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왜 사랑하냐 물으신다면 [영화]

글 입력 2021.01.3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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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쌓일수록 '사랑한다'라는 표현의 무게를 체감해가는 듯하다. 시작은 단순히 애인에게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전부였으나 점차 그 대상이 확장되어갔다. 이제는 나의 존재와 마음을 알지 못할 먼 이에게까지, 심지어는 인격을 갖지 않는 무생명의 대상에게까지 사랑한다는 표현을 붙이기가 꺼려진다. 여기서 무게라 함은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다해야 할 의무나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그 무게는 나에게 매일 아침 눈을 뜰 원동력이 되어주곤 한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대상이 나를 버릴 때, 혹은 내가 그를 저버릴 때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다.

내가 주로 글을 쓰는 주제인 영화로 예를 들어 보자면 수많은 영화를 접할수록 '이 작품을 좋아한다'라고 자신 있게 말을 뱉기가 두려워진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읽고 보고 배우며 가치관 역시 매일 걸음을 옮기기에, 어젯밤 인생 영화로 꼽았던 작품이 자고 일어나면 지독히 낙후되고 시대착오적인 졸작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게다가 영화계는 매일이 다사다난한 까닭에 그간 감히 최고라 추앙해왔던 감독과 배우가 어느 날 추악한 범죄자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적잖은 경험으로 체화한 사실이라는 점이 슬픈 부분이다). 이러한 경우 이미 온갖 찬사를 늘어놓은 나 또한 피할 수 없이 어떠한 무게를 지게 된다. 떠벌려놓았던 취향을 이유로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섣불리 판단 받고 일종의 선이 그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일종의 방어기제를 깔아두기 시작했다. 비록 어디 산 정상에 올라가 나 그 작품 무진장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절절한 사랑이 가슴에서 끓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 사람 그런 부분은 좀 괜찮지 않아?" "그 영화가 그래도 연출은 좋은 것 같아." 따위의 말들을 앞세우다 보니 어느덧 나는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아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 모든 가능성을 감수하고라도, 감히 사랑이란 칭어를 붙일 수 있는 영화를 꼽아야 한다면 아마 그건 아래에 소개할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이 아닐까 싶다. 만약 내일 갑작스레 종교를 갖게 되어 지독한 호모포비아가 되더라도, 혹은 아침 신문에서 토드 헤인즈가 할리우드 최악의 성범죄자 감독에 등극했다는 기사와 맞닥뜨릴지라도 이 영화에 대한 사랑을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 정도로 사랑한다는 소리다. 이 영화에는 사랑할 구석이 너무도 많다. 이제부터 다소 맹목적인 이 마음을 설명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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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사랑이 뭘까'라는 고민은 나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었다. 아마 격동의 사춘기를 보낸 십 대 중반 즈음부터 쭉 숙제로 떠안고 살아온 듯하다. 그리고 이런 나를 포함한, 그 답을 갈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캐롤>은 한 줄기 빛과 같을 것이다. 이 영화는 너무도 또렷하게 사랑의 정의를 품고 있다. 또한 그 정의를 풀어가는 과정 이곳저곳에서 역시 사랑이 숨어있다.

오프닝은 <캐롤>을 좋아한다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어김없이 언급되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기차 소리가 들리자 카메라가 눈을 뜬다. 보여주는 첫 번째 대상은 바로 관객으로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늬의 반복이다. 개인적으로 첫 관람 때에 '창살인가?'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하수구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이목을 끌었던 점은 알고 보니 이 물체가 하수구였다는 것보다는 그 사실을 드러내는 카메라의 방식이었다. 물체의 일부분만을 주시하던 카메라는 줌아웃으로 조금 멀어지는 듯하더니 곧 각도를 꺾어 하수구의 위쪽 끝을 향해 움직인다. 그 대상이 하수구이기 때문에, 화면을 바라보는 이는 마치 바닥을 보다 고개를 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또한 그 모양이 창살 같은 느낌을 풍기기에 그로부터 시선이 벗어나면서 묘한 해방감도 얻는다.

