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으로부터

글 입력 2021.02.2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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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읽는 정세랑 작가의 소설이자,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려 손에 넣게 된 책이다. 긴 예약 대기 시간을 거쳐 대출하기까지 그냥 예약 취소를 할까 많이 고민했지만 결과적으로 기다리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정세랑 작가의 첫 글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어 감사하기까지 하다. 읽는 내내 몇 번이고 마음이 벅차올라 책을 덮고 감정을 골라야 했다. 그래야지 다시 잔잔한 마음으로 담백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테니까. 파장이 큰 이야기를 담백하게 담아내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감정을 몰입하다 보면 그렇게 글을 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런 사람이 글을 써야지. 책을 덮고 나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나도 글을 쓰지만서도 진짜 글은 이런 사람이 쓰는 거라고 느꼈다. 활자에서 등장 인물들의 숨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어서 그런가, 19명의 이야기를 담고서도 자유롭게 활강하는 이 소설이 내게는 무척 벅찼다. 한 글자 한 글자 아껴 읽고 싶게 만드는 만큼 집중해서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했다. 정말 인상 깊었던 건, 등장 인물마다 문체가 주는 느낌이 조금씩 달라졌다는 것. 우윤에게선 확실하지 않은 단단함이, 지수에게서는 조금은 불안한 자유분방함이. 해림에게선 조용하지만 확고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 속에서 같은 숨을 공유하는 느낌을 받았다. 태양이 작열하는 하와이 어디에선가 나도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심시선과 민애방

 

시선으로부터. 처음 제목의 시선이 심시선의 이름이라는 걸 알았을 때, 시선에게서 들었던 말들로 이루어진 소설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등장 인물들이 시선으로부터 파생된 조각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시선을 떠올렸다. 나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소설 속 인물이지만 나 역시 시선의 조각이고 싶었다. 누군가의 조각임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 소설을 읽다보면 그 조각이라는 것이 결코 혈연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를 이루고 있는 조각의 출처들도 굉장히 다양한데, 나는 아직 그 어떤 출처들에게도 완전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감사함과 소속감은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니까. 어떤 조각들에 대해서는 원망스럽기까지 한데, 구석 한 곳에 깊숙하게 숨겨놓은 조각들이 가끔 나를 찌를 때면 아픔보다는 슬픔이 먼저 느껴진다. 심시선의 가족들은 시선으로부터의 조각들로부터 슬픔을 느낄 때 어떻게 할까. 아니, 시선이라면 어떤 말을 했을까?

 

시선의 말과 글들에는 간단함이 있다. 내 글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바로 간단 명료함이다. 내 말에, 아니 내 글에 자신이 없는 걸까. 자꾸만 구구절절한 설명을 늘어놓게 된다. 좋은 작가의 자질이 아니라는 것쯤을 알고 있으나 고치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한 꼭지가 시작할 때마다, 시선의 글과 말들이 그 포문을 열었다. 시선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것을 통해서 시선을 추억할 수 있는 이들에 대한 부러움도 느껴졌다. 시선을 만나보지 못한 나도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그들은 얼마나 시선이 보고 싶을까. 나 역시 많이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생각과 말들을 통해 날 추억하는 이들이 많아질 수 있게.

 

시선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말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우리가 아니라 미래의 여자들을 위해 싸운다는 말. 시선이 딱 그랬다. 본인을 위해 싸웠던 시선은 결국 그 밑의 세대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시선은 정말로 여성과 약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시선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시선 덕분에 행복했을 것이다. 시선이 행복했으니까.

 

그렇기에 민애방은 행복했을 거다. 시선의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애방처럼 말하고 행동했다는 시선이 이해가 간다. 그리고 나는 감히 예상한다. 민애방 역시 시선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싶었을 거라고. 그들의 우정은 어딘가 묘하게 서로를 닮아 있으니까. 사랑하면 닮는다지만, 그 전에 닮은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것 아닐까? 애방은 시선에게서, 시선은 애방에게서 서로 다른 자신을 발견한거다. 시선을 눈부시게 밝혀준 애방에게, 애방에게 벅찬 예술의 감동을 안겨준 시선에게 악수를 건네고 싶다. 부디 꽉 잡아주시길. 내가 당신들에게 받은 위로를 전할 방법이 그것뿐이기에.

