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 - 영화 '더스트맨'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쓸모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글 입력 2021.04.02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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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더스트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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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도 태산에게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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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먼지'는 '청소해야 할 대상', '털어내야 할 대상'이다. 보통은 먼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산에게는 다르다. 태산에게 먼지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며, 자신의 삶을 전환시켜 준 계기가 된다. 재투성이로 쌓여있던 태산의 마음은 먼지를 날려내며 치유된다.

 

나는 태산이 그림을 그리고 난 후 느꼈을 감정에 이입해보려 했다. 삶에 아무 미련도 없어서 죽음까지 택하려 했던 태산이 왜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지, 태산에게 '더스트 아트'는 무슨 의미였을지. 태산에게 SNS 상에서 자신의 그림이 유명해지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태산이 먼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함으로써 스스로 느꼈을 자기 효능감과 '삶에의 의지'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야 한다. 그게 꼭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게 하물며 먼지 위에 그리는 그림일지라도 상관없다. 사람이 더 살아갈 수 있는지는 그 먼지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홈리스들도 서로에게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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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서울역에 모여있는 홈리스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종종 지하철역에서 홈리스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서울역에 유독 모여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영상들을 찾아본 결과 홈리스들이 서울역에 모여 있는 실제 이유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다른 곳들은 누군가 노숙하고 있으면 신고가 들어오는데, 서울역은 노숙 환경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어서 노숙을 해도 누군가가 신고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 명이 모여 있기 때문에 주변에 급식소 등도 많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전달하고 있는 의미는, 그리고 내가 영화를 보고 받아들인 이유는 조금은 달랐다. 아무리 약한 존재일지라도, 아니 약한 존재일수록 뭉쳐 살아야 한다. 굳이 연락처를 주고받고 인맥을 쌓고, 굳이 친구를 만들고, 굳이 가족을 이루고 모여사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며 살기 위해서 상호작용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모여 사는 것이 독이 될 때도 있다.)

 

서울역 홈리스들은 추운 날씨 탓에 때때로 목숨을 달리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그런 부분이 묘사되었다. 경찰과 구급대원이 찾아와 주변 사람들에게 고인이 혹시 연고가 없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사람들은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지만, 이미 연이 끊긴지 오래라고 한다. 그리고 이내 그의 죽음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는 동안, 태산과 도준과 함께 다니던 김 씨 삼촌도 돌아가시게 된다.

 

역시나 찾아온 경찰에게 태산은 김 씨 삼촌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며, 삼촌의 지갑 속 사진 뒤에 적힌 아들의 번호로 전화를 건다. 하지만 삼촌의 아들은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분노한 태산과 도준은 삼촌의 제사를 지낸다. 삼촌이 가장 좋아하시던 치킨과 소주를 허름한 의자에 올려놓고.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고독사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주변에 있던 홈리스들은 고인들의 존재와 그들의 마지막을 서로 기억하는 존재가 된다.

 

 

 

태산도 도준, 삼촌, 그리고 모아에게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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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은 자기 스스로를 쓸모없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화재 속에서 왜 친구가 아니라 본인이 살아남았는지 자책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산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된다. 태산은 발달장애를 가진 도준과 늙고 병든 김 씨 삼촌을 보살피며 홈리스 생활을 해나간다. 그러나 태산만이 도준과 삼촌을 챙기는 것은 아니다. 도준과 삼촌도 태산 옆에 있음으로써, 태산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되고 태산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태산은 모아에게도 소중한 존재이다. 모아의 통통 튀고 적극적인 성격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 모아에게 먼저 관심을 갖고 먼저 다가간 건 태산이었다. 태산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태산의 마음속에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그래서 모아의 그림을 보는 순간 저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을 곳에 왜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까 흥미가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에게 쫓기는 모아에게 지름길을 알려준 것도 태산이었다. 이후 둘은 그림을 매개로 의미 있는 교감을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위안을 전한다.

 

그리고 모아는 그런 진심을 태산에게 밝힌다. 정말 순수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저는 아저씨 때문에 졸업작품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본인의 역경을 태산 덕에 넘어설 수 있었다고. 그러나 그 당시 태산은 본인에 대한 칭찬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있었다. 그러기엔 아직 태산의 자존감이 낮은 상태였다. 그래서 태산은 "제 불행을 보면 당신 불행이 작아 보이죠"라며 모아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다.

