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4.0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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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실은 유년기를 종종 질투한다. 그 시절이 부러운 것은 무거운 주제들에 마음을 뺏기지 않았던 유일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그 나이만의 거대한 고민이 있었다. 태권도 승단 심사나 영어학원의 단어 시험보다 더 사랑스럽게 유치한 것들. 엄마한테 용돈 삼천 원 더 받는 방법 연구하기, 새로 나온 아바타 북과 갖고 싶던 보라색 샤프 중 무엇을 살지 꼼꼼히 따져 보기, 술래잡기를 할 지 아니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탈 지에 대한 진지한 토의, 현장학습을 갈 때 버스 옆자리엔 누가 앉을까 생각했던 밤 등등. 설령 망쳤다고 해도 배를 채우면 금방 기분이 풀어지는 제법 단순한 문제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먹어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자랄수록 점점 더 많아졌다. 키는 멈췄는데 시야는 자꾸만 커져서 보지 못했던 불행들을 더 많이 보게 됐다. 타인의 아픔에 꼭 나의 일처럼 애통해하기 시작했다. 거시적인 담화와 논쟁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젠더와 종교를 주제로 침대에 누워 친구와 서너 시간 동안 통화하고, 미국에서 일어난 인종차별과 미얀마의 상황에 대해 가족들과 열띤 토론을 펼치는 것. 사는 게 그런 것 같다고 불쑥 혼잣말하는 것. 방구석의 작은 침대, 비좁은 거실, 남쪽에 매달려 있는 나의 도시,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반도 안에서 일어나는 대화들은 언제부터인가 시공을 초월한 채 혀끝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모든 대화에는 다소 짜증스러운 공통점이 있다. 분노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말은 언제나 지독한 무력감이 차지한다. 이렇게나 많은 서사를 알고 있는데, 아직도 내가 모르는 고통이 너무나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 괴롭다. 괴로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삶은 어째서 이런 모양인지 신에게 별안간 질문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우울과 좌절에 잠식되지 말자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러나 애써 지켜온 마음을 포기하고 생각을 멈추고 싶은 날들이 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연약하고 게으른 날들. 그럴 때마다 나는 뒤축이 제법 해진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간다. 부산에 살기에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용 중 하나는 바다를 보며 사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도의 규칙을 가만히 보고 또 들으면 온갖 소란이 잦아든다. 길게 이어진 광안대교를 따라 걸으면 내 안을 채우던 불유쾌한 덩어리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환기는 항상 성공적이었다. 언제나 광안대교가 보이는 산책로 위만이 유일하게 내가 비우고 또 보내기만 하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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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민, 광안대교, 2006, 한지에 수묵, 호분, 290x860cm, 2020부산비엔날레

 

 

단 한 번, 비우기는커녕 흠뻑 젖은 마음으로 돌아왔던 날을 기억한다. 작년 여름, 배지민의 <광안대교>를 감상했을 때의 일이다.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고 싶어 전시를 예약했다. 순진한 걸음으로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검은 아우라가 몸을 덮쳤다. 익숙한 다리는 다소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한지 위에 수묵으로 수놓아진 대교의 풍경이 처음으로 슬펐다.

 

육중함이 느껴지는 교각과 금방이라도 휘청거리며 꺾일 듯한 가로등의 무게감이 서로 대비되며 도시의 한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세로로 중첩된 선들은 분명히 빗줄기일 텐데, 나는 누군가가 할퀸 자국을 보는 것 마냥 숨이 턱 막혔다. 난사되듯 거친 붓질이 마음을 쓰라리게 긁었다. 비 뒤로 펼쳐진 먼지 가득한 도시의 삭막함이 익숙했다. 삶이다.차갑고 냉정한 것은 삶이다. 저것은 차갑고 냉정하다. 그러므로 저것은 삶이다. 말도 안 되는 삼단논법을 중얼거리며, 고르지 못한 걸음을 떼며, 그날도 나는 흑백의 광안대교를 따라 걸었다.

 

대교 밑의 고독한 정적을 뚫고 풍경이 소리 없이 말을 걸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비울 수 있겠냐고. 그러나 이미 제쳐두고 싶은 생각들은 밀려들어 왔고 나는 저항할 수 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모든 도시가 보편적으로 품고 있는 풍경 앞에서,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늘 앞에서 나는 즐겁게 전시를 감상하겠다는 해맑음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

 

다양한 삶의 군상들로 가득 찬 도시를 떠올리면 선뜻 유쾌하지가 않다. 그 안에서 생기는 가시적인, 또 비가시적인 갈등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했다. 혼자 있으면 외롭지만, 함께 있어도 공허한 밤들을 떠올렸다. 타르처럼 구석구석 진득하게 자리 잡은 지리멸렬함. 빗줄기가 결코 씻어낼 수 없는 도시의 수많은 우울을 떠올리고 나니 급격히 침잠하는 기분이었다. 순간 먹의 쌉싸름한 냄새가 코 끝에 맴도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갑자기 공기가 애처로울 만큼 축축해졌다. 어쩌면 비는 더러움을 씻어내기 보다는 감춰진 것들을 폭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평탄하게 걸어왔던 길이 알고 보니 지대가 낮은 곳이어서 장마 후에 진창이 되듯이. 멀쩡한 척했던 삶이 사실은 해묵은 신파였던 것처럼.

 

다시 눈을 들어 직선으로 쭉 뻗은 것이 아니라 살짝 굴곡져 있는 다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각자가 타고 있는 차선과 랜덤처럼 배정받은 오르내림을 긍정적으로 소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시동이 꺼지지 않는 한 결코 멈출 수 없는 대교 위의 자동차들처럼, 결국 돌아오게 되는 나의 유해한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느꼈다. 궤변과 오욕과 허탈에서 해방되는 몽상에 젖은 채, 복잡한 이해와 관계들이 모두 소멸하기를 바라며 해변을 걸었던 날들이 허망하게 떠올랐다. 아마 나는 평생 생각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체념에 빠지지는 않았다. 작가가 화폭에 세워준 가로등 때문일지도 모른다. 달과 별의 빛이 도시의 밤에선 무용하다 해도, 무수한 가로등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 위의 안전을 지키고 있음을 상기했다. 투박하게 이지러진 선들과 습윤한 먹의 번짐, 그 위태롭고 어두운 시정거리 속에서도 계속 앞으로 운전해 나가는 움직임을 생(生)의 증거로 상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모든 불빛과 움직임은 어쩌면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움직임 아니겠냐고.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살아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되뇌었다. 어둠과 위험에 대해 매일 생각하는 것은 고역이지만, 정신을 하루도 게으르게 쓰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그 여름, 생각하기를 피하려다 만난 광안대교가 내게 준 것은 결국 생각이었다.

 

나는 길이 다소 지저분하다고 해도 피해 돌아가지 않고, 신파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언제나 신파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토록 신랄하게 삶을 몰아세우면서도 누구보다 큰 애착을 가지고 끈질기게 내일을 향한 잠을 잔다. 그렇기에 오늘 상처 입은 마음과 얼룩진 세상 속 소동들을 가슴 깊이 불평하면서도, 또 그런 생각들을 멈추길 바라면서도. 나는 또 생각한다. 로댕의 조각상이라도 되는 것 마냥, 오늘도.

 

 

[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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