 

 

*박화수

 

시선 다음으로 가장 마음을 많이 주었던 등장 인물은 단연 화수라고 할 수 있다. 화수가 할머니의 장례식에 선물을 준비해 온 방법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자세히 기재하지 않겠다.)을 읽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내면을 성장시켰지만 가장 성장한 사람은 화수가 아닐까 싶다. 화수가 입은 상처는 한국에 만연한 일이다. 약한 상대를, 그러니까 여자들을 상대로 한 분노 표출. 그들은 용기가 부족해 분노를 표해야 할 사람들이 아닌 여자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비겁한 짓을 한다. 그러고도 한국 사회가 여혐을 하지 않는다고. 성급한 일반화를 하고 싶지 않지만, 화수가 던진 질문은 자꾸만 내 머릿속을 맴돈다. 모든 일이 너무 반복된다는 생각 들지 않아? 지금도 수많은 여자들은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화를 입고, 아무도 듣지 않는 소리를 외치고, 억울하게 무릎 꿇고 있으니까. 자신들도 약자라는 소리는 하지 말길 바란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저도 상처 입었다며 상처를 들이미는 것은 위로도,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하나의 기만일 뿐이다.

 

시선으로부터 나온 화수는 단단하다. 처음부터 단단했던 건 아니다.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수천 번의 담금질 끝에 쇠가 단단해지듯이 화수 역시 단련된거다. 본디 단단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외압에 의해 단단해질 때 나는 슬픔을 느낀다. 누군가는 단단하지 않고 부드러울 수도 있는 건데 그걸 있는 그대로 지켜주지 못한 세상이 미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단단해진 화수에게는 감사함을 표한다. 당신이 있기에 오늘의 나 역시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무것도 다행은 아니었어. 맞아. 아무것도 다행은 아니었어. 이 쉬운 말을 하는 게 어려워서.

 

 

*김난정과 이명준

 

내게 또 다른 자아가 있다면 난정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을 것 같다. 현재 나의 모습은 난정과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난정도 나도 읽는 걸 좋아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말을 찾을 줄 안다. 너같이 많이 읽는 애는 언젠가 쓰게 된다. 나는 시선의 말에 동의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 지금의 나는 읽음과 동시에 하고 싶은 말이 생성되고, 그와 동시에 휘발된다. 그럴 때면 머릿속이 워드 같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는대로 기록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모든 생각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애석할 때가 있다.

 

난정이 여장부같다고 생각했다. 난정은 정말 조용하고 생각이 많아 보이지만 강하다. 내면이 강하다는 말은 난정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테니. 난정에 대해서는 마치 잔잔한 호수가 바람에 물결이 날리듯, 모든 장면에서 감명을 받았지만 유독 가슴 찌릿하게 난정을 끌어안아 주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다. 제사의 끝에 시선과의 일화가 오가는 시간에 난정은 시선과의 추억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시선과의 시간이 적었던 어린 해림이 혹여 소외감을 느낄까 한 사람쯤은 가만히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소설에서 해림과 난정이 함께 있는 장면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해림도, 난정도 과묵하기에 그렇게 친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난정은 해림을 사랑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 가족들에게는 그런 게 느껴졌다. 친하지 않아 보이는데 분명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게 가장 두드러지게 느껴진 것이 난정에게서라는 게 눈물나도록 좋았다.

