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을방학을 보내며 [음악]

글 입력 2021.03.23 17:31
댓글 3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21년 3월 9일, 가을방학이 해체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마음이 쌀쌀해졌다.


 

 

계절들


 

어렸을 때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늘 겨울이랬다. 지금은 여름을 훨씬 좋아하지만, 그 때는 겨울이 좋았다. ‘겨울에 태어나 겨울을 좋아한다’는 말이 마음에 꼭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봄이나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싫었다. 봄가을은 좀 치사하게 느껴졌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꽃이 피거나 낙엽이 지고, 훈훈하거나 선선하거나, 둘 다이기까지 하니까. 그래서 나는 한 번도 봄이나 가을을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꼽은 적이 없다. 여름이나 겨울, 둘 중 한 쪽의 손만을 들어주고 싶었다.


엄마는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항상 가을이랬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낙엽이 있고 선선해서. 내가 가을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이유들이 그대로 엄마에겐 좋아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래, 실은 알고 있었다. 가을은 정말... 완벽에 가까운 계절이라는 것을. 그나마 봄에는 미세먼지라도 있지, 가을은 하늘도 높고 푸른데다 열매까지 무럭무럭 자라나지 않는가.


그렇지만 가을에게도 마땅히 미움을 받을 만한 이유가 딱 하나 있다. 바로 방학이 없다는 것. 가을방학은 그래서 가을방학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가을을 더욱 완벽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photo-1509120547364-af6ee7a3e9cb.jpeg

 

 

 

어린 날의 가을방학



언젠가부터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에서 익숙했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언니에게 물어보니 “계피가 가을방학으로 옮겨 가서 그래. 너도 들어봐. 가을방학도 좋아.”라고 했다. 계피를 따라 듣게 된 가을방학의 노래는 브로콜리 너마저와는 사뭇 달랐지만, 다르게 좋았다. 그 뒤로 내 MP3 재생 목록에서 가을방학은 한참 동안 머물렀다.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와 ‘여배우’로 완성이 된 풍경들이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몇 있다.


내가 그 노래들을 들을 때는 너무 어렸다. 다섯 살 터울이 나는 언니 덕에 보통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잘 접하지 않을 것들을 많이 보고 듣고 지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내용들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사들은 매끄럽게 귀를 타고 들어와 다른 쪽 귀로 흘러 나갔다. 그만큼 어렸던 내 마음은 너무 작아서, 흘러 나간 뒤 남는 것들만으로 차고도 남았다.


언제나 약간 텁텁한 나무냄새가 나는 할아버지네 집에서 말 모양을 한 나무 옷걸이(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위에 걸터앉은 채로 들었던 노래들. 걸터앉은 채로 가을방학의 노래를 들을 때면 늘 약간 멜랑꼴리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아직 너무 깊고 넓고 먼 마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여배우’가 나올 때는 꼭 무릎을 안은 채 웅크려보곤 했다.

 

가사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그저 계피의 목소리에만 마음을 한껏 곤두세웠다. 그의 음색은 어떤 것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이 많이 듣는 아이돌 노래와도 달랐고, 엄마 차에 있는 시디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도 달랐다. 굳이 닮은 걸 꼽으라면 교실 창가에 앉아서 올려다보았던 하늘이나 미술학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먼저 마중을 나오는 묘한 물감 냄새. 계피의 목소리는 그런 것들과 닮아있었다.


해체 소식을 듣고 가을방학의 노래를 오랜만에 들어보았다. 잊고 지낸 줄 알았는데 막상 노래를 들으니 가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 뒤로 가을방학의 노래를 듣는, 어린 내가 보았던 풍경들이 줄줄이 따라왔다. 어떤 노래는 한 세월이 되어버린다. 그 시기에 만났던 사람, 문장, 마음들 사이사이에 마치 유자청의 설탕처럼 켜켜이 스민다. 스며들어서 떼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무서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일은 기억의 얼마간을 그들에게 내어주는 일이다.


