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스라이팅, 당신을 부둥켜안고 눈물로 전하는 말 [문화 전반]

모든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아침이 올 때까지 속삭여주고 싶습니다
글 입력 2021.02.21 19:5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아침이 올 때까지 나는 같은 말을 여러 번이고 할 자신이 있습니다


 

[크기변환]sad-505857_1920.jpg

 

 

나는 멈춰버린 시간 속 고통에 몸부림치는 당신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생존자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이 글을 보게 되는 이가 얼마나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저 당신을 껴안은 채 모든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아침이 올 때까지 속삭여주고 싶습니다.


 

말할 곳은 저 달, 저 별 밖에는 없으면서 

마른 등허리를 다독여줄 것은 

하늘에 뜬 저 달과 별들이 전부면서

 

왜 오늘도 어김없이 밤은 오느냐고

아무도 찾지 않는 이 방에는 왜

꽃 대신 늘 어둠이 먼저 피느냐고

 

왜 밤은 나를 울게 하느냐고

 

- 밤은 죄가 없다, 서덕준

 

 

보이지 않는 아픔은 얼마나 고독합니까. 타인에 대한 원망보다 피해자의 영혼을 깨부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입니다. 산산조각 난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결코 예전과 같지 못합니다. 심장이 찢겨 나가는 고통에도 그것이 환통은 아닐지 의심하는 것은 증오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이유는 그 한 방울의 눈물이 얼마나 깊은 감정과 기억을 담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곪아가는 당신의 일부를 외면하는 삶은 얼마나 악착같습니까.

 

 

 

Gaslighting (영화 Gaslight),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달랐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심리학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지배력을 행사하며 정신을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이 언어는 영화 'gaslight'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크기변환]캡처1.PNG


 

그레고리는 유럽 왕가의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폴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남자입니다. 소유주로 알려진 그녀의 이모를 죽였음에도 원하던 보석을 얻지 못하자 그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폴라와 결혼합니다. 그때부터 가스라이팅이 시작됩니다.


그레고리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소중한 브로치를 폴라의 가방에 넣어줍니다. 그리고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암시를 한 뒤, 몰래 그녀의 가방에서 브로치를 빼냅니다. 만져보지도 못한 브로치가 사라지자 당황한 폴라는 그녀를 탓하는 그레고리에게 거듭 미안하다는 사과를 합니다.

 

이때 그레고리는 그녀를 탓하면서도, 내가 당신을 용서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며 감정적으로 그녀를 구슬립니다. 이 사건으로 폴라는 점차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다만 돌아갈 곳이 없었어요


 

 

 

그레고리의 또 다른 전략은 폴라를 경시하여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정부에게 아름답고 피부가 좋다며 칭찬을 일삼는 동시에 폴라에게 화장법을 배우라며 일침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폴라는 가정부의 눈에서 멸시와 조롱의 기운을 감지하고는 그레고리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그는 폴라가 목격한 것은 환각이며,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에 오히려 자신이 슬퍼진다는 화술로 폴라를 정신병자로 몰아갑니다.


 

폴라: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그레고리: 하인들을 동등하게 대하고 싶다길래 그랬소.

폴라: 그러니까 낸시가 나를 깔보죠.

그레고리: 깔본다고? 왜 그런 생각을 하지?

폴라: 그녀의 태도며 말투며 쳐다보는 표정을 봐요!

그레고리: 뭐? 또 없는 일을 상상하기 시작하는 거야? 아니겠지, 폴라?

폴라: 물론 아니죠!

그레고리: 외면하지마. 이야기해. 낸시가 정말 당신을 깔본다는 거야? 대답해.

폴라: 아니요.

그레고리: 다행이야. 당신이 아프거나 환각을 본다면 나는 정말 슬플거야.

 


폴라의 주변에는 점차 사람들이 없어집니다. 그레고리가 의도적으로 물건을 반복적으로 치우고, 그 물건들은 폴라에게서 나오며, 그녀의 상태를 판단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남지 않도록 모든 외부인과의 접촉을 차단합니다.

 

밤이면 이모의 다락방을 뒤지는 그레고리로 인해 가스등이 깜빡이고는 했는데, 폴라는 이를 보고 자신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그레고리에게 자신의 증상에 대해 말해보지만, 그레고리는 걱정의 말들로 폴라를 다시금 세뇌합니다.

