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를 키운 시와 선으로부터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3.1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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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완성하는 것은 사실 나무가 아니라 나무들 사이의 공간이다.

 

그들 사이의 공백은 나무들이 서로의 생장을 돕기 위해 자연이 선사한 우연이기도 하다. 인간의 간 자도 사이 간(間) 자를 쓴다. 한 인간의 생을 숲으로 비유하자면 우리는 그 생에 놓인 굵직한 나무줄기와 이파리들에만 시선이 빼앗기곤 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피상적인 사건들 '사이'의 무언가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선택이 산적해 역사가 되었고, 우리 개개인의 숲을 키워온 것은 바로 이 역사이다. 물론 우리 역시 좋든 싫든 역사가 된다. 하나의 숲을 소유한 동시에 타인의 숲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 <시선으로부터>가 꼭 그렇다. 서로의 그늘이 햇빛을 가리지 않도록, 적절한 간격을 두고 씨를 뿌린다. 세심하고 조용한데, 또 기분 좋게 요란하다. 숲이 크는 소리가 생생히 들릴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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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이라는 독특한 여성을 축으로 전개된다.

 

심시선은 제사 문화에 강경하며 남성 패널들의 비난에 맞서는 속칭 '기 센 여자'로, 유명 남성 화가 '마티아스'의 누드 모델이자 뮤즈로, 저를 사랑해준 남자를 죽여버린 메데이아의 화신으로, 그리고는 보기 좋게 재혼한 여성 예술가로 기억된다. 이것이 타인의 눈에 비친 심시선이라는 숲의 줄기들이다.

 

그러나 그의 딸과 손녀들은 심시선의 '사이'를 알고 있다. 시선에게서 물려 받은 시선으로부터 이를 꿰뚫을 수 있는 눈을 얻은 여성들이다. 그들은 굵은 나무 줄기 사이에 놓인 공백에 대해 생각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역사 그 자체가 된 여성, 실은 마티아스라는 '유해한 남성성' 뒤에서 이를 악 물어야만 했던 여성, 먼저 떠난 여성들의 죽음의 기록관을 자처했던 여성, 가장이 되었을 때 그 불편한 특수성을 파괴하고자 했던 여성, 20세기의 현장을 말과 글로 엮어내고자 했던 여성, 이를 바탕으로 20세기의 '시선', 그 자체가 되어온 여성. 그것이 가족들이 찾아낸 심시선의 '사이'이다.

 

이 묘사들은 어딘가 낯설지만은 않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초상이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이름도 잊은 여자들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중략) 낙과 같은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 삼아 다음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中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20세기를 살아온 여자들과 21세기를 살아가는, 계속해서 살아갈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시선은 생전에 제사 문화를 비롯한 봉건적 제도들에 대해 강경히 반대했고, 따라서 가족들은 그의 10주기에 아주 독특한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이는 심시선 여사가 젊은 날 머물렀었던 하와이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고, 그를 추억할 만한 무언가를 하나씩 찾아오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섬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소설 속 인물들은 젊은 심시선의 궤도를 따라간다.

 

그들은 심시선 여사의 문장이 내뿜는 숨결이 한데 모인 것 같은 하와이를 만끽한다. 그리고 20세기를 버텨온 여성으로서의 긍지, 딸과 손녀들에게 21세기의 특수성과 일상성 모두를 선물한 뿌리로서 그녀를 기억하게 된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그런 '사이'에 대한 얘기이다.  20세기와 21세기의 사이, 딸과 엄마의 사이, 캔버스 면과 물감의 사이, 마침표와 다음 문장 말머리 사이에 대한 이야기.

 

빛은 나뭇가지 사이로부터 들어온다. 이 모든 발견이 심시선이 우리에게 준 새로운 '시선으로부터' 비롯된다. 삶은 조금 더 견딜만해 진다. Welcome to Paradise, 하와이 곳곳에 붙은 표어가 마냥 간지럽지만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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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의 세계관 안에서 살고 싶다. 판타지 소설도 아닌 데다 눈 시릴 정도로 현실적인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소설만이 가진 독특한 삶의 향기가 있다. 심시선 딸들의 사이를 비집고 앉아 하루가 멀다 하고 아무도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 예술과, 내가 사랑하는 일과 사람들, 맛있는 음식과 하와이 바다의 청량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21세기의 폭력성이 그저 우리 때에만 고이기를 바라며 자꾸만 그 '사이'들을 발굴해내고 싶다.

 

그 시선을 얻기 위해서 이 책을 몇 번이고 다시 펴보게 될 것 같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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