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주목받지 못하는 절망을 쓰기. [문학]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보폭을 살피는 일.
글 입력 2021.03.13 22:0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시대가 바뀌면 독법도 바뀌게 된다. 시대상의 반영이라는 고루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개중에는 시간이 지나도 유효한 독법이 존재한다는 걸 역설하고자 함이다.
 
지금의 시선과 적당한 거리감과 밀착됨을 모두 지닌 김승희 시인의 글은 책을 넘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책을 씹어 삼켜 소화하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나아가 성실한 쓰기로 맺어진 생각들이 그 글에 대한 호오와 관계없이 몸을 통과하는 순간이 있다.

어떤 절망과 고뇌는 사람들이 ‘이미 다 아는 것’이어서 주목받지 못한다. ‘아는 좌절’을 얘기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일까. 김승희 시인은 아는 것에서 모르는 걸 끄집어낸다거나 하는 방법론에 집착하지 않는다. 작품 속에 존재하는 의미와 행간에 자리한 시간의 흔적을 우직하게 적어낼 뿐이다. 그 성실함은 송원경 편집자의 말처럼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절망을 응시’하는 작가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더불어 “문학의 당위를 주장하기보다는 불가피를 고뇌해야 한다고 믿는”(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작가가 김승희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피하게 그곳에 존재하게 된 문학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주목하는, 타인의 희구와 맞춤한 얘기를 적어냄으로써 가능한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문학이 지닌 보폭을 살피는 일이 되어야 할 테다. 여러 해를 지나 다시 이곳에 다다른 ‘문학기행’이 여전히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어머니의 음성같이 옛 애인의 음성같이.jpg

 
 
 
아름다움의 쓸모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언제나 기쁨을 주는 동시에 슬픔과 불안을 안겨줄 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기쁨과 함께 불안을 느끼는 것일세. 그것이 서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영원보다 더 아름다운 것일세."
 
    
나는 여기서 아름다움의 ‘쓸모’를 본다. ‘쓸모’의 쓸모없음에 대해. 그리고 그 쓸모없음의 쓸모를 다시 생각한다.
 
 
“예술이 지향하는 이상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우면서 쓸모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 것은 이 쓸모없다는 것은 ‘지금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의 쓸모를 찾아내는 것이 문화의 발전이기도 하다.”
 
- 황현산,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희극의 조건과 비극의 주변인

     

김승희 시인은 윌리엄 사로얀의 소설 『인간희극 The Human Comedy』의 제목을 두고 희극에 대해 얘기한다.
 
희극을 ‘경험의 어둠이 밝음으로 여과되어가는 관점’(크리스토퍼 프라이)으로 설명한다면 이 제목이 단테의 신곡(The Divine Comedy, 천상의 관점)과 대비되는 인간극이 아니라 인간희극이어도 적절해 보인다는 주장인데, 개인적으로는 삶의 혼란과 안정이 병존하며 과도기적 이행을 겪는 게 희극이 아닐까 생각했다.

죽음의 의미를 묻는 젊은이에게 ‘그것은 젊은 질문이고 나는 늙은이’라며 그것의 알 수 없음을 내비치지만 결국 세상이 모든 겁쟁이들의 자리라는 것을 알려주고(“겁이 나서 그들은 서로 겁을 준단다.”), ‘나는 모든 태도의 밑에 깔린 참된 본질에 관심이 있’다며 따뜻함을 건네주는 게 이 ‘희극’에 빠질 수 없는 얘기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비극은 어떤가. 시대는 우리를 비극의 어디에 위치시킬까. 전쟁이 낳은 비관적 실존주의 문학의 경우 손창섭의 외침이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나란한 배음을 이룬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러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한 의미로만 존재하는 것인가. 신은 이 세상 만물 중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이 만든 것이 없다고 하니 말이다.”
 

전쟁과 황폐의 상황 속, 비극에서마저 주변인으로 전락하는 인물들의 외침이 시공을 초월해 메아리친다.
 
 
 
배달과 알고리즘의 시대, 자아와 양심의 자리

     

‘배달과 알고리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통조림의 시대’는 외피만 바꾼 채 여전히 이어진다.
 
 

“나는 우리가 통조림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이미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네. 만사가 미리 생각되고 미리 씹어지고 미리 느껴진 것이거든. 열기만 하면 되니까. 날마다 세 번씩 집으로 배달되고.”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자아가 비대해지면서 우리 안에 양심이 위치할 자리 역시 좁아지는가? 믿음이나 신념은 시대와 불화할 수 있지만 맹목은 ‘나’ 바깥의 대다수의 세계와 불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의 자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살기 전에 나 자신과 함께 살아야 하니까.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 유일한 것은 사람의 양심이야."


-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조원용 컬처리스트.jpg

 
 
[조원용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