 

 

 

어차피 지워질 그림도 화가에게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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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번 태어나 살다가 죽습니다. 태어나기를 원했던 것도 부모님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지요. 탄생과 함께 우리는 이 세상에 오게 되었습니다. 생명은 정말로 신비스럽습니다. 인간은 탄생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앞으로 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은 의식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삶의 출발과 끝을 철학의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태어난 이유도 없고 사는 이유도 없고 죽는 이유도 없다는 것이지요.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이것을 염세주의라고 합니다.

 

『쇼펜하우어가 들려주는 의지 이야기』  36쪽 中


 

나는 한동안 '왜 살아가야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꽤 많이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으로 많이 고통받았다. 태산 또한 '왜 너만 살아남았어'라는 질문에서 쉽사리 벗어나질 못한다. 태산과 같이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 '왜 살아가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질문 자체가 말이 되지도 않고 성립하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힘들다고 '나 살기 싫어. 모든 게 귀찮아.' 등으로 시작하면서 세상의 온갖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럼 밥은 왜 먹고 숨은 왜 쉬니? 어차피 죽을 거.' 맞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밥을 먹을 이유도, 사람을 만날 이유도, 사랑을 할 이유도, 돈을 벌어먹고살아야 할 이유도, 좋은 것을 보고 만족감을 느낄 이유도, 재밌는 일을 하고 자아를 실현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죽을 건데 뭐 하러. 우리는 그냥 배고프니까 밥을 먹고, 호르몬 때문에 사랑을 하고, 태어났으니 살아있는 것이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청소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먼지가 쌓이는 것처럼.

 

먼지가 쌓였다고 '이걸 청소해야 할 이유가 뭘까' 생각하며 방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냥 먼지가 쌓여서 더러우니, 닦아내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마음에 먼지가 쌓였으니, 그걸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어차피 지워질 그림이지만, 그리는 사람은 그 그림을 기억하니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다. 어차피 사라질 삶이지만, 그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니 안간힘을 써서 살아내는 것이다.

 

*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를 아예 모르고 가서 영화를 마주한 순간 드는 첫 느낌을 음미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자세한 줄거리를 숙지하지 않고 영화관에 입장했다. 영화관람 전 본 것이라고는 어떤 배우들이 출연하는지와, '더스트 아트'라는 소재를 사용한다는 점과, 메인 예고편 하나가 다였다. 메인 예고편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도 각자 이야기가 있어요'라는 그 한 줄이 내 마음을 이끌었다. 언젠간 나도 구태여 글이나 무언가로 남겨놓지 않으면, 툭 치면 한 줌에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존재들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안의 쓸데없는 질문들과 맞서 싸우느라 극의 몰입에 방해가 된 적도 있었다. 태산은 대체 무슨 과거를 갖고 있는 거지? 모아는 왜 태산에게 다가가는 거지? 모아는 왜 올빼미를 좋아하지? 등의 질문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태산의 과거는 잘 드러나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영화가 주는 메인 메시지가 '태산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초점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산이 어떻게 고통을 치유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라는 점만 인지하고 영화를 관람하면 더 몰입감 있게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거기에 개인적으로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아무리 쓸모없어 보여도 본인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며 이 영화를 감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방전으로 먼저 이데아와 예술의 관계를 논한다. (중략) 이처럼 예술은 인간으로부터 주관 혹은 객관이라는 요소를 제거해주고, 의지와 욕망에서 비롯된 모든 고통에서 인간이 해방되도록 이끌어 준다. (중략) 쇼펜하우어는 그다음으로 '도덕'을 통한 해탈을 이야기한다. 인생 자체가 고통이라면, 나와 다른 타인의 인생도 늘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고통에 공감하고 동정함으로써,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곁에 두고 읽는 서양철학사』  165~166쪽 中

 

 

 

영화를 보고 떠올랐던 노래 한 곡


 

▲ 유하 - 인부 1 / Official MV

뮤비 마지막 내레이션까지 잘 들어보시길 바란다.

 

 

나는 인부 1이에요

소금밭, 공사장, 길거리

어디에든 쉽게 있어요

사라져도 모를 일이죠


(중략)


나는 인부 1이에요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죠

한때는 글을 쓰기도 했고

글처럼 살고 싶어 했었죠


새벽의 고즈넉한 어둠엔

무언가 떠오르기도 했고

저기 저 위에 높이 떠 있는

연필 같아요 우리 사는 거


오늘도 뜨거워지는

나의 눈은 언제쯤 식을까

아무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다

지쳐 잠들겠지


몇 시간 후면 다시 일어나

씻어야 하는 나인 걸

그래도 눈을 감자 감아보자

혹시라도, 혹시라도...

 

♪ 유하 - 인부 1 中

 

 

 

아트인사이트 명함.jpg

 

 

[이채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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