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직장인 극단, '거울'의 향기 - 연극, 도덕적 도둑 [공연]

친구의 연극을 찾아가는 길
글 입력 2021.03.2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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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3월 21일. 일요일인 어제는 갑작스레 찾아온 추위에 당황스러운 하루였다. 린넨 셔츠 위, 살폭 얹은 코트 한 장으로 가리기엔 바람에 언뜻 날이 서 있었다. 패딩을 전부 창고에 박아두었거니와, 근래의 날씨로 미뤄보건대 덥기만 무던 더우리라는 심산으로 일기예보를 찾지도 않은 것이다.


아 왜, 한국인이 멋 부리기 좋은 날씨가 그리 적다고들 하지 않던가. 근래 기온은 17도 근처에서 자맥질하고 있었으니, 더구나 나로선 매일 집과 스터디카페만 오다니느라 차려입을 일도 좀체 없었으니, 벼루던 간만이라는 생각이 참 급하기도 했다.


21년 3월 21일. 아직 입속에 굴려보아도 착 감기는 맛 없어, 남의 것 같이 영 낯설기만 한 어제는 내 친구의 연극 막공 날이었다. 직장인 극단 ‘거울’ 제1회 정기 공연, 연극 ‘도덕적 도둑’의 마지막 공연날.

 

날은 무지하게 추웠고, 바람도 빈 거리를 세차게 돌아다니느라 황량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극장이 있는 한성대입구역은 또 한산하여 가는 길의 어딘가 벌써 섭한 기분을 주워 올리었다. 친구의 공연을 찾아가는 한산한 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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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희선의 공연, 이 말이 꽤 진득허니 맘에 달라붙는다. 다른 친구들 여럿과 꽃을 고르고, 아마 희선이가 노란색을 좋아했더랬지 하며 말 추렴을 붙이고, 극장을 찾아가는 이 일은 별것 없이도 퍽 새삼스러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치들과 알게 된 지도 정신을 차려보니 훌쩍 2년을 넘기었구나. 취업 특강을 듣다가 덜컥 친해진 것이 이제껏 흘러온 것도 용하다면 용할 것인데, 개중 한 명이 이제는 연극을 한다니… 이렇듯, 친구의 연극을 찾아오는 길에는 비단 연극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나로선 줄곧 새삼스러울 따름이다.


한성대입구역 7번 출구 근처, ‘놀터예술공방’에서 토/일 양일간 연극은 무대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지하에 안긴 작은 소극장, 언제건 소극장의 좁은 객석은 나를 잠깐 행복하게 한다. 좌석과 바닥 사이는 가까워 앉으면 무릎이 살짝 들리는, 이제 팸플릿을 든 손을 살짝 들린 무릎 위로 반대편 손과 맞잡으면, 소극장 연극을 보기 가장 편안한 자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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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도덕적 도둑’은 다리오 포의 희곡이다. 여러 등장인물 간의 불륜과 거짓 통에 도둑이 가장 도덕적 위치에 오르는 아이러니를 다룬다. 진지하게 도덕적 딜레마를 다룬다기보다는 역설과 희화를 통해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 장르다.


무대에는 검은 벽과 검은 오브제 위, 색색들이 분필로 칠한 몇 소품들이 자리했다. 분필로 그린 괘종시계가 유독 인상적이다. 이제 암전 속에 도둑이 이 집에 잠입하는 것으로 극은 시작한다. 실컷 물건을 훔치다가 들이닥친 집주인을 피해 괘종시계 안에 숨은 도둑, 아내 몰래 상간녀를 집에 들인 집주인 프라초시, 결국 이뤄진 삼자대면.

 

극의 흐름은 무던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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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를 들켰다고 생각한 시 의원 프라초시와 상간녀 줄리아, 그리고 집을 털다가 들킨 도둑의 삼자대면 씬은 본 극이 제목에서부터 드러내고자 한 핵심 주제가 형성되는 장면이다.


총을 쏘아 죽이자니 도둑에게는 무기도, 무력 저항의 의지도, 도주 의지도 없었기에 살인죄가 적용되고, 더구나 자신이 현장에 있었음을 알리게 되어 아내에 대한 거짓말이 들통 나는 꼴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자니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기에 그럴 수도 없는 노릇, 프라초시는 딜레마에 빠진다.


도둑이 등을 돌려 도망치지 않는 한 총에 맞아 죽을 일은 없다. 즉, 도둑도 등을 돌려 도망갈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에 도둑은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자는 말을 스스로 꺼내지만, 도둑을 아내의 정보원으로 오해한 프라초시는 그의 진술이 두려워 거절한다.

