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폭풍이 몰아치는 섬에서 살아남기 : 보이지 않는 것들

무언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글 입력 2021.03.2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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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초반부에 했던 생각은 ‘이런 책 오랜만이네.’였고,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런 책은 처음이네.’였다.


오랜만이라고 한 것은 최근에 읽은 책들은 대개 한국 문학이었기에 낯선 외국이름과 지명이 등장하는 소설은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고, 섬에 홀로 고립되어 사는 가족의 모습이 어쩐지 예전에 읽은 소설 ‘트리갭의 샘물’속 영원한 삶을 사는 터크 가족처럼 잔잔하고 쓸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으며 느낀 것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잔잔한 호수가 아닌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살았고,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나이 든 할아버지, 어딘지 특이한 고모, 다정한 부모님과 사랑스러운 어린 딸의 이야기가 이리도 치열하다니. 이런 이야기는 본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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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빠르게 속독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데, 이번 책은 그럴 수 없었다. 며칠을 끙끙대며 겨우 읽어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어려웠고, 문장과 주인공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내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이해를 포기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과 인상적인 표현들을 표시해뒀는데, 그 부분을 다시 읽고 글로 쓰며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책을 읽게 된다면 나와 같은 곳에 멈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듣고 싶다.

 

 


들어가기에 앞서 : 바뢰이 가족 이해하기



바뢰이섬에는 바뢰이 가족만이 산다. 섬은 그들만의 왕국이고, 그 왕국에서 그들만의 지혜로 살아간다. 가족의 구성원이나 모습은 얼핏 보면 정말 평범한 가족 같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다. 물론 평범치 않다는 것은 내 기준에서다. 그들의 기준에서,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는 그것이 평범한 사고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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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말고 친구에게 대강의 사건을 몇 개 늘어놓자 친구가 좀 이상하다며 도대체 무슨 내용인거냐 웃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대손손 이 섬에만 살았잖아. 이 섬의 생활밖에 모르고, 앞으로도 계속 여기에 살아야 하는 거란 말이야..’하며 바뢰이 가족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황을 대입하면 조금 이상한 사고방식은 대개 이해가 되었다.


 

섬의 철학자인 마리아는 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다른 섬에서 온 터라 비교 대상이 있기에 이런 걸 경험, 더 나아가 지혜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점은 또한 바라보는 시선 혹은 섬이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정신분열을 가져다줄 수도 있었다.

 

- 28p

 


바뢰이 가족 중에서도 감정을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섬의 가장 한스의 부인이자 유일하게 다른 섬에서 온 사람이었다. 대대손손 바뢰이섬에 살아왔던 한스와 그의 아버지 마틴, 바뢰이섬에서 태어나 이곳만을 보고 자라온 어린 딸 잉그리드는 알지 못하는 세계를, 마리아는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대개 현명하고, 다정했지만 가끔은 지나치게 무기력하고 예민했다.

 

그럴 때면 또 다시 ‘유일하게 다른 섬에서 온 마리아, 남편과 딸을 사랑하지만 남편의 지나친 ’애향심‘에 지치기도 하고, 남편의 가족들을 돌보는 것이 지겹기도 하겠지. 아이를 더 낳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상황에서 오는 상실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되새기며 읽어야 했다.

 

 


제 1장. 폭풍이 몰아치는 섬



 

“폭풍은 널 해치지 못해.” 한스가 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중략) 한스는 섬이 절대 좌초하지 않는다는 기본 원칙을 가르쳐야 했다.


훗날 잉그리드는 그날 밤이 얼마나 이상했는지 되돌아보며 절대 잊지 못할 거라고 말할 테지만, 폭풍우가 지나가고 한참 뒤의 일이며 그제야 확실하게 섬이 모래알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 60p

 


어린 딸을 데리고 폭풍우가 치는 바다로 나가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 어린 잉그리드는 맹렬히 비를 쏟아 붓는 하늘 아래 거친 비바람을 맞고 강을 헤치며 폭풍을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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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폭풍에도 섬은 굳건했고, 그들은 그 섬의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잉그리드는 그날 일을 통해 자신이 어떤 곳에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장면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그날 부녀가 힘겹게 집으로 돌아오자 마리아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중략) 한번만 더 미친 생각을 했다가는 이혼한 뒤 여길 떠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이런 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잉그리드는 처음으로 그 말을 이해했다. 섬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 60p

 


잉그리드는 자신이 어떤 곳에 살고 있는 지를 자각함과 동시에 섬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린 잉그리드는 엄마가 이곳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속상해 울었지만 ‘섬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은 잉그리드가 조금 더 큰 후 그에게 또 다른 선택지가 되어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 2장. 이방인이 훔쳐간 것



 

섬에서 빼앗긴 것은 아무것도 없고 훔쳐 가거나 부서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방인은 그들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앗아 갔다. 잉그리드는 이방인이 쳐들어온 날 그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서 주방을 나온 사람들과 그냥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반응한 방식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 140p

 


섬은 오로지 그들만의 성이었다. 가끔 미사를 보러오는 목사나 노동자들이 일을 도우러 오곤 했으나 낯선 사람이 섬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온 이방인은 집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한스의 의자에 앉아 먹을 것을 요구했다. 이방인은 제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당당했지만 가족들은 그저 떨기만 했다.

