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제주도 미술관 방문기

제주에서 벌써 네 번째 - 1부
글 입력 2021.02.2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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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다닐 때 목적을 정해두는 편이다. 지난 태국 치앙마이 여행에서는 짧은 방문이 아닌 한 달 동안의 일정을 계획하며 현지인들의 로컬 플레이스들을 탐방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내는 것을 목적으로 다녔고, 첫 여행이었던 일본 큐슈 여행에서는 이방인이 된 느낌을 만끽하며 혼자서 새로운 경험들을 해보는 것에 집중했다. 코로나로 인해 현재는 여행을 다니기가 힘들어진 상황이지만, 늘 휴식기가 오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성미를 가진 나인지라 이번에는 친구들과 제주 항공권을 끊게 되었다.

 

제주는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가본 사람이 대부분일 정도로 흔한 여행지이기도 하다. 나 역시 매우 어렸을 적 친척들과 함께 한 번,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한 번, 그리고 2017년 초에도 가족들과 함께 드라이빙 여행으로 제주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앞선 두 번의 제주에서는 내가 일정에 관여할 수 없었지만, 지난 제주에서는 한라산 등반과 제주의 해안선을 따라 바다를 원 없이 보는 것을 목적으로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 제주는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섬이기에 이번에도 '자연 속의 힐링'은 빠질 수 없는 테마였다. 이와 더불어 미술대학 동기인 친구들과의 여행이니 제주의 미술관들을 방문해보자는 목적이 추가되었고, 인스타 핫플레이스나 맛집 리스트를 참고하는 것은 모두들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다녀온 장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부는 제주에서 방문한 미술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민미술관


 

찾아보면 제주도엔 미술관이 상당히 많다. 그 중 꼭 방문하고자 했던 곳이 바로 섭지코지에 있는 유민미술관인데, 상설전으로 이루어지는 아르누보 컬렉션보다 안도 타다오(あんどうただお)가 건축한 미술관 건물이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원주의 뮤지엄 산, 제주의 유민미술관과 본태박물관 등을 국내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자연요소와 노출 콘크리트를 조화롭게 해석하는 건축적 특징이 눈에 띄는 건축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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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이면서도 자연적인 속성이 함께 공존하는 그의 건축은 유민미술관에도 잘 드러나 있다. 나는 마침 비가 내릴 때 미술관에 들어가서 하늘이 개일 때 나오게 되었는데, 덕분에 특유의 물과 빛의 효과를 잘 관찰할 수 있었다. 매표소에서 본관으로 내려가는 길 역시 비가 내려도 아름다운, 아니 오히려 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비에 젖은 현무암의 짙은 빛깔이 감귤 빛의 수풀 색과 어우러졌고, 멀리 보이는 본관은 낮은 직사각 형태로 하늘을 가리지 않으면서 조용히 존재하는 듯 보였다. 돌로 세워진 입구를 따라가면 양쪽에 물이 흐르는 진입로로 들어설 수 있으며, 길의 끝에는 미술관 건물을 닮은 직사각형 프레임 너머로 풀을 뜯는 말과 성산 일출봉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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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은 신발을 벗고 비치된 슬리퍼를 신어야 입장할 수 있는데, 원목 마루에 다다미가 깔려 있어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매우 조용한 분위기에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중앙의 원형을 중심으로 십자가 형태로 아르누보 컬렉션이 뻗어 나가며, 영감의 방, 명작의 방, 아르누보 전성기의 방, 램프의 방이라는 4개의 방이 따로 존재한 이곳은 공예 작품과 프로젝션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에밀 갈레(Émile Gallé)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낭시파(École de Nancy)의 유리공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기에 이 상설 전시에서는 건축과도 어우러지는 자연의 모티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중국이나 고대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형태의 공예품들도 확인할 수 있다. 유려한 곡선과 다채로운 색깔의 완성도는 물론, 제작에 이용된 여러 공예 기법들에 대한 설명도 포함되어 있는 전시니 그 건축만큼이나 유의미한 볼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빛의 벙커



유민미술관을 방문하는 겸 섭지코지 관광도 마치고,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빛의 벙커로 향했다. 현재 제주에서 어떤 미술관보다 주목받고 있는 공간이면서도 최근의 전시 양상 중 가장 많은 말이 쏟아지고 있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를 하고 있는 곳, 그렇기 때문에 빛의 벙커를 꼭 들려보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민미술관에서의 기분 좋은 경험들을 망칠 정도로 부족한 점이 많고 만족스럽지 못한 방문이었다. 빛의 벙커는 서울의 SeMA 벙커처럼 국가에서 특정 목적으로 만들었다가 사용되지 않아 전시장으로 변모한 공간 중 하나로, 구스타프 클림트로 첫 전시를 마치고 현재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작품을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해 전시를 열고 있다.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기대와 함께 들어선 순간 바로 실망만 이어졌다.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관광객들의 태도는 둘째 치더라도, 그렇게 강조하던 몰입형 미디어아트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너무나 많은 간극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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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흔한 네이버 예약 할인조차 없이 입장료 15,000원을 그대로 내고 들어선 공간은 생각보다 너무 좁았고, 나눠놓은 섹션 역시 별다른 의미가 없었으며 같은 영상만을 계속해서 틀어놓을 뿐이었다. 오히려 공간 전체를 하나의 스크린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연결시켰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중간 중간 세워진 기둥들은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었는데, 거울이나 스크린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닌 불투명한 검은 반사 소재로 세워져 시야를 방해하고 몰입을 확 깨는 역할을 하였다. 가장 큰 규모로 끊김 없이 프로젝션을 보여주는 벽면의 반대편에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앉거나 서서 관람 중이었는데,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었다.

