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안의 양초가 다 타버린 것 같은 순간에 [사람]

글 입력 2021.02.22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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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은 익숙한 선을 긋고 싶다는 마음과 비슷하게 떠오른다.


그림은 정말 어렸을 때부터 그렸다. 오래 그렸으니 또래들보다는 잘 그리는 편이었다. 타고난 게 아주 없지야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러니까, 내 것을 만드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진로조사서를 냈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몇 년 간 한결같이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적었던 칸에 다른 직업을 써냈다(뭐였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중학생의 진로조사서가 큰 효력이 있지는 않겠지만, 공백의 칸을 두고 망설였던 그 잠깐의 시간이 아직까지도 또렷하다. 진로조사서 종이를 앞으로 제출하면서, 뭔가가 돌아오지 않겠구나, 내가 지금 뭔가를 완전히 떠나보내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그리는 건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오래된 일이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어느 부분이 내게서는 아예 빠진 상태로 출하된 것 같았다. 흰 종이를 앞에 두고는 늘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매번 비참했다. 어느새 그림을 그리는 일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내 안에서는 그리고 싶은 새로운 장면이 아닌, 늘 그려왔던 익숙한 선만이 떠올랐다. 수백 번은 그렸을 선 모양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늘 비슷하게 그려졌고 비슷하게 만족스러웠고 비슷하게 실망스러웠다. 이런 스스로에게 그럭저럭 적응하고 지내다가도 자기만의 것을 그리는, 혹은 그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닌 사람’이라는 확신만 점점 강해졌다. 재능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기질은 몇 년 뒤 입시 미술을 할 때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작동했다. 이것도 슬픈 일인 것 같지만. 약 3년 간의 입시 끝에 나는 디자인과에 입학했다. 자연스러운 선택이긴 했으나 한 편으로 최선은 아닌 느낌이 들었다. 입학 뒤에 학과 공부와 과제를 해내면서 이 느낌은 조금 더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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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부터 각종 만화 잡지는 다 읽었는데,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윤지운 작가의 <눈부시도록>을 한참 좋아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부유하는 20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윤지운 작가만의 서정적이고 사려깊은 방식을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그 중 인용하고 싶은 대사가 있다.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여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갔지만 결국 돌아오게 되는 주인공 동생의 메일 중 일부이다.


"-하지만 아빠, 의욕이나 다짐이나, 각오로는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 있어. 재능이란 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양초같은 거야. 누구나 가지고는 있지만 길이도 다르고 굵기도 달라. 불을 붙였을 때 밝게 빛나는 건 모두가 같지만 언제까지 밝을 수 있을지는 꺼질 때가 되어서야 알 수가 있어. 누군가의 것은 생일케이크의 초처럼 가늘고 연약하고 누군가의 것은 교회에서 쓰는 초처럼 평생 동안 빛나. 내 초는 엄마나 아빠나 언니나 내 생각보다도 좀 더 가늘었던 것 같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기를 쓸수록, 노력할수록 명백해져. 나는 여기까지고 나는 이만큼이고 나는 끝을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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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들이 마음에 꾹, 박히는 것처럼 와닿았다. 재능이 양초라면 내 재능은 고작 식당 테이블에 올라오는 작은 티라이트 정도 였나보지.


그림 그리는 일을 생각할 때마다 슬펐던 시기가 있었다. 좋은 그림과 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볼 때는 턱 끝까지 미움이 차올랐다. 좋아하는 것과 좋아했던 사람들을 미워하다가 결국 스스로를 가장 미워하게 되는 내가 싫었다. 최선이 이게 아니었으리라는 확신만이 강해졌다. ‘이게 아닌’, 또 다른 최선을 전부 쏟아내고 마주한 끝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끝과 뭐가 달랐을까. 더 허망하고 더 슬펐을까, 아니면 후련하기라도 했을까.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나는 결국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양초는 그 정도였으니까. 이 사실을 받아들인 현재의 나는 낙서를 하는 게 예전만큼 괴롭지 않다. 도착지 없이 뱅글뱅글 돌기만 했던 미움들은 내 안에 고요히 앉아있다. 미움이 고요해지고 나니 조금씩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나는 다른 진로를 위해 이번 년도부터 복수전공을 시작한다. 그 때 끝을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시작이 더 늦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사람에게 주어진 양초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 티라이트는 분명 아주아주 희미해졌지만, 그 불이 희미해지고 나서야 주위의 아직 켜지지 않은 다른 초들이 보였다.


저 메일을 보낸 동생을 실제로 만날 수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네 안의 양초는 그것만이 아닐 거라고. 너는 지금 그 양초의 완벽한 끝을 마주한 기분이겠지만, 초와 초는 불을 주고 받을 수도, 녹은 촛농으로 또 다른 초를 만드는 것까지도 가능하다고. 양초의 끝은 너의 끝이 아니라고.

 

  

[송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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