길을 걷는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불결한 취급을 받는 가장 낮은 곳. 아름다운 장면이 수두룩 빽빽인 이 영화에서 굳이 하수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꽤나 뚜렷하다. 철저하게 동성애의 존재가 지워졌던 1950년대 미국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두고 동성 연인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성소수자 감독의 의도이자 각오가 전해져오는 듯하다. 이 영화는 가장 낮은 곳을 비출 것이며, 결코 멀어지거나 저버리지 않고 치열하게 따라가겠다고. 또한 재관람 때에는 마치 두 주인공이 고개를 드는 해방이자 성장의 여정을 다룰 것의 암시로도 느껴졌다. 배경에 깔린 두 사람을 이어주는 장치이자 역동감을 지닌 기차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영화가 얼마나 섬세하고 존중 어린 시선을 지니고 있을지 기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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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프닝이 시작되면, 두 사람의 사랑을 비출 때 엿보이는 이 영화의 진심 어린 태도가 드러난다. 바로 종종, 특히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뜸을 들이는 모습이다. 오프닝을 생각해 보면, 영화는 곧바로 캐롤이나 테레즈를 비추어 그들의 이야기로 접어들도록 두지 않았다. 카메라가 처음으로 포커스를 두는 건 한 남자의 뒷모습이다. 처음으로 등장한 인물이기에 관객은 자연스레 궁금해하지만, 곧 그는 비중이 없는 행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카메라는 한참 뒤에 진짜 주인공인 두 사람에게 도달한다.

사랑이 무르익으며 캐롤과 테레즈는 자신들을 옥죄이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훌쩍 서부로 떠나지만, 대체적으로 그 여행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는 캐롤 탓에 테레즈도 관객도 온전히 마음을 놓고 즐길 수는 없는 도피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안정적이고 행복한 순간도 물론 있었다. 할인을 핑계 삼아 처음으로 한 방에서 묵게 된 두 사람이 화장 놀이를 할 때, 숏을 전환하면서 카메라는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관객의 청각만 열어둔 뒤 방 안의 이곳저곳을 비추며 아주 천천히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카메라가 마침내 두 사람에게 닿았을 때까지 걸렸던 시간은 무려 30초로, 그동안은 오로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만 들릴 뿐이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관객이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영화는 일부러 두 사람의 행복한 얼굴을 곧바로 잡아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의도적인 지연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느껴진다. 뜸을 들이는 것은 곧 사랑을 의미한다.

