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도서]

글 입력 2021.02.2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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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의 평생을 보낸 이 방 세 개짜리 집에는 사람 여섯과 강아지 한 마리가 산다. 내가 기억하는 한 쭉 이런 형태였다. 가족은 점점 작아지고 쪼개진다는데 우리 집은 언제나 복작복작했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양보를 배워야만 했다. 1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 동생과 날 때부터 지금까지 방을 같이 쓰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나는 내 방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여태 잘만 살아왔다. 별 불만도 없었다. 그런데 쌍둥이가 어느 날 자취를 하고 싶다며 눈에 불을 켜고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두 번의 환승과 경의중앙선, 그리고 왕복 3시간 반에 달하는 통학 시간을 2년 동안 견딘 후였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일단 보증금 500만 원을 주고 1년을 계약했다. 엄마는 기왕 자취하는 거 월세 아끼게 너도 같이 가라며 나도 내보냈다. 쌍둥이와 세트로 묶여 사는 일이야 익숙했지만, 자취까지 묶여서 하게 될 줄이야. 자취방은 쌍둥이가 다니는 학교 앞에 있었고, 우리 학교는 거기서 30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는 내키는 날 나가서 술을 마시고 막차 걱정 없이 놀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고, 동생은 학교까지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에 감격했다. 우리는 알아서 하는 가사 노동에 익숙해졌다. 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한 생활 반경과 패턴을 보이고, 입맛과 성격까지 닮은 사람 둘이 사는 일은 매우 쉬웠다. 우리 둘의 자취가 성공적으로 끝난 이유는 아마 우리가 언제나 같이 살아오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세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으며 내 동생과 1년으로 끝난 우리의 짧은 서울살이가 생각났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여자 둘이 산’ 경험도 있고,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둘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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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답이 아닌 것 같았다. 단지 혼자의 고단함을 피하자고 결혼 제도와 시월드와 가부장제 속으로 뛰어드는 건 고단함의 토네이도로 돌진하는 바보짓이었다."
 

 

어릴 때의 나는 막연히 내가 혼자 나가 살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결혼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부모님과 계속 함께 살 수도 없었으니 당연한 결론이다. 동생과 둘이 사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자취 생활은 어쩌면 이렇게도 살 수 있겠구나, 하는 걸 보여 준 셈이다.

 

다양한 모습의 가족들이 등장하고는 있다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다. 결혼으로 맺어진 두 남녀, 그들 사이의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모습으로 여겨지고, 혼자 살거나 배우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사는 것은 일시적인 단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여전히 팽배하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에서 이런 ‘정상적 가족’은 사람들을 관리하기 쉽고 편하게 만든 단위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삶 속에서, 그리고 미디어 속에서 일부일처제의 불합리성을 체험하고, 그 실효성을 의심하고 있다. 결혼이 마치 인생의 무덤인 양 구는 기혼자들의 모습, 혼외 관계와 고부 갈등, 맞벌이 등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의 모습은 이제는 흔해졌다.

 

이미 평균수명이 80세를 훌쩍 넘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혼율은 점점 상승하고, 비혼을 택하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것은 ‘정상적 가족’이라는 단위가 더는 사회 유지에 효율적이지 않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사회는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는 것만큼 빠르게 변화하지 않는다. 생활동반자법이나 동성결혼 법제화 등의 논의는 이미 몇 년째 지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주택청약은 1인 가구보다는 신혼부부에게 더 높은 가산점을 주고, 수술 동의서는 배우자나 가족의 동의만을 인정한다. 몇백 년 동안 유지해 온 체제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미 붕괴하고 있는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그닥 효과적인 것 같지는 않다.

 

어릴 때만 해도 나는 자라서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당연하게 하고 살았다. ‘정상 가족’ 안에서 자라고, 미디어로 단일한 형태의 가족을 보고 자란 내가 혼자 사는 것, 또는 배우자와 사는 것 이외의 가족 형태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책의 한 구절처럼, ‘결혼을 생각해보는 건 관계의 깊이나 애정의 정도와는 별개로,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된 결과에 가까웠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몇십 년 후의 내 미래에는 얼굴도 모르는 나의 남편이 당연한 듯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가족 안에서 살아가며 느낀 점이 있다면, 내가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 안에서 안정을 찾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갈등을 싫어하고, 내 모든 것을 너무 속속들이 알려고 하는 것이 싫다. 쌍둥이 동생이야 엄마 뱃속에서부터 함께 자랐으니 익숙하고 편하지만, 다른 누군가와 제도 아래에 묶여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한다면 분명 서로에게 피로감만 안겨줄 것이다.

 

물론 엄마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네가 젊어서 그렇다’며 내 결심을 일축해버렸다.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생활 공간을 나눠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직접 경험해보면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또 다른 선택지를 알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제 내 미래를 생각할 때 혼인 관계로 묶인 무언가만을 상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게임에서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주어지는 퀘스트처럼, 우리 인생에는 보편적인 목표가 정해져 있다. 몇 살 때쯤 학교를 졸업하고, 몇 살 때쯤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몇 살 때쯤 아이를 낳고. 그리고 그 ‘몇 살 때쯤’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사람들의 엄청난 오지랖과 참견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1인 가구 비율은 이미 27%를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1인 가구’로 등록된 가구들의 상당수가 생활동반자 가정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안정적인 가정, 편안한 집을 위해 결혼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다.

 

나와 쌍둥이는 요즘 다시 집을 구하는 중이다. 이전에는 학교 때문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생활공동체로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다.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제도에 속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충분히 아끼고, 서로에게 기대설 수 있는 관계가 있다면 그 또한 가족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책을 읽으며 내 삶의 미래가 이런 형태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안일과 바깥일을 적당히 나눠서 하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노래를 함께 즐기고, 무엇보다 혼자였다면 조금은 벅찰 일들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그런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이것이 꼭 결혼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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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우노
    • 동성애는 사랑이다 죄가 아니다 성경을 잘 보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의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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