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호주, 그럼에도 소년이 사랑했던 곳

한없이 반짝이던 그곳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글 입력 2021.03.2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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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여름과 한 번의 가을이 일상이던 곳에서는 시간이 참 느리게 흘러갔던 것 같다. 나른함이 지속되던 나날들 속에서 소년은 시큼한 오렌지 향이 가득한 학교를 향했다.


심심찮게 오렌지를 까먹고 사과 주스를 입에 문 각색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들을 바라봤다. 몇 해가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국의 낱말들과 재잘거리는 음성들이 허공을 부유했다. 그러나 풍부한 음성들 속에서 소년은 쉽게 함께 목소리를 뱉어낼 수 없었다. 공감 많고 리액션 큰 동양의 소년이 사실은 그들 곁에서 어젯밤 읽었던 소설 속을 배회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알았을까. 그저 자신이 부유물이 된 것처럼 남몰래 그 대화를 이탈해 쉽게 스러지는 상상들과 함께 허공을 헤엄쳤다. 겉으로는 무언가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처럼 고개만 주억일 뿐이다. 타지의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소년은 그토록 가벼운 것들을 품고 다니며 쉽게 헤엄쳤다.


소년이 부유물을 내뱉는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것에 관해 이야기 할 때면 많은 것들을 변명할 수 있었다. 자주 비행기를 타며 한국과 호주를 오간 것과 한 공간에 익숙해질 틈 없이 달이 넘어가기 전에 꼬박꼬박 이사를 다닌 것. 무언가에서 쫓겨 다녔던 나날들 속에서 뇌리에 박혔던 언어는 쉽게 스러졌다. 외로움 속에서 이곳저곳에서 구해온 모국의 책만을 유일하게 품에 안고 살았다. 소년은 무력감만이 맴돌았고, 끝없이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소년이 그의 육체를 땅에 붙일 수 있었던 것은 뼈가 자랄 때의 손길은 언제나 먹을 것을 향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쉬는 시간마다 불량식품 같은 과자들과 함께 동양 타국에서 나온 라면을 즐겨 먹으며 모국의 라면과 비교했다. 냉장고의 찬 기운에 밥알들이 말라버린 연어김밥도 소중한 한 입이었으며, 색색의 젤리들은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언제나 같은 맛이었다. 과할 정도로 달콤했고 한 입마다 인공적인 과일 향이 입안에 퍼졌다. 먹는 것의 즐거움이 컸다기보다는 그나마 같은 것을 공유한다는 것이 큰 위로였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부유물들 속에서 음식을 섭취하는 사이 육체는 날이 갈수록 성장했고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영혼만이 부유와 침전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그곳을 사랑했다.


눈을 마주쳤을 때 경계 없이 쉽게 휘었던 그곳의 눈매들을 사랑했다. 낯선 이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인사와 작은 이야기들이 소중했다. 하교 후에 해가 떠 있을 때의 그곳은 눈길이 닿는 곳마다 별무리처럼 반짝였다. 시내 한복판에 존재했던 인공 수영장과 그 속에서 찰랑이는 맑은 물, 그곳에서 다정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하루의 여유로움을 즐겼던 연인들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소중한 시간을 빛냈다. 잔디밭에서 책을 읽는 붉은 머리의 여성, 어린 피붙이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의 노인들, 공놀이하며 뛰어다니는 소년·소녀의 웃음소리 속에서 한참을 서 있다 보면 더없이 행복했다. 괜히 그들의 틈에 끼고 싶어 잔디밭을 서성이다 누운 하교 후의 오후들 속에서 보였던 하늘의 푸르름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다.


그렇게 행복한 이들 속에서 한참을 누워있다가 붉은 노을이 땅을 뒤덮을 때가 되어서야 집을 향해 걸어갔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노곤히 몸을 눕히던 다리 하나 없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외로움을 공유하다 보면 땅거미가 져 있었다.

 

*


주말이 되면 시린 새벽 공기를 마시며 차를 탔다. 건조한 더위 속으로 흙과 숲의 냄새가 스며들어 살결을 스치던 길들을 달렸다. 땅이 너무 넓은 탓에, 그리고 인구는 너무 적은 탓에 마주치는 자동차는 기껏해야 십 분에 한두 대. 어린 소년을 사이에 두고 운전석과 조수석에서는 텁텁한 더위를 투덜거리던 두 남성이 시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주요 대화 주제는 주로 한국 동포들의 소식들이었다. 이름은커녕 가끔은 성별도 알려지지 않은 채 동포들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떠돌고 있었다. 타지에서의 고단함으로 지쳐있었던 그들은 얼굴 모를 낯선 자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상 없는 정을 심심찮게 품었다. 때로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며 팁이라고 주고받고선 시시한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토지 넓은 곳을 오랜 시간 오가는 일상 속에서는 시시함은 사치라는 듯이.


