때는 분명 신났는데, 필름을 인화하러 가기가 너무 귀찮다. 아, 그냥 즉석카메라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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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짐한 후, '즉석카메라(폴라로이드) 구매하기'는 내 마음 한 구석에 묻혀 있는 조그마한 소원이었다. 1순위로 사야 할 물건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야 하는 것. 그래서 작년 10월에 (평소보다 넉넉하게 들어온) 아르바이트비를 받자마자 폴라로이드를 샀다. (정확히 말하면 후지 필름의 인스탁스 제품을 샀으니, '폴라로이드'는 아니다. 편의를 위해 폴라로이드로 부르겠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구입한 폴라로이드는 제 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당시에 필름을 100매 정도 같이 구매했었는데,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다. 이상하다. 이렇게 필름을 빨리 썼다고? 믿기지 않는 성과다. 하긴,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는 꼬박꼬박 챙겨 나갔으니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 같다. 왜 굳이 폴라로이드로 사진을 찍냐고. 이 질문에 단순히 '감성'이라고 답하기에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내게 안겨주는 기분이 다소 복잡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왜 폴라로이드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찍고 싶은지에 대해 차근차근 답해보고자 한다.


 

 

나를 기억해 달라는 신호


 

밖에 폴라로이드를 챙겨 간다는 건 조금 거추장스럽다. 생각보다 부피가 크기도 하고, 또 막 다루기에도 애매해서 일단 챙겨나가면 신경 쓰인다. 그런 반면 주머니 안에 쏙 들어가는 스마트폰은 참 편하다. 기록하고 싶은 장면이 있으면 간편하게 꺼내 사진을 찍고(이왕이면 연속 사진으로), 몇 십장이 되는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공유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수많은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사진을 선택하고, 후보정을 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좋다.

 

스마트폰 안의 갤러리는 그렇게 만들어낸 사진으로 가득 차있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구도로 찍은 사진이 수십 장에 달한다. 누가 찍어 주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또 어떤 감정이었는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사진도 있지만, 그 모든 게 가물가물한 사진도 있다. 그중에는 좋아하는 사진도 있고, 싫어하는 사진도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사진은 삭제해버리면 그만이다. 몇 천장의 사진이 들어있는 갤러리에서 주인의 미움을 받은 사진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봤자, 아무런 티도 안 난다.

 

그런데 폴라로이드는 찍은 자리에서 바로 사진이 나오니 막무가내로 셔터를 누를 수 없다. 거기에다가 널찍한 화면으로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 미리 예상할 수 있는 스마트폰 카메라와 다르게, 좁다란 구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좁은 시야 안에 간신히 맺히는 상대방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셔터를 누른다. 그 순간에 내 손이 조금 떨렸는지, 아니면 저 앞에 서 있는 당신의 몸이 흔들렸는지 바로 알 수 없다.

 

희게 비어있는 필름이 나오고, 그 위에 색색들이 만개하기를 기다리면서 오가는 말은 평소 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나누는 대화와 사뭇 다르다. 흔들리지는 않았을까, 어떻게 찍혔을까, 신기하다, 이거 흔들면 더 빨리 나오나? (아니다), 우리 다음에는 같이 찍자, 이 사진 내 책상 앞에 붙여놔야지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오롯이 그 순간과 사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비어 있던 필름이 '어떤 순간'으로 채워지면, 우리는 그 사진을 보며 킬킬거리기도 하고, 풍경 위에 사진을 겹쳐 놓아 보며 감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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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그렇게 탄생한 사진의 실물을 상대방에게 건네는 순간이다. "자, 선물!"이라고 외치며 말이다. 그를 찍은 사진이니까 그 사진을 상대방에게 주는 건 당연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단순히 '당신을 찍은 사진이니까, 당신에게 줄게요'가 아니라. '내가 당신을 담아냈어요'라는 마음이다.

 

내가 담아낸 당신의 모습이 0과 1의 공간에 묻혀 있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그런, 수천 개의 사진 중 하나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유일무이 하기에 간단히 없애거나 잊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바라보기만 하는 사진이 아니라, 손에 쥘 수 있는 사진이었으면 좋겠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사진. 그로서 우리가 함께 머물렀던 공간과 시간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또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되새겨주었으면 좋겠다.

 

가장 강하고 선명한 바람은 이거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서, 직접 당신에게 건네준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나를 기억해 달라는 신호다.

 

 

 

클로즈업해 떠올리기


 

앞서 말한 폴라로이드에 얽힌 모든 순간들은 클로즈업과 닮았다. 나와 상대방의 거리를 좁혀주고, 사진 자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 순간이 어땠는지에 대한 주관적인 기억을 몽실몽실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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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 거실 한 구석에는 집게로 꽂은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줄지어져 있다. 사진 하나하나마다 나름의 사연이 담겨있다. 여기에는 내가 첫 번째로 누군가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도 있는데, 2020년 10월 16일에 찍은 작은오빠의 사진이다. (아무래도 처음 찍어보다 보니, 사진이 조금 흔들렸다.)

 

여기서 오빠는 거실 탁자에 앉아 내가 선물한 (사진을 찍기 이틀 전이 오빠의 생일이었다.) 새 컨버스 신발을 들고 있다. 나는 오빠에게 생일을 축하하며 사진과 신발을 건넸고, 오빠는 몇 번이고 사진을 들여다봤다. (사진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빠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다시 폰 카메라로 찍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까지 올렸다.)


오빠에게 기념사진이니까 밑에 날짜를 적어두는 건 어떨까라고 제안하자, 오빠는 필름의 빈 공간에 연두색 네임펜으로 "2020.10.15"라고 새겼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 날은 10월 16일이었다. (똑똑하지만 이상한 데서 늘 덜렁거리는) 오빠가 쓴 날짜를 보고 나는 미친 듯이 웃었고, 오빠는 다소 민망해하며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나는 그 사진을 이렇게 기억하는데, 오빠가 이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또 모르겠다.


이 외에도 (드라마 <프렌즈>를 완주한 기념으로 산) 프렌즈 센트럴 퍼크 레고를 다 조립한 순간에, 완성된 레고를 들고 있는 나를 오빠가 찍어준 사진. 중학교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와 자고 간 날, 아침에 씻지도 않은 자연인의 상태로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찍었던 사진. 먹을거리를 잔뜩 챙겨 와 막내딸과 둘째 아들의 자취방을 방문한 엄마 아빠를 억지(까지는 아니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사진 찍자고 귀찮게 굴었다.)로 앉혀놓고 찍은 사진 등등. 사진을 보기만 하면 자동으로 그 날의 기억이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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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로이드 사진은 고화질의 디지털 사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한데, 그 희미한 사진을 둘러싼 기억은 이다지도 생생하다.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때의 기억이 내 위에 다시금 머물고 가는 듯하다. 필름 위를 수놓은 색채는 언젠가는 흐려질 테다. (그마저도 좋다면 이건 폴라로이드 사진을 향한 나의 편애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을 보는 나의 감정도, 그 기억도 조금씩 달라질 테니 사진이 바래지는 건 어찌 보면 이치에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만, 시간이 지나 폴라로이드 사진이 흐려지고 또 옅어져서 뭉개진 얼룩에 불과해지더라도, 그 위에 얽힌 사람과 기억만은 또렷하고 생생했으면 좋겠다. 인생이라는 파노라마를 떠올릴 때, 그 안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클로즈업 같은 순간처럼 말이다.


나에게 폴라로이드 사진을 받아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그 순간과 나를, '우리'를 클로즈업해 떠올렸으면 좋겠다. 수많은 기억 속, 유독 찬연하고 선연한 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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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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