 

거기에 미디어아트 제작 수준은 또 한 번 실망을 안겨줬다. 작품들을 반복적으로 배치하는 구성에 전환은 마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쇼에서나 볼 수 있는 느린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으로 점철되었고, 음악은 웅장하긴 하나 몰입에 도움을 주진 못했다. 특히나 눈에 들어오는 깨진 픽셀들이 작품을 조잡하게 보이게 해서, 기존 두 작가가 가진 붓 터치의 질감마저 딱딱하고 건조하게 앗아가 버렸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나는 전시장에서 내 사진을 찍지 않는 편이라, 입장료가 너무 아까운 전시였다.

 

 

 

김창열 미술관


 

이틀 뒤 제주도 서쪽으로 넘어가서 방문한 김창열 미술관은 의외로 가장 만족스러운 전시를 보게 해주었다. '물방울 화가'로 잘 알려진 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전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실견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과연 느낌이 어떠할지 궁금증이 들었다. 내가 방문한 2월 현재 시점으로는 <매체와 물방울>, <물방울의 변주> 두 전시를 진행 중이었고, 덕분에 도합 40점의 김창열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불과 한 달 전 작고하신 작가분의 전시이기에, 추모의 마음으로 뜻깊게 보았다.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로 되돌려보내기 위한 행위이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에고'(ego)의 신장을 바라고 있으나 나는 에고의 소멸을 지향하며 그 표현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집착이라고 불릴 정도로 물방울을 그리기를 반복한 작가의 행위는 불교나 도가 사상에서 드러나는 수행자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의 작품 제목으로도 쓰였던 '회귀'(Recurrence)는 미술관의 건축으로도 연결되는데, 돌아올 회(回)자를 닮은 건물은 중앙 천장이 트여 있으며 이 사각 테두리를 따라 건물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있다. 이곳은 빛의 중정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에 담긴 물에는 하늘이 반사되어 푸른 빛을 띠고 물방울 모양의 유리 조각엔 햇빛이 들어와 반짝이며 빛나는 것이 미술관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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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로비와 아트샵이 있는 널찍하게 빠진 공간에 있는 설치 작업이나,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통로 공간에 배치된 회화 작업들의 위치 선정 역시 좋다. 특히 작가가 화면에 임의적으로 설정했던 빛의 방향을 따라 조명을 두는 등 세심한 디스플레이가 감상 경험을 더욱 향상시켰다. 전시실을 이동할수록 확대되는 작품의 스케일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고, 군더더기 없는 전시실의 깔끔함은 평범할지라도 세세한 디테일에서 작품의 가치를 높여주었다. 신문지 위, 나무판 위, 심지어 모래 위에서도 실제처럼 보이는 물방울의 섬세한 터치는 계속해서 봐도 질리지 않았고, 대형 화폭에 수없이 들어찬 물방울들을 바라보면서는 작가의 강한 집념과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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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아쉽게도 일정상 방문하지 못한 곳들이 있었는데, 바로 안도 타다오의 또 다른 건축으로 유명한 본태박물관이다. 현재 코로나로 인해 제임스 터렐의 작업을 관람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여 발걸음을 돌렸지만,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이나 한국 공예품, 현대미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본태박물관만의 볼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된다.

 

또한 이타미 준(いたみじゅん)의 건축들 역시 제주도에 몇 군데가 존재하는데, 포도호텔이나 방주교회 등 다른 목적이지만 충분히 건축을 감상하기 위해 방문할 가치가 있는 장소들이 있고 미술관인 수풍석 뮤지엄도 있다. 사실 수풍석 뮤지엄이 상당히 기대되는 곳이긴 한데, 아쉽게도 예약 날짜가 전부 차서 방문할 수 없었다. 혹시나 다음에 제주를 여행하게 된다면, 잊지 않고 꼭 들릴 제1의 목적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혹평을 내렸던 빛의 벙커 이외에도, 몰입형 미디어아트를 하는 전시장이 제주에 한 곳이 더 있다. 아르떼 뮤지엄이라는 이곳은 코엑스에서 'WAVE' 작품을 선보였던 d'strict 컴퍼니가 제공하는 전시를 진행 중이며, 아마도 빛의 벙커보다는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빛의 벙커보다는 저번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과 이번 2021 딜라이트 서울을 전시한 인사센트럴뮤지엄의 미디어아트가 더 괜찮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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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에서 계속, 제주도의 힐링 장소들과 먹거리를 다룹니다.

 

 

[황인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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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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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 제주도의 미술관에 대해 알게되어서 좋았어요 전시회의 아쉬웠던 점마저 상세히 알려주니 읽는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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