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엽서를 모으지만 몇 장 없어요 [사람]

나는 엽서 수집가다
글 입력 2021.03.1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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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지원서에 자신을 단어로 소개하는 문항이 있었다. 나에겐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오히려 현재 문화계 이슈를 꼽는 항목을 먼저 썼을 정도다. 고심 끝에 나의 얕고 넓은 관심사를 '취향 수집가'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다. 다시 말해 여러 취향을 모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사람. 못내 아쉬워 잡식성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간단했을지 모르는 이 질문이 꽤 오래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며칠간 꼬리처럼 따라다니던 생각이 더는 고민이 아니게 될 무렵이었다. 위아래, 좌우로 기계적인 양치질을 하던 도중 어떤 단순한 문장이 머리를 두드렸다. '나는 엽서 수집가다.' 엽서 모으기는 내 취향의 한 가닥이기에 나를 압축해서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그럼에도 그 수집 행위에는 나름의 맥락이 있었고, 나를 잘 나타낸다는 점은 분명했다. 마치 이제야 참된 선언을 하게 된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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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소장욕을 자극하는 것이 다르고, 수집에는 의지가 필요하다. 모으는 대상이 특정 브랜드의 제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직접 조립한 피규어, 영화 포스터나 공연ㆍ전시 티켓 등 자신의 문화생활이 담긴 기록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각자의 개성을 그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취향 수집가'라는 다소 추상적인 수식어를 넣어두고, 내 작고 소중한 취미인 '엽서 수집'에 대해서 소개해 보려고 한다.

 

코로나 이전에 내가 여가를 보내는 방법의 하나가 전시회 방문이었다. 대체로 전시 관람을 마치면 관련 굿즈를 구매할 수 있는 자리가 있는데 예외 없이 고르는 것이 엽서다. 작품을 소장하고 싶지만, 금전적 부담이 되니 차선책으로 작품이 프린팅된 엽서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손안에 드는 크기로 작품을 간직할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소박한 욕심이 취미로 이어져 이제 어디서든 엽서를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하나둘 모으는 재미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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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단발적 행동이 취미로 발전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나는 손편지 쓰는 걸 즐긴다. 주변 사람에게 마음을 전할 때 그만한 것이 없다고 여긴다. 간혹 편지 쓸 일이 생기면 엽서를 편지지로 활용하곤 한다. 우리는 일반적인 편지지를 상상할 때 보통 밑줄이 가득한 종이를 떠올린다. 곧게 뻗은 직선을 중심으로 그림이 장식된 것이 기본 형태다. 밑줄은 누군가에게 글을 쓰기 위한 좋은 보조 역할을 할 테지만 나에겐 그저 답답한 요소일 뿐이다. 글씨 크기를 정해진 행간에 맞춰서 써넣어야 하고, 가장 아랫줄까지 빽빽하게 채워야 할 것만 같은 강박감이 밀려온다. 학부 시절 서술형 시험지를 받아든 기분이랄까.

 

반면 엽서는 한쪽 면이 전부 사진이나 그림이고 다른 면은 공백이다. 이 점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엽서의 빈 한쪽 면을 재주껏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밑줄이 없으니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자유다. 가로로 쓰나, 세로로 쓰나 별 차이가 없다. 모든 선택권은 사용자에게 있다. 물론 종이에 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 넘어선 안 될 금단의 선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선을 따라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나는 평소 정해진 질서, 법칙을 굉장히 갑갑하게 생각하지만 누구보다 잘 따르는 편이다. 순응이 빠르다고 해야 할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틀을 벗어날 경우 불안감을 느끼고 큰일이 날 것만 같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명확한 그림이 있을 경우 아예 규칙이 없는 곳으로 향한다. 내 욕구와 의지를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곳. 그러니 나에겐 엽서가 제격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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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일반적인 편지지와 달리 엽서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우편용 외에도 인테리어 소품으로 벽면에 붙이기도 하고, 내용을 채우지 않고 선물하기도 한다. 밑줄이 잔뜩 그어진 편지지를 아무 글도 쓰지 않고 상대에게 건넸다고 가정해 보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건 실수이거나 편지를 써달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이미지의 비중이 커서 시각적 충만함을 안겨 준다는 점이 수집 욕구를 자극한다. 지금까지 내가 모은 엽서만 해도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 패브릭 브랜드의 패턴, 단색화의 대가가 그린 작품 사진 등 다양한 이미지가 엽서에 담긴다. 가격을 생각하면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앞서 말했듯 나는 아직 작품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이렇게 마음을 달랜다. 제법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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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엽서를 모으지만, 보유 현황은 고작 10장 내외다. 금세 다 써버리는 탓이다. 엽서 수집가라고 자부한 것이 무색할 정도다. 만약 그동안 보관만 했다면 나의 엽서 컬렉션은 꽤 화려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취미는 모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과 공유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래서 앞으로도 엽서를 수집할 것이다. 설령 수중에 몇 장 남지 않더라도 말이다.

 

내가 아트인사이트에 지원한 첫 글은 「'나'를 알아가는 공부」다. 이력서를 쓰면서 느꼈던 낯선 감정을 풀어낸 글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형세에는 관심이 많아도 정작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막막한 사람. 그게 나였다. 이제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수식어가 생겼다. 엽서 수집가!



 

[김세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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