이제 막 나이가 두 자릿수를 이루기 시작한 소년은 그들의 대화에 쉽게 말을 얹지 않았다. 신중함보다는 지루함이 더 컸다. 갖은 추임새만 넣다가 가끔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질 뿐, 곧 그마저도 흥미를 잃으면 결국 나무가 무성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뻗어있던 높은 나무들의 웅장한 녹음.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면 오랜 시간 인간의 손길로부터 버려진 철도 위에서 명을 다한 기차들이 각색의 스프레이 낙서들로 덮어져 있었다. 버려진 것들이 색 빠진 황금빛 들판을 꾸미고 있던 곳. 차의 창문 틈으로 거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가끔은 이름 모를 야생 동물들이 튀어나왔고, 가끔은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들이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있었다.


EUMUNDI MARKET


미술을 사랑하던 청년들이 둘 셋이 모여 그림을 팔던 것으로 시작한 미술 시장은 어느새 그 지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문화 시장이 되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한국의 그림을 그려 파는 혁필화가였다. 그의 어린 딸은 언어에 능숙하지 못한 그 대신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구경했고, 돈을 받고 둘을 데려다준 운전자는 정해진 시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며 자리를 떠났다. 아버지와 소년은 그를 떠나보내고 적당한 자리에 테이블과 붓과 물감들을 펼치며 그 하루를 시작했다.


마켓은 우거진 나무들을 사이에 두고 다채로운 장식물들과 북적이는 사람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문화 시장답게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의 것들을 팔았다. 각국의 전통 음식들부터 해서 전통 그림들, 악기들, 액세서리들이 화려하게 그들의 테이블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자리에서 즉석에서 인도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눈썹 정리를 해주고, 태국의 방식으로 마사지를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계가 그곳에 존재했고, 소년은 그곳에서 세상을 배웠다. 매번 식사 시간마다 타국의 전통성 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태국인이 해주는 태국의 커리와 독일인이 해주는 독일의 핫도그, 대만인이 해주는 대만의 만두.


아버지께서 이름은 그리는 혁필화가였던 덕분에 정말 다양한 이름들과 그 이름들을 가진 많은 사람을 만나며 많은 것들을 배웠다. 이름에 X가 네 번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고, 그런 자신의 독특한 이름을 사랑한다는 손님으로부터 햇빛 같은 웃음을 배웠다. 자신의 이름 뜻을 이야기하며 신나하던 어린 소년들에게서는 순수함을, 자신의 자녀에게 선물해주기 위해 사가던 부부에게서는 다정함을 배웠다. 남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터프한 여성 손님으로부터는 알 수 없는 동경심을 느끼기도 했다.


사랑스러운 시간이었다. 멀리서는 원주민의 음악이 들려오고, 길거리에는 자신의 시간을 멈춘 남성이 동전을 주는 손님들을 놀라게 하고, 이제 갓 초등학교를 입학했을 법한 소년이 바이올린을 켜는 그곳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혁필화가의 딸은 그렇게 호주를 마음에 담았다.

 

*


아직도 호주에서의 기억은 나에게는 하나의 보석으로 자리 잡았다. 초라함과 다채로움이 존재했던 그곳에서 한때는 온몸에 푸르른 멍을 달고 살기도 했고, 한때는 라면 하나로 하루 이틀을 버티기도 했다. 외로움에 못 이겨 울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른 바닷가와 발가락을 간지럽히던 하얀 백사장, 나에게 수많은 것들을 가르쳐준 손님들에 대한 반짝이는 기억들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소중한 힘이 되어준다. 나는 그곳에서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배웠다.


어느새 소년은 성인이 되었고, 한국에서 공부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영상을 제작한다. 바쁜 시간 속에서 배움을 갈망하고 있다. 호주에서의 배움이 너무도 다채로웠던 탓에, 그 배움을 따라잡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참을 달린다. 그리고는 생각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떠나고 싶다. 인생을 즐기는 법을 아는 사람들의 사랑과 여유로움만이 존재했던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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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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