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모델] 임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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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지 능숙하게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대화에 스탠바이 되어있는 느낌이 든다. 200% 진심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영혼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낯설지 않은 느낌의 친구이다. 나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고 하면 실례일까. 괜히 반가웠다. 너라는 사람이 내게는 익숙한 것 같아서.
제주 여행 이후, 여행의 후유증이 남을까봐, 비행기 티켓을 끊으면서 동시에 예약한 집들이이다. 상묵 게스트하우스. 호스트 상묵네 집에 놀러갔다. 그리고 시골집 고즈넉한 편안함을 충분히 머무르다가 갔다. 한 다리 건넌 친구의 친구에서, 내 친구가 되었다. 평소에 건너 듣기로는 궁금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만나서 따로 시간내어 그림을 그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임상묵이라고 하고요. 사진과 글을 이용해서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걸 기록해요?”
“저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해요. 옛날부터 보면 기록은 상류층 위주로 흘러갔잖아요. 일반인은 기록될 기회도 없고. 일반 사람들도 각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저는 그걸 기록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을 만나서 기록을 남기는 것.”
“사명? 사명은 무슨 뜻이에요?”
“모든 사람들은 각자 사명이 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부여하는 것. 저는 그게 기록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인 마인드가 나랑 비슷하다. 나도 일상적인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큰 사건 개요나 맥락은 사실 관심없다. 모든 사람들이 각고 있는 아주 작은 일화들. 그리고 그 일화 속에서 드러나는 개성이 흥미롭다. 사명이라는 단어는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기록하는 것에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묵은 사진과 글로, 나는 그림과 글로. 사람 수집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묵만의 기록, 특징은 무엇일까요?”
“녹음하지 않는 것. 모든 걸 다 기억할 수는 없잖아요. 망각되는 것도 있을 것이고, 망각되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고. 망각되지 않는 문장들을 기록해요. 물론 기억되는 것도 주관의 영역이고 고유성을 지니고 있죠.”
왜 내 얘기를 하고 있지? 나와 닮은 사람이었다. 나도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처음에는 녹음을 했으나, 받아적는 기록물 밖에는 되지 않았다. 나는 초상화처럼 똑같이 받아적고 받아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녹음을 포기했다. 대신 대화하면서 중간중간 단어를 기록하고, 기억에 남는 문장과 대화 내용만으로 글을 남긴다. 어떤식으로든 의미가 남았다는게 중요한 거니까.
곧 바뀔 머리지만, 귀여운 뽀글머리가 청색과 적색이 있었다. 진한 초록색과 자주색이 섞인 머리카락. 그리고 눈은 덮었다. 고정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듯한 친구였다. 예상대로 역시, 다양한 색이 쓰였다. 알록달록한게 꼭 각설이 같기도 하고. 여기 우리가 있는 책방 카페 벽면에 있는 홀로그램과 닮았다.
완전히 투명하지도, 불투명하지도 않은 모습. 흐릿하게 모든걸 비추면서도 알록달록하게 화려한 색을 띄었다. 딱 네 모습 같았다. 어젯밤 ‘나는 무색무취이고 싶어. 내 모습은 그래’라고 말했던 네 모습이 떠올랐다. ‘아냐, 너는 무색무취 보다는, 투명해. 투명한 셀로판지 같아.’라고 대답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무채색보다는 오히려 화려한 사람이라고. 어느 자리에 있어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내가 빛 좋은 개살구라고 생각해. 많은, 여러 군데 속해있지만, 발만 담그고 있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태야.”
“맞아, 나도 그래. 어디든 있을 수 있어서, 어디든 있을 수가 없어. 나도 항상 허공에 떠있는 기분이었어. 현실에 있지 않고. 네 기분이 어떤지 알 것 같아.”
“나는 지금 여기가 내게 가장 적합한 위치야. 정확한 포지션에 있는 상태야. 처음으로 내 공간을 가졌거든. 작년에는 안정욕구가 키워드였어. 안정감을 얻고 싶어서 지금 여기로 내려왔고. 지금은 정말 안정감을 느껴. 여기에 나를 더 붙잡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람 관계고 하나는 경제적인 요소이야. 그래서 이를 위해서 노력 중이지.”
“그럼 작년보다는 한 단계 발전한거네?”
“그런 셈이지. 나는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작년에는 안정 욕구였어. 얘기하면서 덕분에 깨달았어. 고마워”
“그림은 어때?”
“눈을 가려서, 머리카락으로 덮어서 마음에 들어. 나는 눈을 잘 못맞추거든.”
“왜?”