차에서 내린 테레즈가 캐롤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는 장면은 <캐롤>을 대표하는 씬 중 하나다. 원작에 없는 설정을 넣어가며 감독이 만들어낸 이 장면이 바로 그 의도적 지연을 표현해 보여준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바로 찍지 않고, 카메라를 쥔 채 숨을 참으며 몇 초를 기다리는 것. 나는 영화가 이 장면에서의 테레즈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서로를 모르던 두 인물이 "I love you"에 도달하는 여정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 로맨스 장르 영화에서, 캐롤과 테레즈는 영화가 끝나기 10분 전에야 그 대사를 등장시킨다. 그것도 동거의 제안을 거절당한 뒤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겠다고 직감한 뒤에야 마치 오랫동안 참았던 숨을 토하듯 간절하게 내뱉는다. 오가는 눈빛은 얼마나 절절한지 마치 시공간이 멈춘 듯하다. 오래도록 말하지 않고 끌어온 그 말의 무게는 앞서 결혼과 아이를 통해 두 사람을 옭아매려던 리처드와 하지가 너무도 쉽게 내뱉었던 사랑한다는 말과 자연스레 대비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뜸을 들일 수밖에, 못내 끙끙 앓으며 묵혀둘 수밖에 없다. 즉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이란 쉽고 빠르게 말할 수도, 담아낼 수도 없는 것이다. 카메라는 이러한 사랑의 무게를 짊어지기 위해 여러 번 관객을 기다리게 만든다. 영화가 두 사람을 대하는 방식 자체에서부터 사랑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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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두 주인공을 통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왜 이 영화의 제목은 테레즈가 아닌 캐롤일까? 라는 질문과 연관된다. 주인공은 두 사람인데, 게다가 관객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시간적으로 먼저 등장한 테레즈에게 이입할 가능성이 더욱 높은데 왜캐롤이 제목을 차지했을까. 그것은 아마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를 더 잘 비추어 낸 인물이 캐롤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캐롤>이 말하는 사랑이란 나를 더욱 빛나는 곳에 데려가 주는 것도 아니고, 지금껏 알지 못했던 나 자신에 새로이 정착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라는 캐롤의 편지와 같이,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나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을 말한다. 사랑하는 이를 통해 사람은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게 된다. 캐롤이 테레즈를 통해 그랬듯, 테레즈가 캐롤을 통해 그랬듯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의 의지다. 불가항력의 썰물에 의해 피동적으로 원래 있었던 자리로 밀려오는 게 아니다. 직접 걸어와야 하고, 그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 사랑이다.
 
 
I took what you gave willingly.
 
 
테레즈와 함께하는 행복한 순간에도 딸 린디의 존재는 끊임없이 캐롤을 괴롭힌다. 테레즈의 집에 걸려있는 어린 시절의 사진은 린디를 떠오르게 하고, 함께 떠난 여행에서도 "아이들 없는 연말은 상상할 수 없다"라는 라디오의 멘트는 그녀를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그녀는 테레즈의 옆이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판단하에 그녀를 떠난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다른 여성을 사랑하고 있는 퀴어로서의 자신을 더는 부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토록 집착하던 아이의 양육권을 스스로 포기한다. 엄마라는 무게를 딛고 자신의 자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기를 택한 것이다. 이 모든 건 그녀 스스로 해낸 일이고, 그럴 수 있었던 배경에는 테레즈가 있었다.

물론 캐롤에게서 더 두드러졌을 뿐, 테레즈 역시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에 착실하게 따른 인물이다. 점심 메뉴조차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던 테레즈가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여행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받아들이고, 그간 질질 끌어오던 리처드와의 결혼을 단칼에 정리하는 모습은 모두 그녀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그간 걸려오던 전화만 받던 테레즈는 처음으로 수화기를 든다. 가판대에서 처음 그녀를 발견하고도 자리를 지키며 서 있어야 했던 그녀는 이제 첫 만남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엔딩에서 먼저 캐롤에게로 다가선다. 차기 대통령이 취임하여 국면이 바뀌었듯, 테레즈에게도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그 바탕에는 캐롤이 있었다.

따라서 엔딩에서의 캐롤과 테레즈는 마치 "이제야 왔다, 내 자리에."라고 말하는 듯한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 미소는 두 사람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짙은 여운과 안정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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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얘기한다. 사랑 때문이라고. 사랑의 힘 덕분에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고. 그러나 이는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어려운 일을 해냈기에 바탕이 되었던 감정을 사랑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영화에 삽입되었던 Eddie Fisher의 노래 가사처럼, 당신이 기회를 잡았기에 그것은 사랑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이 영화를 왜 사랑하냐 묻는다면, 그건 바로 이 영화 속에 '왜 사랑을 할까'라는 질문의 답이 있기 때문이라 대답할 수 있다.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통해 본인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듯,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만든다는 점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자체적인 의의를 갖는다. 이 영화는 그 어느 작품보다도 내가 나로 살고 싶도록 만들기 때문에, 꼭 내 자리를 지키며 나로 살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어 주는 영화이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사랑할 것이다.
 
 
[김수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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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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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이
    • 좋은 제목이였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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