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내가 내게 나일 그때에

나를 믿고 나를 굳건히 다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글 입력 2021.02.1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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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내가 나일 그때>. 최은미 작가가 저술한 동명의 단편 소설을 읽고 이 작품의 제목이 주는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내게, 내가, 나일 그때. 8자밖에 되지 않는 제목 중에 '나'를 지칭하는 단어가 3개나 들어간 이 짤막하고도 확실한 주체성을 가진 제목은 말 그대로 내게 내가 나일 그때였던 시간에 대해 다시 되돌아볼 힘이 돼주었다. 내가 나를 다잡기 위해 했던 말들은 어떤 것이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바라봤었는지.

 

며칠간 그런 생각에 빠지다 보니 온전히 '나'를 다잡기 위해 자신의 피해 사실을 힘겹게 알렸던 소설 속 주인공의 행보가 계속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름을 걸고 고백하는 사람들. 자신에게 돌아오는 화살이 있을 걸 분명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입을 열어야만 했던 사람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의 용기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 노력해보는 시기다. 나는 그 모든 노력과 용기들을 좋아한다. 요즘에는 그걸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좋다'라는 말의 어감을 잘 체감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좋아하는 것 같다'라고 문장을 마친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하면 믿음이 좀 갈까. 종종 누군가 취미를 물을 때 음악 듣는 걸 좋아해, 혹은 책 읽는 걸 좋아해. 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몇 주간은 책을 한 장도 안 읽을 때도 있고, 노래 한 곡을 듣는 것도 부담스러운 때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좋다'라는 단어에 항상성이 있어야 하는 건지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았다.

 

이 논제를 사람에게 붙여도 똑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좋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유동적이니까. 우리가 늘 '좋은 사람'이라고 보는 사람도 남에겐 악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 어제는 좋았던 그 사람이 오늘은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한순간에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짓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처럼. 누군가는 내게 좋은 에디터라고 말을 하지만 누가 봤을 때는 아주 형편없는 에디터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만일 내가 모르는, 세상이 정해둔 객관적인 '좋음'의 기준이 있다면 거기에 내가 부합할지는 잘 모르겠다. 가끔 고집스럽고, 가끔 너무 직렬적인 방향만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좋음'을 객관적인 지표와 검증된 실력으로만 구분 짓는다면 나는 그 축에 속하는 에디터는 전혀 아니라고 보는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는 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다. 오해와 혐오로 얼룩진 세상을 조금이나마 내 글로써 변화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고, 나는 이 욕심이 나를 '좋은 에디터'로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해보건대, 이 일은 필시 용기를 가져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온전히 나로써 존재할 때, 나를 제일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에디터'의 기준에 조금씩 부합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시선은 용기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만의 주관을 가진 에디터에게는 용기가 있다. 그러나 그 용기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쓰였다면 정당한 힘을 가진 용기는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나에게 '좋음'은 이렇다. 모두에게 상처 주지 않는 선에서 내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용기.

 

내게 내가 나일 그때. 흔들리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내 의견을 전달할 용기가 생길 때. 그래야만 할 때. 그 용기가 일으킬 파도를 감수하면서까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드는 그때. 나는 그 용기를 가진 사람을 '좋은 에디터'로 명명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이는 에디터를 떠나 어떤 직업에서든지 통용될 수 있는 '좋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모두가 어렴풋이 생각하는 자신만의 '좋음'의 기준을 세우고 그를 위해 나아가기만 할 뿐이라고 믿는다. 복잡하기만 한 세상에 '좋음'의 기준까지 누군가 세워버린다면 더 혼잡한 세상이 될 것이니까. 어쩌면 '좋음'에 기준이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각자 해석하고 각자가 기준을 세우도록 일부러 빈칸을 남겨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빈칸을 용기라는 단어로 채운 만큼, 다른 사람들의 빈칸에는 더 다채로운 언어들이 채워졌으면 좋겠다. 조금 더 확장된 시선으로 '좋음'의 기준을 세우게끔.

 

 

[이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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