 

그래서 난정과 명준은 부부로서 잘 어울린다. 시선과 시선의 딸들은 명준을 걔...? 라고 놀리지만 사실 세 자매만큼이나 잘 자란 것이 명준이니까. 누나들의 입김이라고는 하지만 난정에게 부부 사이가 괜찮냐고 물어보는 명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넘겨짚지 않고 난정에게 솔직히 말해 난정의 말과 생각을 들어준 것은 정말 잘한 것이었다. 그 쉬운 것이 요즘은 어려운 모양이니 통탄하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누구보다도 난정의 심지가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 강한 심지일수록 더 거세게 타오를 수 있으니까. 난정의 불길을 느끼고 싶다.

 

 

*이우윤과 박지수

 

우윤과 지수는 다른 결로 독립적이다. 독립적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나지만 성숙하게 독립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우윤은 본인에 대한 확실함은 부족하지만 성숙하게 독립적이다. 그리고 지수는 불안하게 느껴지지만 그 속에 분명한 기준이 존재하면서 독립적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끝은 우윤과 같기를 바란다.

 

우윤에게 확실함이 부족하다는 건 우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문체에서 느꼈다. 분명 우운은 성숙한 결정과 그에 걸맞은 단단한 노력을 해나감에도 불구하고 확실함이 결여된 느낌이 들었다. 자꾸만 본인이 약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우윤은 서핑을 하고 싶은 이유가 부모님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본인에게도 그걸 입증하고 싶었던 거라고 느꼈다. 자꾸만 약해지고 싶은 본인에게 사실은 하나도 약하지 않다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은 거. 그래야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들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모순적이게도 그런 점에서 우윤이 참 성숙하다고 느꼈다. 두려움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안다. 그 어려움을 해내지 못해 자꾸만 외면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우윤과 같은 성취를 얻어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온전히 나의 약함을 마주하고, 그를 넘고자 하는 기준을 정하고 뛰어넘는 쾌감을 언젠가는 그러쥐기를 바란다.

 

우윤이 보드에 발을 딛고 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등장 인물 중 우윤의 선물을 누구보다도 기대했던 나였다. 우윤이 그 파도를 담아 자신의 세계를 키우길 누구보다도 바랐다. 그런 우윤에게 나의 가장 멋진 수강생이라고 말해주는 부분에서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들이 느꼈을 벅찬 감정이 부러웠다. 이제 우윤은 자신이 버거워하던 현실도 넘을 수 있겠지. 그게 자신의 직업이 됐든, 제 건강을 과도하게 염려하는 부모님이 됐든. 그 파도 거품은 시선에게 보여주는 거였던 거다. 내가 이렇게 성장했다고, 할머니로부터 뻗어 나온 내가 이렇게 굳건하게 서 있다고 시선에게 보여주려던 게 결국 그것이었던 거다.

 

지수는 명은에 이어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인물이다. 뭘 하든 뚜렷한 방향 없이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고, 자신의 꿈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지만 불안해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안정되지 못한 꿈만큼 불안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꿈은 나에겐 재앙과 같다. 재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놓을 수 없다는 면에서 어쩌면 재앙보다 더 큰 고통일지도. 그렇기에 주변 상황에 쉽게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는 지수를 자유롭다고 표현하는 건 어느 정도의 불안함을 순화시킨 뜻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나 역시 지수에게서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지수가 꿈에 대해 느끼는 불안함일 뿐 지수의 안에는 뚜렷한 본인만의 기준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지수는 다소 충동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경로로 선물을 정했지만. 그를 성취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방향을 설정했다. 그리고 지수의 자유로운 성격은 결국 그 목표를 성취하게 했다. 그렇기에 지수의 충동적인 결정들도 이젠 믿을 수 있다. 본인의 기준을 가지는 걸 아직 해내지 못한 나로서는 정말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1차 목표를 단단한 기준 가지기로 정해야 할 것 같다.

