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사랑하는 정세랑 월드 [사람]

그녀가 선사한 어려운 낙관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글 입력 2021.03.1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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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계는 왜 이렇게 차갑지?”

 

SF소설에서 콘크리트로 가득한 인류 문명에 처음 손을 댄 외계생명체가 놀라며 읊을 것 같은 문장. 이 문장은 놀랍게도 인간인 내가 갓 스물이 되었을 때, 혼자 자주 되뇌던 말이다. 고등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가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 직종에서 일하며,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자취방을 구하며 대학생이 된 내가 늘 하던 말이었다. 그때 당시 내게는 의문이 두 개가 존재했다. 첫 번째, 세상은, 아니 세상의 인간들은 왜 이렇게 차가울까. 두 번째, 왜 아무도 내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는가.

 

그 당시 내가 느낀 세상은 너무 차가웠다. 버스 기사님은 왜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버스에서 느리게 내린다고 소리를 지르는지, 왜 호명 권력을 가진 사람이 유머의 주인공이 되는 당사자에게는 불편한 농담을 끊임없이 하는지.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 할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인 것을 대체 왜 모르는지. 왜 뉴스 댓글 창은 죄다 악플인 것이며 늘 곳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세상에 저지르는 처참한 뉴스가 도사리고 있는지. 왜 무리한 요구와 무례한 대화를 수용하다 보면 더욱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되는지. 언제나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그것이 고등학생으로서 학교라는 울타리 안을 벗어나 온전히 만난 세상의 첫인상이었다.

 

때로는 타인이 세상을 대변하기도 한다. 운 좋게도 내 곁의 사람들은 언제나 다정했으며 난 그들의 따뜻함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렇기에 과거의 나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꿈꾸고 있었고 그것은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울타리 넘어 다시 본 세상은 척박하고 참혹했다. 차라리 세상에 애정이 없기를 바랐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자이의 문장에 감복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신을 예민하다고 치부하며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을 천착하려고 애를 썼지만 나는 직시할 용기도 없으면서 신세 한탄이나 하며 내 위치도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 점철된 의문에는 간혹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가 슬픔을 느낄 때, 나는 그 슬픔을 똑같이 느끼고 싶었다. 사람들의 욕심으로 처참하게 벌어진 사건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싶었다. 그들의 고통을 알아주고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싶었다. 인식이 곧 위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나는 그들과 똑같이 느낄 수가 없는지, 왜 그런 순간에도 사소한 농담에 웃음이 나오는지, 왜 밥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잊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일상의 순간에서는 왜 그렇게 자주 잊고 살아가는지. 이 마음마저도 위선이 아닌지. 내 바쁜 삶을 돌보기 위해서라는 말은 핑계일 뿐이었다. 왜 나를 포함하여 인간 자체가 왜 이리도 이기적이며 위선적인지, 이 맹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내게 필요한 것은 세 가지가 있었다. 그래도 살아 볼만 하다는 이유를 발견해낼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지 않고서도 살아지겠지만 나는 세상이 아직은 아름답다고 믿지 않고서는 도무지 버티지 못하는 유약한 사람이기에, 어떻게든 내가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아름다운 세상을 증빙하는 자료가 몇 개 필요했다.

 

첫 번째는 친절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믿음이었다. 두 번째는 세상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문제를 제기하고 직시해야 변화가 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않으며 계속해서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해야 했다. 세 번째는 순수함이었다. 부와 명예, 타산과 체면과는 관계없이 단순히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아직은 있다고 믿을 만한 것이 내겐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을 아울러 표현할만한 말은 하나뿐이었다. 사랑이었다. 사랑이 곁에 있을까. 아직 있을까.

 

 

 

세랑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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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이 세 글자가 답이 되었다. 완연한 답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답을 찾을 수 있는 거점이 되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 이상하게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지배했다. 가볍게 읽히는 얇은 소설이더라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에는 꼭 그랬다. <시선으로부터> 소설 속 문장을 빌려, 사교성 좋은 코뉴어 앵무새처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꾸만 반복해서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졌다. 이유가 무엇일까.

 

 

“세상은 참혹할 정도로 폭력적인 곳이지만, 오늘 내가 울며 기댄 어깨는 친절하고, 어딘가엔 이런 사람들이 더 있겠지. 좋은 사람들에 대해 써야지. 그러면 세상에 그런 면이 미미하게라도 반영되지 않을까, 하고요.”

 

<릿터> 16호 105p 중 정세랑의 문장

 

 

그녀는 참혹한 세상을 누구보다 또렷이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녀가 직시한 세상은 소설 속에 녹아들어 날카롭게 현실을 고발한다. 섬세한 감수성으로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그렇기에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그 문장으로 인해 소외된 사람이 있는지 살핀다.