 

한스는 이방인을 죽이려 했으나 그는 도망갔고, 잉그리드는 마리아에게 그가 돌아올 지를 물었다. 마리아는 아니라고 답했지만 잉그리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방인이 이 섬에 와서 가족들이 가진 줄도 몰랐던 무언가를 빼앗아 갔다.’

 

이 표현은 몇 번 더 사용되며 잉그리드가 변화를 실감하는 순간을 담아낸다. 이방인의 침입으로 그들은 섬이 그들만의 요새가 아님을 깨닫고, 그들만이 존재하는 것 같던 세상에 타인이 존재함을 실감하게 되지 않았을까.

 

 


제 3장. 어른이 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만 남자 섬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바브로까지. 바브로는 결코 완전한 어른이 될 수 없었다. 조금 그렇긴 하지만. 한편 잉그리드는 어른이 된 지 10년이 되었다. 라스는 태어난 이후 쭉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 이 섬에는 어른 셋과 아이 둘이 살고 있다.

 

- 244p

 


잉그리드는 열두 살 이미 섬의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무를 자를 수 있었고, 소젖을 짜고, 물고기를 잡아 내장을 가를 수 있었다. 남자가 하는 일이든 여자가 하는 일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섬에서 그건 어른이 됐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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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뢰이섬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누구든 일을 해야 했다. 생존은 아이들을 어른으로 만들었고, 그건 본토에서 온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본토에서 양말 하나 제대로 신지 못하던 일곱 살 펠릭스는 바뢰이섬에 오자 부지런히 라스를 따라다니며 토탄을 캘 수 있게 되었고, 걸음마도 떼지 못한 세 살 수잔은 바뢰이섬의 토지에서 바지런히 걸으며 오리털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일을 할 수 있게 된 아이들은 어른이 된 듯 행동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로 어른이었을까?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면 어른이 되는 걸까? 본토로 일을 하러 떠난 잉그리드가 울고 싶어져 다시 섬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여전히 미성숙한 모습들은 계속해서 고개를 내밀겠지. 그럴 때마다 발전을 거듭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잉그리드가 섬에서 부모님을 보며 배우던 시간들은 잉그리드를 어른처럼 보이게 만들어주었을 것이고, 앞으로 잉그리드가 쌓아갈 시간과 경험들이 그를 어른으로 만들어 줄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른인 동시에 아직 어른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 4장. 침묵



책을 읽으며 기억나는 네 번의 침묵이 있었다.


넬리의 침묵, 한스의 침묵, 섬의 침묵, 그리고


잉그리드의 침묵.


 

“아무것도 아니야.” 바뢰이의 여왕이 말했다. 잉그리드는 자신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 저어 주는 배를 타고 왕국으로 향하고 있으며 계획이 실행되기 전까지 그들은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잉그리드는 그걸 아빠한테 배웠다. 침묵. 기적을 부르기도 하는 침묵을. 봉투에 들어 있는 증권과 사본들. 아니, 잉그리드는 그걸 엄마에게 배웠다. 그런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264p

 


잉그리드는 침묵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처음 그가 침묵을 배운 것은 학교 친구인 넬리에게서였다. 넬리는 남들의 오해에 변명하는 대신 입을 다무는 아이였다.

 

잉그리드는 학교생활에 지쳐 울음을 터뜨리고 속이 타들어가는 듯 아팠지만 넬리에게서 배운대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그것은 부모님을 안심시켜줄 터였다.


한스 또한 곧잘 침묵했다. 그는 실행으로 옮기기 전까지 입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고, 그건 그가 원했던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

 

나는 이들의 침묵이 썩 긍정적으로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침묵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나는 이들의 침묵이 섬의 침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섬의 침묵은 아주 드물었다. 침묵은 드물게 찾아왔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았고, 아무도 그 침묵을 기억하거나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침묵이란 찰나의 죽음의 순간에 불과했다.


그랬다. 아무도 침묵에 강한 인상을 갖거나 기억해주지 않았다. 침묵은 스스로 인내하는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강인하고 독립적인 섬사람들에게 침묵은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었겠지만 나는 침묵이 없었더라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이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잉그리드가 학교에서의 힘듦에 대해 털어놓았다면?

마리아가 아이를 많이 갖고 싶다는 얘기를 했더라면?

한스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가족과 나눴더라면?

이방인의 침입에서 얻은 상실감을 함께 나누었더라면?

 

더 나은 섬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나만의 가정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진작 울지 않은 걸 후회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제 5장. 보이지 않는 것들



잉그리드는 어린 날 한스에게서 배운 대로 부딪히는 파도를 위험이나 위협으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의 수단이자 해결책으로 보는 바다의 딸이었다.


섬의 어린 딸에서 어엿한 일꾼으로, 바깥 세상에 나간 철부지에서 섬의 주인으로. 잉그리드는 섬의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성장해갔다.


섬의 주인으로서 모든 결정을 도맡게 된 그에게는 앞으로도 수많은 시련이 닥칠 것이다. 견디기 힘든 폭풍우가 몰아치고, 누군가 죽어나고, 낯선 이가 침입하기도 하고. 하지만 잉그리드는 끝까지 생존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지키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휘말리면서도 빼앗기지 않으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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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뢰이 가족의 이야기다. 이 책을 다 읽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가상의 섬에 사는 가족의 이야기지만 결코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 가족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언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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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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