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 이후, 남은 자들에 관한 이야기 - 죄 많은 소녀 [영화]

들을 수 있었지만, 모두가 듣지 않았다.
글 입력 2021.03.0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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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 그 이후의 상황과 관계에 관해


 

2017년부터 2020년까지 각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온 한 독립 영화가 있다. 바로 2018년에 개봉한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이다. 한글 제목을 영문으로 번역하면, “A sinful girl”이 될 듯하지만 사실 공식 영문 제목은 ‘나의 죽음 이후’라는 뜻이다. 필자는 이러한 제목에 의문이 생겨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죽음 이후의 사람의 태도부터 인간관계, 사회적 반응 등 우리 주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망자 ‘경민’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내용이 아닌 같은 반 친구였던 ‘영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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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죄가 많아야‘만’ 했던 소녀


  

우선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영희는 여고에 다니는 고등학생이다. 어느 날 밤, 친구 한솔이와 들린 어떤 화장품 가게에서 경민이를 만났고, 세 명은 함께 놀다가 헤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이들에게는 복잡한 감정적 변화가 발생한다.

 

그리고 세 명이 놀고 헤어진 다음 날 경민이는 실종되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학교 측의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수사를 맡은 경찰들은 경민이 속한 반 아이들을 한 명씩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한솔의 거짓말로 영희가 가해자로 지목당하게 된다.

 

억울한 영희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점점 가해자 취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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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의 죽음에는 각각의 이유가 필요했기 때문에, 영희는 죄가 많아야만 했다. 우선 경민의 엄마에게 영희는 자식의 죽음에 큰 영향을 미친 못된 아이였을 테고, 학교에서는 조용히 마무리하기 위해 영희의 잘못으로 단정짓고 넘어가려했다. 경찰 또한 수사를 기간 내에 종결하기 위해 비교적 쉽게 도출된 답이었던 영희만을 추궁한다. 그렇게 각자의 이해관계에서 영희의 잘못은 정의된 것이다.


아무도 영희 외에는 경민의 죽음 이유를 찾지 않는다. 각각의 판단으로 영희에게는 죄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각자의 죄의식을 덜어내기 위해 많은 이유를 배제하고 영희에게만 죽음의 이유를 캐묻는다.

 

 

 

3. 영화 속, 붉은색이 가진 의미 – 생리혈, 구혈, 붉은 풍선


 

 

- 편협한 사고와 판단으로부터 온 죄악

 

영화는 종종 선명한 붉은 요소를 드러낸다. 도입 부분에서 영희는 생리 중이라며 보건실에서 휴식을 취하고자 한다. 보건 선생님이 의문을 품자, 영희는 그 자리에서 휴지에 묻은 자신의 피를 묻혀 보여준다. 경찰 조사를 받은 이후, 화장실 장면에서도 생리혈을 선명히 드러낸다. 왜 감독은 영희의 생리혈을 여러 번 보여주었을까? 아래는 필자가 생각한 연출의 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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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부터 여성의 생리는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감추어야만 했던 불쾌함의 대상이었다. 오랜 세월 남성 중심이었던 인류의 역사에서는 생리가 심지어 죄악처럼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희의 생리혈을 드러내는 연출을 통해, 관객은 일반적으로 가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생리혈을 직관적으로 보게 되고, 어딘가 찝찝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유도된 감정을 이용해 영화는 영희의 잘못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희의 죄’가 연상되도록 한다.

 

 

- 결백을 입증하는 광기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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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의 시체가 발견되고, 영희는 친구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영희에게 가해오는 정신적ㆍ육체적 피해가 컸고, 결국 영희는 경민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 독극물을 마신다. 화장실에서 무섭도록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경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면서, 영화는 또 붉은색을 등장시킨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영희의 감정을 강렬하게 자극받게 된다.

 

금지 표지판이나 위험 표시에 붉은색이 많은 것처럼, 영희의 피 때문에 관객은 불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결백을 입증하려던 영희에게서 광기가 느껴졌고, 진실을 말하듯이 피가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영희가 보건실에서 선생님께 숨기지 않고 생리혈을 보여준 장면처럼, 영희는 본인의 죽음을 이용해서라도,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무죄를 밝히려고 했다. 어디 한번 증명해보라는 사회와 어른들의 억압과 목소리에 말이다. ‘아니라고’, 울부짖는 영희의 목소리가 피를 토하는 그 장면에서 들리지 않지만 들리는 것 같았다.