 

 

*이명혜와 심명은과 홍경아

 

세 사람의 성이 모두 다른 것까지 이 자매들의 성격을 한 번에 보여주는 것 같아 기분 좋은 웃음부터 난다. 강하고 의지 곧은 첫째 명혜와 차분하고 진중해 부모님이 이혼하자마자 어머니의 성을 따른 명은, 그리고 본인의 입장이 확실한 막내 경아까지. 세 사람의 유대는 나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졌는데, 나는 그럴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만약 내게 배 다른 형제가 생긴다면 (아주 가망 없는 이야기도 아니니까) 나는 그 정도의 우애를 다질 수 있을까. 우선 같은 배에서 나온 동생과도 저 정도의 유대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일찌감치 포기하도록 하겠다. 그렇기에 세 자매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셋 모두 시선의 조각들이라 생각하면 수긍이 된다.

 

명혜에 대해서는 강한 첫째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조금은 슬퍼진다. 전형적인 책임감 강한 첫째가 바로 명혜고, 가끔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명혜만큼 책임감이 강하진 않지만서도 어쨌든 내 몫 이상의 책임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고, 그로부터 오는 부채감 역시 감당하기 힘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등장 인물들과 대화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주저않고 명혜에게 가 어떻게 시선을 사랑할 수 있었냐고 묻고 싶다. 나는 제 3자의 입장으로 시선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마지 않을 수 있었지만 딸의 입장에서는 다를 것 같아서였다. 명혜 역시 말한다. 시선을 사랑만 하기에는 쉽지 않았다고. 어떻게 시선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사실 나도 답은 알고 있다. 나도 내 가족을 사랑하긴 하니까. 일각에서는 애증을 가장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사랑과 증오가 공존할 수 있느냐고 묻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분명히 내 안에는 사랑과 증오가 분명하게 공존하고 있음에도 나 역시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명혜라면 그 해답을 알고 있을 것 같다.

 

명은과 같은 어른스러움은 내가 진짜 어른이 되어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명은처럼 조용한 강물이 흐르는 것 같은 어른은 죽어도 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나같은 성격도 어디선가는 환영받겠지만 가끔은 명은처럼 조용히 흐르고 싶을 때도 있는데 천성이 그걸 받쳐 주지 못한다. 아직도 나는 크게 치는 파도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화산과 명은은 참 잘 어울린다. 화산도 조용하게 내면의 마그마를 품고 있다가 크게 터지니까. 명은의 안에 있는 뜨거움이 좋다. 그걸 차분하게 조절할 수 있는 명은도.

 

막내라 그런가 분명 엄마뻘인 사람인데도 경아를 보면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과 딸을 대하는 모습이나 언니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경아는 여린 막내임이 분명하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참 마음이 좋다. 그런 성격으로 태어난 사람이 이복 남매가 무서워 성격 죽이고 살았다면 그것보다 마음 아픈 일이 또 있을까? 명혜도 명은도 명준도 아닌 경아와 시선만이 커피로 이어져 있다는 것도 참 좋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커피만은 피보다 진한 모양이니까.

 

 

*정규림과 정해림

 

방관은 왜 나쁠까. 규림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침묵했던 규림을 비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비겁하게 침묵했던 순간들이 날 막아섰다. 방관이 나쁜 이유는 내가 방관하고 있는 저 행위가 나쁘다는 걸, 너무 명백하게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기에 방관은 상대방을 죽인다. 정말 몰랐어, 와 같은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걸 방관자들도 안다. 몰랐던 게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우리는 방관하니까. 그 행위가 나쁜지, 내가 여기서 입을 열면 내가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지 너무 명백하게 알기 때문에 방관하는 거다. 배척당하기 싫어서, 원망받기 싫어서. 잠깐, 방관해도 원망당하는 건 똑같은데 왜 방관하느냐고? 그거야 방관했을 때의 원망은 약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받을 원망이면 약자의 것을 받는 게 나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쁜 사람인거다.이 모든 걸 알고도 방관 혹은 동조했던 내 자신이. 그리고 당신들이.

