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성혜의 나라'에서 현대 사회를 바라보다 [영화]

당신의 나라는 어떤 색인가요?
글 입력 2021.04.03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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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만약 인생을 색에 비유한다면, 우리 각자의 인생은 무슨 색일까? 프리즘에 반사되듯이 여러 색이 존재하는 인생도 있을 것이고, 확고히 단색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색이 생의 주기마다 다양하게 바뀔 수도 있다. 그런데 아무런 색을 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요즘에는 꽤 많아지고 있다. 특히 N포세대라 불리는 청년들의 삶이 더 다채로운 빛을 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N포세대’란 2015년 이후 등장한 단어로, 3포, 5포 심지어 7포 세대를 넘어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세대를 이르는 신조어이다. 여기서 ‘포’가 포기를 의미한다. 단순히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꿈, 인간관계 등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에 N포세대라 표현한 것이다. 사실 신조어라고도 하지 못할 만큼 이미 여러 매체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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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작년에 개봉한 독립영화 <성혜의 나라>에 등장하는 ‘성혜’ 역시 흑백을 택한 N포세대의 청년이다. 성혜는 편찮은 아버지를 경제적으로 부양하면서 서울에서 힘들게 살아간다. 편의점,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직을 준비해야 하는 그의 하루는 고되기만 하다. 푸른 봄을 뜻하는 '청춘'을 살아도 모자랄 시기에, 성혜는 그에 어울리지 않는 색인 '흑백'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흑백 배경으로 사회상을 반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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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화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흑백이다. 심지어 아침인지, 밤인지조차 시간 구분이 어렵다. 짧게 등장하는 가로등의 불빛으로 추측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굳이 온통 흑백으로 연출했을까? 그 이유는 색이 없다고 정의되는 흑백의 상징적 요소 때문이다.

 

 

획일화 : 책임 회피의 침묵에 대하여


흑백으로 표현한 첫 번째 이유는 ‘획일화’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획일화는 “모두가 한결같아서 다름이 없게 됨. 또는 모두가 한결같아서 다름이 없게 함”이라는 뜻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골콩드>를 보면, 똑같은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빗방울이 되어 똑같이 건물 사이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도시 속의 획일화된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이 영화 역시 색상 측면에서 흑백으로 획일화를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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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일화'라는 단어를 확장해서 살펴보면 무언가의 침묵, 동조, 묵인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는데, 성혜가 겪은 일을 보면 그 의미를 깊이 알 수 있다. 사실 성혜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인턴 생활을 했었다.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컸지만, 인턴 기간을 끝까지 마치지도 못한 채 그만두게 된다.

 

직장 내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이를 고발했으나, 성혜의 편을 들어주는 이들은 없었고 상사는 무혐의로 풀려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른 직장에서의 취업이 막히게 된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 고발할 수 있었던 용기를 가졌지만, 그 용기가 마치 잘못인 것 마냥 성혜를 불합격으로 몰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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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인턴 기간 함께 했던 한 상사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상사는 반갑다는 듯 자꾸 만나서 이야기 한번 하자고 하지만, 성혜는 불쾌할 수밖에 없다. 결국, 편의점 사장이 아버지라는 것도, 유학을 준비하는 것도 다 거짓말임을 말하고 화를 낸다. “그때 한 명이라도 동조해 주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피해자가 정말 피해자가 되는 순간은 고발하는 ‘용기가 부끄러운 것이 되고, 오히려 숨겨야 하는 것이 될 때’인 것 같았다. 그리고 단지 미래가 두려워 묵인했던 평범한 이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도 알았다. 각자의 책임을 조금씩이라도 진다면 다 같이 살아갈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영화는 획일화로 인해 색깔을 잃고, 부당한 일에 둔감해지는 사회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비판하고 있다.

 

 

과정의 생략 : 감정을 잃어버린 이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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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흑백으로 연출한 이유는 '감정 변화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극단만 존재하는 흑백처럼, 성혜 역시 감정 변화에 둔감하다. 감정의 중간 과정이 생략된 느낌이다. 그래서 그는 기쁠 때도 크게 웃지 못하고, 슬플 때도 맘껏 울지 못한다. 심지어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죽음에도 충분한 슬픔을 겪는 장면이 없다.


이와 관련해 영화를 보면서 문득 무서웠던 점은 성혜가 면접을 보면서 억지로 웃음을 지었던 장면이다. ‘남자친구는 없냐’, ‘결혼은 언제 하냐’는 전혀 상황에 맞지 않은 질문에 환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 소름이 돋았다. 무례한 질문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최근 한 제약 회사의 면접 사건이 떠올랐을 만큼, 영화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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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성혜가 유통기한이 지난 편의점 도시락을 꾸역꾸역 먹는 장면을 보여주며, 불안정한 그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불면증, 공황장애까지 겪으면서도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던 성혜와 아픈 청준들의 모습을 말이다.

 

 

 

돈으로 환산되는 인생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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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총 두 번의 죽음을 다룬다. 우선 성혜의 친구, 민서의 죽음이다. 자살로 추정되는 민서는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발견된다. 월세를 낼 돈이 없어 성혜에게 전화했던 그는 돈 때문에 죽었다. 돈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두 번째 죽음은 성혜의 부모님이다. 성혜가 번 돈으로 아버지의 건강이 조금 회복되면서 부부는 드라이브를 나가지만, 누군가의 음주운전으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게 된다. 홀로 남겨진 성혜는 합의금이라는 명목 아래, 부모님의 목숨값으로 5억을 받았다.


차마 받을 수도, 쓸 수도 없을 듯한 그 돈을 성혜는 기관에 맡긴 채 한 달마다 나누어 쓰기로 한다. 그리고 모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다. 누구도 뭐라고 안 할 테니, 그저 이렇게만 살겠다고 말한다. 부모님의 목숨값을 생각하면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영화 포스터에 적힌 문구처럼 '선택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는 성혜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돈이 없어 죽었던 민서, 부모님의 죽음으로 돈이 생겨 이제야 사람다운 삶을 사는 성혜, 이 두 사람을 보며 인생을 돈의 가치로 여기는 현실이 서글펐다. 장례식 이후 성혜는 ‘우리 목숨값은 얼마나 될까’라고 묻는데, 이 물음이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향해 던지는 화살과도 같았다.

 

 

 

<당신의 나라>를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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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은 그렇게 성혜의 흑백 삶을 비추며 끝난다. 이미 흑백으로 물들어 버린 성혜의 인생을. 극적으로 다양한 색이 등장하는 평범한 연출 없이 말이다. 마치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그의 삶을 자전거 바퀴에 비유하듯이, 성혜가 자전거를 타고 사라지는 장면이 마지막이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파란 나라를 보았니 맑은 강물이 흐르는

파란 나라를 보았니 울타리가 없는 나라"


이는 1996년에 발표된 ‘파란 나라’라는 곡의 가사 일부이다. 생기가 넘치는 파란 나라와 대비할수록 <성혜의 나라>는 초라해진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파란 나라보다는 성혜의 나라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 의해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금 더 다채롭고 온기 있는 삶이 되도록, 적어도 당신의 나라에서는 당신이 주인이면 좋겠다.

 

 

[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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