 


- 죄의 감정이었던 붉은 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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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는 빠르게 병원으로 이송되어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목 표면에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경민의 장례식과 영희의 자살 시도 이후,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을 시켜 영희에게 영상 편지를 만들게 하고, 풍선을 불게 해서 병실을 꾸민다. 어떻게든 훈훈하게 마무리해서,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려는 담임선생님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영희는 병실에 있던 하나의 붉은 풍선에 자신의 주삿바늘을 꽂는다. 그는 풍선이 점점 줄어들자 빠져나가는 바람을 자신의 아픈 상처에 집어넣어 본다. 이 장면을 보면서 붉은 풍선을 터뜨린다는 행위 자체에서 가벼움이 느껴졌고, 영화 내내 영희가 처음으로 숨을 쉰다고 생각했다. 죄악처럼 불편했던 감정을 붉은색에 비유한다면, 붉은 풍선을 터뜨리는 장면은 그 괴로움에서 조금씩 벗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터뜨림의 도구로 자신의 주삿바늘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아픔과 죽음을 통해 괴로움을 해소하려던 영희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 붉은 색채를 이용한 영화의 흐름

 

이렇게 세 가지 붉은색 요소를 활용하여 영희의 감정 변화를 확실히 느꼈다.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영희의 감정, 결백을 입증하려던 광기와 같은 억울함, 죄의식의 감정을 덜어내는 듯한 터뜨리는 행위. 이러한 중심적 흐름을 영화는 붉은색을 활용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4. 들을 수 있었지만, 모두가 듣지 않은 이야기


 

도입부에서 영희는 수어로 반 친구들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반 아이들은 그 의미를 모르지만 일단 손뼉을 치고, 영희는 자리에 앉는다. 수어를 모르는 관객 역시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필자는 손뼉를 치는 모습을 보고 일단 그 의미가 ‘잘 부탁해’와 같은 긍정적인 의미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필자와 같은 관객을 꼬집기라도 하듯, 영화는 일침을 가한다. 수미상관법 연출로, 결론 단계에서 영희의 수어를 자막으로 표시한다. 아래는 영희가 박수를 받았던 수어의 의미이다.


“나는 여러분이 기다리던 나의 죽음을 완성하러 왔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가장 멋지게 죽고 싶습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몸소 느껴졌다. ‘그동안 나 자신은 누구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했고, 또 들을 수 있었지만 듣지 않았던 이야기의 주인은 누구였는가’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이렇게 영화는 관객에게 타인의 고통에 무심했거나, 완성된 답만 강요하기에 급급했던 적은 없었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희를 둘러싼 의혹에 관해 학교 선생님들과 수사 경찰, 반 아이들은 다른 답을 내릴 수 없었을까? 영희가 죽음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영희의 자살 시도 후에도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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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해결을 위한 정답을 우선 찾고, 진실의 목소리는 듣지 않은 채 손뼉을 치는 모습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비춰주는 것 같다. 상황의 근본적인 뿌리를 찾지 못한 채, 박수로, 일단은 훈훈한 마무리로 포장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5. 이기심으로 강요된 대답에 관하여



"내가 죽으면 그 이유나 대답해주세요."

 

경민의 엄마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영희를 곁에서 지켜보며 돌본다. 두 사람 다 행복해질 수 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경민의 엄마는 마치 영희를 놓치면 경민이를 영영 잃을 듯이, 영희를 주시한다. 영희의 행복과 불행을 응원하는 모순된 감정을 느끼면서 말이다. 경민이 없는 식탁에서 한솔, 영희와 밥을 먹는 경민의 엄마는 영희에게 “고마워해야지.”라고 말한다. 현재 누리는 것들이 경민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라며.

 

이렇게 강요된 대답에 영희는 위와 같이 말한다. 영희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주머니가 어떻게 말할 건지에 대해 말이다. 경민이가 죽었을 때,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영희가 가해자로 지목받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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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죽음 이후 이기심에서 비롯된 각자의 판단을 보여주면서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결국 죄가 많아야만 했던 소녀, 영희의 이야기는 '책임 전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죄의식을 덜어내기 위해 한 성급한 판단의 결과는 어떨지’, ‘이기심으로 인해 강요된 대답에는 얼마나 듣지 못한 많은 목소리가 있었는지’를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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