 

시 의원인 프라초시에게는 잃을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자신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깊은 딜레마에 빠져 아무런 선택을 내릴 수 없게 되어버린 프라초시와 줄리아,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도둑의 가벼운 당당함이 대비되며 앞서 말한 역설, 도덕적 도둑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


물론 도둑의 이러한 행동을 도덕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크나큰 어폐가 있다. 그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뉘우치게 만들 계기가 없었고, 그러한 도덕적 인과로써 경찰에 자진 신고하려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다만 잃을 것이 적은 사람이, 딜레마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더욱 선택과 결단을 내리기 쉬운 것일 따름이었다. 도둑질과 불륜 간의 도덕적 위상 차이가 아닌, 빈자와 부자 각각 잃게 되는 것의 많고 적음에서 사건과 주제는 피어났다. 그것이 남의 집에 침입한 도둑에게 도리어 당당한 모습을 부여했고, 여기서 해학이 발생한다.


이 부분을 기점으로 극은 막힘없이 코믹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제 도둑의 증언이 효력 일체를 갖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취하게끔 비싼 위스키를 건네고, 함께 마시고, 그 과정을 도둑의 부인이 오해하고, 프라초시의 아내가 급하게 귀가하게 되고, 거짓이 거짓을 낳고 더욱 큰 딜레마에 빠지고…

 

이렇듯 극은 무난하고 막힘없이 흘러간다. 시원한 전개 속, 연기자들의 모습들은 무리 없이 넉넉한 웃음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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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콩떡 찰떡같은 캐스팅이었다. 내 친구 희선이는 특히 캐릭터에 잘 녹아들어 있더라.

 

애초 인간 ‘희선’과 캐릭터 안나가 가지는, 외적 특성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았던 덕이리라. 쁘띠 브루주아 근성을 풀풀 풍기며 은근하게 사람을 업신여기는 캐릭터인 안나와 인간 희선의 성격이 같을 리야 추호 없지만, 희선이의 풍부한 비음과 얼굴 표현은 안나에 딱 맞았다.


다른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이다. 배우와 캐릭터가 무리 없이 융화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각자의 캐릭터와 롤을 숙지하고 체득하는 데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것들은 배우들의 마스크 위에 편안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무대 위에서 커튼콜을 하는 저들의 모습에서, 직장인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내게는 그것이 하냥 신기하였다. 연기의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야 물론 이따금 인간적인 느낌을 받기도 하였지만,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고 느껴오는 것이란 그들에게서 풍기는 아렴풋한 배우의 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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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연극이 아닌, 직장인 극단의 연기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연극, 나는 어쩜 투박할 그들의 연기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드리우는 것을 내려놓는 대신으로, 그 속에서 그들의 본디 모습을 찾고 있었다. 직장인으로서, 같은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말이다.


아트인사이트 활동을 하며 관극도 제법 해보았다만, 직장인 극단의 연극에 대해서는 일전과 다른 감상을 품게 됨을 느낀다.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무대 위의 여러분을 바라보며, 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 즉 직장인이었을 여러분의 모습을 나도 몰래 찾고 있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그 모습은 이미 지워져 있었음을 발견한다.


친구 희선이의 연극, 극장을 찾은 우리는 그 안에서 익히 알고 있던 희선이가 아닌 누군가와 만난다. 연극을 마치고 난 무대 위에서, 캐릭터도 직장인 희선이도 아닌 누군가를 보았다. 그렇다면, 그건 아마 배우 박희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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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위의 캐치프레이즈가 크게 와 닿는다. 그들은 연기를 배우며, 캐릭터를 이해하고 모사하며, 직장인이 아닌 또 다른 자기를 찾아간 것일까. 그렇다면 관객인 나로서는 성공한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들, ‘직장인 극단 거울’의 행보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쩜 이번이 마지막일 지도, 혹 어쩜 앞으로도 계속이 이어질 지도. 그렇게 만약, 그들의 연기가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된다면 어떨까. 직장인과 배우로서의 자신을 모두 안고서 그들의 삶이 익어간다면. 더욱 다채로운, 여러 향기의 ‘나’를 풍기어주진 않을까.


그래서, 먼 훗날 다시 여러분의 연극을 찾아오고 싶다. 그때엔 어떤 모습과 향기를 풍기고 있으실지. 나는 이제 질문을 남기고, 여러분께서 언젠가 내게 대답해주시길 기대하며 글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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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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