 

규림이 한빛에게 사과했으면 좋겠다. 변명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했지만, 진심어린 미안하다는 말은 한빛에게 꼭 하길 바란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으며 규림이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안다. 규림은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 할 때의 역겨움을 분명히 알고 있는 아이니까. 하지만 그것과 사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걸, 그리고 사과와 용서 역시 별개의 문제라는 것도 이제 규림은 알고 있을 테다. 용서를 바라지 않는 진심이 어린 사과는 꼭 필요하다. 이건 피해자를 향한 예의와 같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림을 사랑한다. 그 애가 가진 말줄임표를 사랑한다. 말을 줄일 줄 아는 건 능 력이다. 물 안에서 자유로운 그 애를 사랑한다. 자신밖에 할 줄 아는 방법으로 할머니를 추모할 줄 아는 그 애를 사랑한다.

 

해림에게는 더 해 줄 말이 없다. 등장 인물 중 가장 자신의 길이 확실한 그 아이에게 내가 배우면 배웠지 얹을 말은 전혀 없다. 아, 한 가지 있다. 어른들이 지구를 아프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리고 학교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학교가 아닌 곳에서도 이미 너는 많은 걸 배우고 있잖아. 언젠가 새처럼 하늘을 날아라, 해림아. 햇빛에 눈이 부셔도 날개를 펼친 너를 지켜보고 싶어.

 

 

*박태호

 

마지막으로 다루고자 하는 인물은 내가 두 번째로 인상 깊었던 박태호이다. 심시선의 첫째 사위 태호에게서 나는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가끔 내가 너무 평범하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이 드라마틱하긴 한데, 나 자신은 매우 평범하니까. 그런데 욕심도 많아서 타인에게 기억에 남는 사람이고 싶다. 좋은 사람으로 기억에 남고 싶은데, 나는 기억에 남을 만큼 비범하지도, 좋은 사람도 아니라 현재로서는 조금 힘든 일인 것 같다. 하와이 길에서 자신을 부른 후배를 보고 태호는 자신이 멀리서 보고도 부르고 싶은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생각해봤다. 나를 낯선 곳에서 마주쳤을 때 반갑게 인사해줄 사람은 몇이나 될까. 무난하고 평범한 태호는 사실 그렇지 않다. 가족들이 전부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와이를 누빌 때, 가족들의 빵과 음료를 사놓고 수건 빨래를 해놓는 사람은 태호였다. 태호가 말라사다를 위한 자전거 실험을 시작하자마자 가족들의 아침이 번잡해질 정도로 태호는 중요한 가족 구성원이었다. 직장에서의 태호도 그런 사람이었기에 후배들도 태호를 불러 인사했겠지. 그런 사람이 하늘을 누볐다는 게 잘 어울린다. 태호의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짧고 분명한 인상을 남긴 등장 인물이었다.

 

시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 여자들이 얼마나 강인하게 버텨왔고, 또 많은 것을 일궈 왔는지. 지금은 그때보다 여자들의 목소리를 내기 쉬운 시대인만큼 내가 해야 하는 일들도 많을 것이다.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그만하기로 했다. 시선은 하면 된다고 책 전반에 걸쳐서 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림을 사랑했던 시선이 더 이상 그리지 못 하게 된 것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재능 있는 여성을 잃는 건 이미 수 없이 행해진 비극임으로. 그런 비극을 스스로 자행하는 일은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되겠지.

 

작가의 말을 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소설은 온전히 독자의 해석에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글을 썼던 시간에도 유효한 생각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작가의 의도를 독자들이 알아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또 다른 시선으로 인식하는 게 내 세계를 넓히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 후로 작가의 말을 꼭 챙겨보는 편이다. 이번에도 그랬고, 잘한 선택이었다. 정세랑 작가님이 한국어로 소설을 써서 참 다행이라고 느꼈다. 누군가와 모국어를 공유한다는 게 이렇게 감사할 일일 줄이야. 존재한 적 없던 심시선처럼 죽는 날까지 쓰겠다.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이다. 나 역시 존재한 적 없었던 심시선처럼 죽는 날까지 쓰겠다. 무엇이 됐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쓰겠다.

 

 

[황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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