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날의 나 [사람]

한국의 고등학생은 행복해선 안된다는 법 같은 건 없는데.
글 입력 2021.02.2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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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눌려 있다’는 감정, 한번 쯤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 그 단어를 마주할 때면 고등학교 시절이 바로 떠오른다. 여덟시에 집을 나서 새벽 한시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입시라는 매일의 일상. 비정상적인 시간들을 감당하길 강요받아왔음에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 때의 나는 해야할 것만 같은 일에 집중을 해오며 스스로 잘 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결국엔 탈이 났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목적 없는 치열함에 지쳐있는 나의 상황에는 또 다시 숫자가 매겨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다짐하며 대학에 왔다. 예상치 못한 수많은 경험을 했다. 잃어버린  십대 후반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는 듯 열정을 쏟을만한 곳에 집중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가, 오랜 고민에 답을 찾아가며 성장하는 일이 생각보다 배로 재밌었다.


브랜드 정체성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마케팅 전략을 기획하는 일에 흥미가 생겼다. 지금껏 해 왔던 예술 관련 활동과는 결이 달라 딱히 내세울 건 없었지만, 디지털 마케팅사에 인턴 지원서를 냈다. 며칠 밤을 새서 써낸 지원서를 보고 면접을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학생이 아닌 기업의 실무자에 가까워지기 위해 보는 첫 면접. 설레는 마음으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아직 시기상조였는지, 결과는 탈락이었다.


면접에서 포토샵툴을 사용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카드뉴스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어서, 어느정도 할 줄 안다고 답했다.

  

포토샵을 ‘잘 한다’가 아닌, ‘어느 정도 할 줄 안다’가 문제였을까? 내가 마케팅 관련해서 더 다양한 활동이 필요했을까? 데이터 프로그래밍을 배워야하나? 결과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게 많았지만, 고등학생 시절 불만으로 가득찬 의문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무엇이 부족했다면 당장 부족하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

 

예정에 없던 휴학을 했다. 마케팅 실무를 배울 수 있는 대외활동과 연합동아리 면접을 봤다. 하루 3개의 온라인 회의를 하며,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득채운 창조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나에게 맡기며 살아간다. 나는 자유로울 때 더 잘 할 수 있다.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사랑하고 싶은 일이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 슬퍼하던 그 때의 나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한국의 고등학생은 행복해선 안된다는 법 같은 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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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달간 공부한 포토샵 자격증 시험을 치르러 처음으로 도봉구를 갔다. 시험 치는 곳은 ‘서울문화고등학교.’ 내가 좋아하는 게 다 있는 이름이었다. ‘서울’, ‘문화’, 그리고 애증의 ‘고등학교’.

 

지하철에 앉아 가는 길에 위키피디아 글을 읽었다. 문화산업경영과, 광고마케팅과, 엔터테인먼트과, 디지털문화콘텐츠과. 또 의미 없는 공상을 해본다. 내 17살, 울산의 성광여자고등학교가 아닌 서울문화고를 다녔다면... 지금의 친구들을 못 만났겠지, 울산에서 어떻게 왔겠니, 야자도 없다니 재밌긴 했겠다, 예고를 갔어야 했나.

 

익숙한 안내 방송과 함께 창동역에 도착했다. 24살 대학 4학년을 앞둔 나, 집 근처 도봉구에 포토샵 시험을 치르러 왔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 하나씩,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다음 미션은 버스 갈아타기. 시험 15분 전이다. 생각을 멈추고 서둘러 환승 카드를 찍어 역 맞은 편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류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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