 

그녀의 세계에서 로맨스는 단순히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 아닌, 인종과 성별, 그리고 한 행성까지 초월한 무정형의 사랑이며 친절은 결코 추락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며 단단하게 존재하는 세상에 지지 않고 목소리를 낸다. 애도할 것들은 잊히지 않으며 기록관은 사명감을 가진다. 이러한 시선들은 그녀의 글 속에 녹아있다.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 <보건교사 안은영>의 산재 노동자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 법들은 유가족이 만든 거야.” - <피프티피플>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 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 <보건교사 안은영>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 <시선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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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이 선사하는 어려운 낙관


 

정세랑은 책을 읽는 독자들이 어려운 낙관을 얻어갔으면 한다고 인터뷰했다. 낙관이 너무 쉬우면 거짓말이 되고 너무 절망하면 현실이랑 다를 바가 없으니까 좀 어렵게 얻어지는 낙관을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장애물투성이의 어려운 길이기에 원하는 세계에 누구도 빨리 도달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나아가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나 또한 그녀의 청량하고 경쾌한 문장 속에서 어렵사리 낙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친절한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가 세상 구석구석에 가닿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부지런히 의문을 제기하고 연대의 물결이 일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울며 기댔던 어깨들 또한 친절하고 따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완전한 타자에게 선물 받은 차 한잔이기도, 무해한 인사말이기도, 오래전에 받은 편지 몇 통이기도 했다. 나는 그 친절을 받았기에 다시 그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날만을 생각하며 변화해갔다. 정세랑 덕분에 그 사실을 복기할 수 있었고, 나를 지켜줬던 친절한 어깨들에 대해 부지런히 말해야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정세랑의 세계는 우리를 지치지 않게 한다. 참담한 현실에 잠시 멈칫했다가도 그녀의 소설을 몇 장 넘기다 보면 포만감에 든든해진다. <시선으로부터,>에서 화수가 먹은 팬 케이크처럼 마음의 책장에 차곡차곡 그녀의 문장들이 쌓인다. 달달하고 따뜻한,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경쾌한 밀도로 쌓인 문장들은 지치지 않고 살게 하는 양분이 된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달관하지 않는다.

 

 

 

에디터로서의 글쓰기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를 지원하며 호기롭게 적은 문장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 것은 정세랑 덕이 크다. 에디터로서 어떤 글을 쓸지에 대해 생각했다.

 

출처 없는 해맑은 사랑이 아닌, 참혹한 세상을, 그 어두운 그림자를 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그래도 여기 친절한 어깨가 남아 있음을 널리 알리는 사람. 자신의 틀에 갇히지 않고 놓친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사랑하기로 선택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으니만큼 그 사랑의 씨앗을 최대한 넓게, 보이지 않는 곳까지 공평하게 뿌리는 사람. 그것이 뿌리내리고 자라지 않더라도 의연하게 다시 되돌아와 또 한 번 씨앗을 뿌리는 사람. 존엄하기를 선택한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공감과 이해, 연대와 이타성으로 빚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효율적인 것이 이야기라고 그녀는 말한다. 나 또한 그녀처럼 지금 이 시대만큼 이야기가 절실히 필요할 때는 또 없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는 덧붙인다. 지구 곳곳에 더 다양한 바탕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만의 바탕을 가지고 글을 쓰면 좋겠다고.

 

그녀가 선사한 문학에 감응한 사람이니만큼 잘 쓰지는 못해도 계속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만의 바탕을 가지고.

 

나도 말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계속 쓰고 싶다.

 

 

[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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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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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msj0304
    • 어디터님의 글을보고 정세랑작가님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듭니다. 
      그러면 좀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않을까요?
      에디터님 덕분에 저도 더 관심을 가지고 정세랑님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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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세나
    • 2021.03.18 03:3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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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msj0304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세랑 월드에 빠지고 나서 세상이 확실히 아름답게 보이더라구요. 그렇다기 보단 아직 어딘가에 있을 한줄기 희망을 찾은 기분이랄까..★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 바람에 환경도 사람만큼이나 중요시되는 세랑 월드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는데ㅠㅠ  세상은 꽤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 무해한 자연이 있기 때문에>인간의 이기심으로 지금은 공짜인 자연이 더이상 공짜가 아니게 되면 어떡하지?> 그래, 나도 정세랑 작가님이 만들어낸 한아가 되어 환경을 조금이라도 생각해야겠다. 이렇게 되드라구요..? 제 의도를 알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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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희
    • 정세랑 작가님 소설 정말 좋아해서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ㅋㅋ 작가님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공감하는 글이 되지 않을까요? 특히 릿터?에 실린 글이 너무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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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세나
    • 2021.03.18 03:3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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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희와..!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쵸ㅠㅠ 저도 릿터에 실린 말이 하나하나가 시 같더러구요. 참혹한 세상이지만 연대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음을, 그리고 참혹한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그 친절한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는 게 저에게는 더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참혹한 세상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또한 그러한 세상에 대해 쓰는 사람들도 다른 곳에서 존재할 테니까, 자신의 역할은 친절한 어깨를 잊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저에게 아름다운 시로 다가왔습니다.. 넘 과몰입러 같긴 한데 팬이시라면 이해하실 것 같아서요 ♥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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