 

 

 

아주 은밀하고 천천히 돌아온 기억에 요동치는 심장



가해자가 누구이든 대부분의 가스라이팅은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피해자가 보였던 존경이, 사랑이, 애정이, 연민이 자신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비참함을 넘어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분명 스스로를 망가뜨려 가면서까지 상대방을 위해 희생했는데, 그 진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가해자의 공통적인 수법은 책임을 교묘하게 타인에게 돌려 자신의 죄책감을 더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피해자는 그 시간과 노력은 어디로 간 것인지, 이미 무너져버린 스스로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지 대상을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모든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게 됩니다.

 

 

[크기변환]woman-1958723_1920.jpg


 

기억은 아주 천천하고 은밀하게 돌아옵니다. 이와 동시에 피해자는 무의식적 자기혐오에 물들어갑니다. 더 이상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책하며 의심합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피해자의 가슴 속에 남아 오래도록 요동칠 뿐입니다.

 

 

 

있잖아,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이전과 같은 세상이 맞아?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타인의 감정에 쉽게 공감하는 사람이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피해자를 탓하는 말입니다. 당당하고 자존감 높은 사람도 얼마든지 가스라이팅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그 굴레에 빠지게 되면 타인의 도움으로도 결코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가 원망하는 것은 가해자가 아닌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얀 도화지에 검은 물이 들듯이, 피해자는 점차 세상의 빛을 피하여 숨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영혼을 파괴한다. 아마 최악의 순간은 피해자 스스로 과거의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깨닫는 순간일 것이다. 피해자는 자신감,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 자신의 관점 그리고 용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로빈 스턴

 

 

[크기변환]girl-3422711_1920.jpg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 즐거웠던 일들이 더 이상 재미있지 않고, 친구를 만나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혐오감에 시달립니다. 아무런 자극이 없는 두려움만 남은 건조한 삶은 과거와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가스라이팅에 물들기 이전 나를 마주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잘라내 버리고, 감정 기복을 핑계로 모든 연락처와 사진을 지우기도 합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것들에 집착하며 외딴 섬에서 살아갑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과 망가져 버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은 개인을 온전히 잠식합니다.

 

 

 

수백 번도 넘게 들어온 위로의 말들에 눈물 흘리는 당신



나는 그런 당신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고, 돌이킬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온전히 당신을 위해 존재하고 잃어버린 시간에 수치스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나는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보다 강인하다 되뇌며 진심을 담아 당신을 보살피면 됩니다.


 

네가 아침잠에서 깨어 방문을 열었을 때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별들

 

나는 그 별을 함께 주워 담거나

그 별에 상처 난 너의 팔을 잡아 주고 싶었다

 

지나보면 역시나 난 할 줄 아는 게 없었는데 너에겐 특히나 그랬다

 

1226456, 성동혁

 

 

milky-way-1023340_1920.jpg

 

 

정상적인 사람은 타인을 노예로 만들지 않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보이지 않겠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당신을 의지할 수 있는 동료이자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 사랑하기 위해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신뢰함으로써 이용당했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의지하고 싶은 감정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실질적인 조언이 아닌, 수백 번도 넘게 들어온 위로의 말들이 여전히 절실하게 와닿는 것도 결코 당신의 나약함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것들의 원인으로 당신을 지목하는 것에는 이미 너무 지쳐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내 소유의 감정, 내가 내뱉는 언어입니다


 

이 글은 모든 피해자를 정형화시키는 글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이 본 만큼 세상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경험하고 목격한 것들은 다릅니다. 나는 이외에도 수많은 사례와 기억과 감정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며 더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크기변환]woman-2609115_1920.jpg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아픈 기억이 스며들어 어둠 속으로 도망가는 당신은 충분히 아파해도 괜찮습니다.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두려우면 두렵다고 소리 내어 말해도 그것은 결코 의미 없는 외침이 아닙니다. 텅 빈 말들이 아니라 당신만이 느끼고 소유할 수 있는 감정들로 꽉 찬 언어입니다.

 

 

 

아,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나봐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 혹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냐고 물으면 그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떠한 영화를 보고 이 글을 적게 되었냐는 물음에도 침묵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다만 나는 이 외침이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에디터_허향기.jpg

 

 

[허향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38533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1.05.13, 22시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부일로205번길 54 824호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1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