그렇기에 가을방학의 해체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아팠다. 그런 가사를 쓴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게 충격이었다. 내가 느꼈던 마음들이 지저분해진 것 같았다. 내가 가을방학의 노래를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때 누군가는 그토록 아파했으리라는 생각에 죄책감까지도 들었다. 어찌되었든,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가을방학을 들을 수는 없었다.

 

 


계피의 가을방학


 

지난 3월 9일, 계피의 인스타그램에 게시글이 하나 올라왔다. 해체를 알림과 더불어, 계피를 걱정하고 함께 아파했던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 지나온 발자취를 어떤 방식으로 간직해야하나 생각해왔습니다. 언젠가 한번 공연에서 말씀드린 적도 있네요. 제 결론은 그때와 같습니다. 누가 곡을 썼든 제가 불렀다면 저의 노래입니다. 부족한 부분도 많았지만 최선을 다해 한 인간으로서 제 경험과 감정을 담아 노래해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목소리와 가수로서의 제 표현방식을 좋아했습니다. 커리어를 떠나 그것이 저의 삶이었습니다. 가을방학이 사라진다고 해도 저의 커리어가 사라질 뿐 제 지나온 삶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쓰고 누가 불렀든, 노래로 위안 받았던 순간의 기억은 무엇에도 침범 받지 않을 오로지 여러분의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어떤 노래는 한 세월이 되어버린다. 유자청의 설탕처럼 스민다. 계피는 설탕을 털어내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그만두라고, 괜찮다고, 그건 당신의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같은 노래를 듣더라도 삶에 스며드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어두운 날을 지나던 누군가에게는 위안이 되어주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날을 지나던 누군가의 사랑은 더욱 선명해졌을 것이고, 인연의 끝자락에 선 날을 지나던 누군가는 떠나거나 보낼 용기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오롯이 삶이었다. 계피는 우리를 지난 삶과 마주보게 해주었다.

 

한 가지 사실이 더욱 선명해진다. 계피가 부르지 않았더라면 가을방학의 가사들은 이렇게나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들었던 가을방학은 전부 계피의 가을방학이었다.


가을이 막 시작될 즈음 찾아왔던 가을방학은 어느새 봄 냄새가 바람에 섞여 들기 시작한 3월의 초반에 막을 내렸다. 계피는 게시글을 올리며, ‘10년이 넘게 노래를 통해 위로를 건네온 사람의 자격으로 말씀드려봅니다.’ 라고 했다. 누가 감히 그의 자격을 부정할 수 있을까. 계피는 가을방학 그 자체였는데.

 

 

SE-198ae191-b70c-42fc-99e8-a4e36f7dacb4.png


 

많은 것들을 마주하게 되는 봄이다. 계피가 마주한 봄이 부디 그에게 상냥했으면 좋겠다. 계피가 가을방학의 지난 노래들을 자신의 노래라고 해주어서 정말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계피의 노래를 듣고 싶다. 정말로 오래오래.

 

 

[송세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3
  •  
  • e
    • 이 글을 읽고서 저도 오랜만에 가을방학과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를 꺼내서 듣고 있어요. 누군가가 사랑하는 가을을 더욱 완벽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가을방학이 되었을 거라는 말이 참 좋아요. 또 마주하게 될 가을에, 가을방학이 또 후에 추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져와주길. 좋은 글 감사해요!
    • 1 0
  •  
  • 진금미
    • 평소 어떤 연예인의 구설수에 그의 팬들이 가슴 아파하는 걸 옆에서 지켜봤을 땐 머리로는 이해됐지만 가슴으로 공감하진 못했는데 가을방학 일은 그들의 음악을 사랑했던 청소년 시절을 모두 부정당한 것 같아서 후유증이 컸어요. 계피님의 인스타그램 게시물과 에디터님의 오피니언으로 다시 가을방학을 사랑했던 시절의 저를 보담아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문장들이 참 많았는데 "좋아하는 일은 기억의 얼마간을 그들에게 내어주는 일이다." 이 문장이 특히 마음에 와닿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1 0
  •  
  • 시나몬
    • ㅠㅠㅠ 와...! 오래도록 가을방학 노래를 들어오고 계피 언니의 목소리를 좋아한 사람으로 위로가 되는 글이었어요. 마음을 담은 좋은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