“부끄러워서.”
*
“어젯밤에 누나가 얘기했던 거 있잖아. 폴리아모리에 대해서 말한 부분. 그 대화가 와닿았어. ‘한 번 겪으면, 못돌아올까봐’ 나는 못할 것 같아.”
“나는 매번 네 SNS 볼 때마다 솔직하게 글을 쓰는 거 신기해.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거든. 어떻게 그렇게 솔직하게 다 쓰는 거지?”
“날 좋아해줬으면 하는 편지지. 브랜딩이기도 하고.”
“정말 현실적이야. 멋있다. 부러워.”
“음. 내가 허공에 있어도, 커리어적으로는 현실적이야. 열심히 하지.”
나는 추상적으로 그리는 걸 좋아한다. 형태를 벗어나는 그림이 좋다. 현실과 똑같은 건 사진의 영역이지, 그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는 왠지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려야할 것 같았다. 나를 형태에 맞춰서 그리게 하다니 대단한데? 도저히 진하고 강한 볼펜선으로는 그릴 자신이 없어서, 어울리지도 않을 걸 알기에, 일부러 콩테를 잡았다. 우스갯소리로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커진다’는 코부터 그렸다. 눈썹과 눈-역시 정확하게는 잡기 어렵다-을 그리고, 머리카락을 그렸다. 정리는 안되었지만, 그게 더 좋았다. 자유분방해 보이기도 하고.. 마스크는 빼고 싶었지만, 내가 이 환경에 인위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지는 않아서 그대로 놔두었다. 콩테로 전체적인 형상을 그렸는데, 뭔가 아쉬웠다. 뭐가 빠진걸까?
“네 옆모습을 그리는데, 뭔가 허전해. 뭘 채워넣지, 음.... 너 무슨색 좋아해?”
“초록색 좋아해.”
“어떤 초록색? 이 연두색, 아니면 중간 초록색, 진한 초록색 중에 어떤거?”
“이게 좋아.”
“그래, 그럼 이 색으로 할게. 다 채워야겠다. 근데 초록색은 왜 좋아해?”
“편안하잖아.”
초록색을 채웠다. 마음에 들었다. 이제야 너였다. 콧노래가 나왔다. 투명하기도, 화려하기도, 알 수 없기도 하지만, 내가 본 너는 이렇게나 현실적이고 진한 색을 가진 사람이었다. 너는 이런 색이었구나. 이런 사람이었구나. 물론 한 사람을 감히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내 고유성을 지닌 주관의 영역에서의 너는 이런 모습이었다.
“사람들 다니는 환경에서 대화에 집중하느라 고생했어. 고마워. ‘집중할게’라는 말을 하는 순간 부터 신경쓰는게 보였어.”
“아냐 나도 그려줘서 고마워. 대화에 집중하고 나서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네. 맞아 직면하는 건 언제나 어렵지.”
“항상 진심이면서도 상처받기 두려워서 먼저 떠나려는 모습이 너무나 공감이 되고 닮았어.”
“남겨진 사람은 고통스럽잖아.”
“많은 사람을 만나는 건, 내 사람- 내가 의지할 사람을 탐색하는 모습 같기도 해. 내가 그랬었거든.”
“질문 모임(상묵이가 진행하는 -매주 질문을 가져와 묻고 답하는 인문학 모임)에서 그렇게 맞는 사람을 찾았어. 내가 지금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할 수 있게 도와준 친구. 그런 지원은 처음이야.”
“아, 전에 내 모델 했었던 친구지? 맞아, 내면이 참 건강한 친구야. 안정감 있는 사람은 특유의 여유가 있어. 뭐든지 다 괜찮다는 느낌, 위안을 줘.”
“누나는 누나랑 비슷한 사람 만날 수 있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너는?”
“난 아냐”
“그치, 피곤하지. (웃음)”
“나같은 사람 만나면 계속 받아줘야하고, 피곤할 거 같아.”
엄청 웃었다. 이후에 질문 모임을 진행해서,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속내를 솔직하게 직관적으로 바로 꺼내주어서 대화하기가 편했다. 드러내줘서 고마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참 매력적인 친구다. 내가 좋아하는, 빠른 시간 내 좋아진 친구다. 똑같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하나를 봐도 느껴지는 그런 친구. 그래서 좋았다. 고마워. 각자의 방법으로 사람을 수집하고, 모으고, 애정을 받으면서 지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 수집으로, 너는 사람 덕질로. 밀도 가득한 시간이었다.
*같이 얘기했던 친구, 화가와 모델 -변혜민 편
[최지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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