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위스키 한 잔 정돈 괜찮잖아? - 소공녀 [영화]

글 입력 2021.02.1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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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도우미로 성실하게 일하며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안재홍)를 보는 낙으로 살아가는 ‘미소’(이솜). 그런 그녀에게 2015년은 새해 첫날부터 비극을 안겨 준다. 2500원이었던 담뱃값이 4500원으로 훌쩍 뛰어버린 것.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주인이 월세까지 올려버린 상황. 어쩔 수 없이 담배와 위스키, 웰세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선택의 순간 앞에서 도저히 담배와 위스키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었던 ‘미소’는 과감하게 집을 떠나 자신의 취향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달걀 한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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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영화계에서 각본가로 일하고 있는 한 지인에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 데뷔하기 전에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달걀 한판으로 한 달을 나기도 했어.”


참 뻔한 이야기구나 싶었다. 과거의 궁핍을 장식 삼아 현재의 안정을 보다 성공에 가깝게 꾸미기 위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 듣고 흘려버려야지 싶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의 이야기는 내 안에 머물러 있다. 그 뒤로 이어진 말 한마디가 닻을 내렸기 때문이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좀 궁상맞을 각오만 되어 있으면 달걀 한판만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거야, 사람은.”


이후로 지인은 써낸 각본이 나름의 성공을 거둬도, 나름의 실패를 앓아도, 그때를 떠올리면서 나름 나름의 이야기를 계속 써나갈 힘을 얻는다고 했다. 세상으로부터 몇 번을 낙오되더라도, 이 한 몸 굶어 죽이진 않을 최소한의 환경(Microhabitat)을 지켜낼 수는 있을 거란 자신. 그 환경의 최소한도는 그리 많은 것을 요구하진 않는다는 확신. 그를 꿈의 낙오로부터 지켜주고 있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영화 <소공녀>에서 옛 밴드 멤버들을 찾아갈 때마다 계란 한 판씩을 사 들고 가는 ‘미소’를 보며 이 일화를 떠올렸다면, 이건 너무 샛길로 새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하지만 과연 <소공녀>만큼 샛길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영화가 있을런지. 모두가 ‘집’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뻗어있는 고속도로 위를 달릴 때, ‘생각과 취향’을 향해 나 있는 샛길을 따라 우회하는 미소(이솜)의 전진이 곧 <소공녀>의 모든 것일 텐데.

 

     

 

현금 수납기로부터의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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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녀의 전진에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그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기도 모르게 포기되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첫 장면에서부터 논문을 쓰는 친구의 가사 도우미 일을 마친 미소는 그녀에게 부탁하여 검은 봉다리에 쌀을 얻어 나온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에선 봉다리에 난 구멍 사이로 쌀알들이 흘러나와 미소의 뒤로 길처럼 이어지고 있고, 그걸 또 비둘기 떼가 쪼아 먹어대고 있다. 미소는 담배를 피우느라 이를 눈치채지 못하다가,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허탈한 표정으로 봉다리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들쑤셔 본다.


그녀가 걷고 있는, 그리고 걸어가야 할 길이란 그런 것이다. 내딛는 걸음만큼이 곧 길이 되지만 그 위로 나의 것이라 믿었던 것들을 조금씩 잃어가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그 흔적마저 언제 세상에게 쪼아 먹혀 사라져 버릴지 알 수 없는 길. ‘담배’를 피우기 위해 ‘쌀’로부터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 흔히 낙오자의 말로라 손가락질 받는 그런 결말이다.


미소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 길을 걷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도 남들처럼 집이 있었다. 비록 한겨울엔 실내에서조차 내복에서부터 외투까지 겹겹이 껴입어야만 하는 집이긴 했지만, 그래도 집은 집이었다. 내야만 하는 월세가 있었고, 잡다한 세금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 남의 집을 청소해주고 일당을 받았다. 노동과 보수의 등가교환을 통한 가계 유지. 모두가 따르는 그 법칙을 그녀 또한 별 저항 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런 ‘미소’의 하루는 그녀가 매일 밤 일기처럼 써내려가는 가계부의 항목들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세금’, ‘약값’, ‘월세’, ‘담뱃값’, ‘위스키 값’. 어디서 주워왔는지, 구멍가게에서나 쓸법한 현금 수납기의 칸 별로 나뉘어 있는 이 항목들은 그녀의 삶을 완성된 퍼즐 조각처럼 빈틈없이 짜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2014년의 마지막 날을 위한 불꽃놀이 직후 ‘담뱃값 인상’이라는 시련과 함께 찾아온 2015년의 첫날이 그녀에게 새로운 판을 들이민다. 쥐고 있는 조각 중 몇 개를 버리지 않고선 안착할 수 없는 비좁은 판을. 그 판 위에서 가계부를 적는 미소의 펜 끝은 ‘위스키’와 ‘담배’, ‘월세’ 사이에서 흔들린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 고민하고, 금방 결정한다. 그녀는 ‘월세’ 위로 빗금을 긋는다. 조각 몇 개를 포기하고 ‘나’라는 그림을 망칠 바에야, 그 판 자체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은 곧 탈출을 의미한다. 미소의 일기나 마찬가지였던 가계부 속의 항목, 그에 따라 그녀의 하루하루를 분류해왔던 현금 수납기로부터의 탈출. 이에 대해 미소는 덤덤하게 말한다. “이것, 저것 다 올라가니 어쩔 수가 없네요.” 그 뒤로 생략된 말이 “담배랑 술을 끊을 수밖에요.”가 아닌 “집을 끊을 수밖에요.” 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로(大路)와 소로(小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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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누군가는 집을 위해 술과 담배를 끊을 수도 있지만, 취향이 다른 누군가는 술과 담배를 위해 집을 끊을 수도 있다. ‘내 집 마련’이라는 대로(大路) 저편의 신기루를 맹목적으로 쫓고 있는 사회 속에서, 미소는 당연하다는 듯이 잊혀왔던 소로(小路)를 향해 발을 들인다. 그렇다고 자신의 소로를 긍정하기 위하여, 세상의 대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은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과 옛 친구들의 길이기도 하니까.


그녀는 다만 대로의 환상에 취해 자기 부정(대학 동기인 미소 앞에서 자신이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문영), 분열(집 때문에 진 빚 때문에 아내와 이혼한 뒤 퇴근하고 돌아오는 밤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대용), 의탁(뜨거웠던 밴드 시절의 추억을 뒤로 한 채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정미) 등등의 부작용을 앓으며 조금씩 자신을 잃어가는 친구들에게 계란 한 판을 사 들고 찾아가, 한‧두 줄의 메모로 짧은 위안을 남기고 돌아올 뿐이다. 그리고 못다 간 길을 꾸준히 나아간다. “이젠 뭐 누구 한 명 이렇게 죽어야”만 모이게 된 밴드 멤버들의 청첩장과 부고마저도 닿을 수 없을 만큼, 깊숙하게.

 

 

 

위스키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고속도로와 아파트 단지 사이의 어느 강변에 차려진 텐트 너머로 그녀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앞서 말했듯, 누군가의 눈에 그것은 세상의 흐름에 요령껏 편승하지 못한 낙오자의 말로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본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낙오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나마 살아갈 수 있을 거란 얘기가 된다. 최소한의 미소 서식 환경(Microhabitat)을 이룬 채,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면서. 마치 이치에 통달한 성현처럼 백발이 성성해진 채 단골 술집에서 여전하게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그녀처럼. 그런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한 잔의 위스키는 ‘글렌피딕’, 사슴이 사는 계곡이란 뜻이다.

 

그녀는 지금 그곳에 살고 있다.

 

 

[임현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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