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쓸모 없는' 순간에 느끼는 가족의 존재 - 미나리 [영화]

미나리처럼 신선하고 잔잔한 영화
글 입력 2021.03.25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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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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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똑똑한 머리를 써야해~"


영화 <미나리>의 초입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골 아칸소로 갓 이주한 제이콥 가족의 가장 제이콥이 거대한 밭에 뿌릴 용으로 우물을 파며 아들에게 말한다. 미국에 이주한 초창기 한국인에 대한 선입견 같은 대사다.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항문을 수천 번씩 들여다보며 익힌 쓸모있는 기술로 밥벌이를 하는 제이콥 부부는 이주한 아칸소에서도 같은 일을 하며 돈을 번다. 그리고 일하는 곳에 데리고 온 심장 약한 아들 데이빗에게 제이콥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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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들은 쓸모가 없어. 쓸모가 있어야 살 수 있어. 그러니까 데이빗 너도 쓸모 있어야 해. 알았지?"

 

 

영화 미나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단어는 '쓸모없음'이 아닐까.

 

인간의 동력으로 묘사되는 심장이 약한 아들 데이빗, 손주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넘어 왔지만 뇌졸중이 와 반신마비가 된 할머니 순자, 병아리 식별이 느리다며 퇴근 후에도 다 큰 병아리를 가지고 암/수 구분을 연습하는 엄마 모니카, 아픈 동생을 바라보는 보통의 딸 앤. 그리고 아빠가 이뤄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잘 안되는 농장 일에 집착하는 아빠 제이콥까지.

 

미나리에 나오는 제이콥 가족은 그렇게 스스로 쓸모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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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칸소로 이주해 가장 제이콥의 꿈이자 낯선 타지에서 쓸모를 증명하려는 순간부터 제이콥 가족에겐 불화가 시작된다.

 

평생 병아리 항문만 쳐다보며 일할 순 없다며 어느 정도 잘 정착해 있던 캘리포니아를 벗어나, 모아놓은 돈을 다 쓸 정도로 투자한 농사는 잘되지 않는다. 어찌어찌 겨우 수확한 농작물을 팔아 가장 기쁜 순간에 와버린 가족의 해체 위기와 농작물 화재는 위기를 너머 허무를 느끼게 했다. 가장 허무한 순간 둘러본 내 주변에 남아있는 건 가족뿐. 늘 새롭게 다가오는 삶의 위기에 기댈 곳은 가족의 곁이다.


그렇게 영화 <미나리>는 할머니 순자가 잔뜩 심어놓은 미나리를 뽑는 제이콥과 데이빗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장면을 전체화면에서 봤을 때, 순자가 잔뜩 심어놓은 미나리들은 멀리서 보면 무성한 수풀 같다. 그다지 튀지도 않고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렵다.

 

가까이 있음에도 관심이 없으면 알아차리 어려운 가족의 상태와도 닮아있다.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잘하려는 가족의 모습까지 닮아서인지, 영화에서의 미나리는 묵묵히 잘 자라는 식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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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쓸모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보통의 엄마, 아빠, 형, 언니, 동생에게도, 애정 있는 관심은 때때로 필요하다.

 

제이콥은 종종 아내 모니카의 표정을 읽어낸다. 오랜만에 만나는 순자를 만남에 들뜬 모니카에게 행복해 보인다고 말하는 제이콥. 그리고 의도치 않은 자신의 실수로 가족에게 자신이 더이상 쓸모없다 느낀 순간, 집의 정반대로 걸어가는 순자를 이끄는 데이빗. 가장 허무한 실패의 순간에 이 가족이 일어설 수 있는 이유다.


물론 영화의 내용처럼, 언제나 가족의 구성원들이 제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나 하나 잘한다고 잘되는 게 아닌 이 세상은, 너무나도 많은 변수와 환경으로 인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가 훨씬 많다. 그럴 때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 느끼더라도, 그런 나를 받아주는 유일한 존재인 가족.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사실 나는 외국에 오래 살아본 적도, 이민자로 살아본 적도 없는 한국에 사는 토종 한국인이기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한국 이민자 1세대를 공감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영화에 공감하게 되는 이유는 보편적인 가족의 이야기, 나아가 내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찾는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일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세상에서 쓸모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려는 한 인간의 모습, 그런 서로에게 기대는 보통의 가족 이야기 말이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힘들고 가장 보여주기 싫은 모습까지 공유하며 흔히 말해 '볼꼴 못 볼 꼴' 다 보고도 함께하는 가족.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린 가족이잖아' 그 말로 다른 설명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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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며칠 후, 한동안 꼭꼭 숨겨뒀던 고민을 멀리 떨어져 사는 엄마에게 꺼냈다. 별일 없냐고 물으면 늘 잘 지낸다고 말했던 날들은 잠시 접어뒀다. 엄마 딸은 언제나 잘하고 있다는 자존심을 버리고, 또 걱정할까 나쁜 얘기는 하지 않았던 배려심은 넣어두고, 솔직하게 말이다.

 

오랜만에 고민을 털어놓으며, 끙끙 싸매던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약한 나를 솔직하게 보여줬다. 그리고 그날은 오랜만에 잠을 잘 잤다.

 

 

[고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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