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보여주는 기다림의 미학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2.2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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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너는 뭘 가장 잘하니?'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답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저는 기다리는 것에 능숙해요."

 

감히 ‘능숙하다’는 표현을 붙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를 지루하지 않게 하는 수만 가지 방법을 알고 있는 동시에, 그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동안에도 내가 ‘기다리는 상태’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핵심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다림의 진공상태에 속지 않는 것. 막연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이 모든 사소한 것은 금새 잊다가도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절대 잊지 않았듯이 말이다. 두 사람의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와 행동들이, 숱한 기다림의 순간을 겪어 온 우리의 모습과 오버랩 되는 체험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기다림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전무할 것이고, 그 순간의 막연한 감각을 상기시킨다는 사실만으로 <고도를 기다리면>의 예술적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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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때는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적이 드문 가게에서 일하며 하며 ‘손님’이라는 이름의 고도를 기다리곤 했다. 빈 홀에 앉아 창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혼자 묘한 상상에 빠지기도 하고, 잠깐이라도 가게 앞을 서성이는 사람이 있으면 혹시 손님일까 착각해 몸을 벌떡 일으키기도 하고, 괜히 신발 끈을 풀어 다시 묶기도 하며, 가게 사장님과 별 의미 없는 시간 때우기용 대화를 한참이나 나누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단 한 마디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대화를 말이다. 기다림이란 부피가 큼에도 한 없이 가벼운, 마치 터지기 직전의 풍선과도 같은 것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은 모자와 신발을 끊임없이 만지고 고쳐 쓰는 장면에서 웃음이 나왔다면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일 것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우리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작가인 사뮈엘 베케트는 “내가 이들이 기다리는 고도의 정체를 알았다면 확실히 묘사했을 것이다.”라며 자신도 고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여느 독자와 같이 나만의 고도를 상상하기로 했다.

 

나는 이들이, 동시에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는 ‘죽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장에서 “내일 같이 목이나 매세. 고도가 안 온다면 말이야.”라는 블라디미르는 고도가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에 “그럼 살아야지.”하고 말한다. 삶을 삶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묘한 믿음을 갖고 사는 나이다. 흐린 날이 햇빛 좋은 날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듯이, 죽음을 담보로 하기에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따라서 고도라는 이름의 죽음이 온다는 확신이 있다면 기다림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아감’은 더욱 가치 있고 간절한 행위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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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 걸터 앉게 되는 것이오. 무덤에 걸터 앉아 이 세상에 어렵사리 태어났지.” 포조의 대사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긴밀히 죽음과 결부된 채 흘러가는 지를 상기하는 말이기도 하다. 주인공 둘의 기다림은 다소 허무하고 기약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우주적 관점에서 본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각자의 삶을 일궈나가는 과정은 치열하지만 우리의 삶을 훑는 거대한 눈 앞에서는 그런 행위들이 그저 모자를 털고 신발을 고쳐 신는 것만큼이나 부질없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소한 삶의 주체로, 무덤에 걸터 앉은 채 세상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만큼의 가치를 지닌 희망도 없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처지인 것이고, 그들은 우리의 초상과 같다. 인물들의 어수룩함과 엉뚱한 면모에 실소를 내뱉다가도 완전히 객관화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에 찝찝함까지 남기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이끼 같은 상념들이 떨어져 나갈 때를 또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보여준 기다림의 미학 아닐까.

 

나는 매 순간 끊임없이 작은 고도들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내 삶을 굴리는 원동력은 ‘끝’이라는 큰 고도가 곧 올 것이고 와야 한다는 당위에서부터 시작된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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