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철길의 시작과 끝에서 - 스탠 바이 미 [영화]

글 입력 2021.01.2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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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즈음의 일이다. 친구와 학원에 가는 길이었다. 눈에 익은 아파트를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야, 돈 있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섭기로 소문난 동네 양아치들이었다. 너무나 놀라서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고, 내 주머니에서는 동전이 부딪쳐 짤랑거리는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낭패였다. 양아치는 방금 울린 소리를 다 들었다며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입꼬리는 내려가고 눈매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낯선 이의 적의 가득한 표정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두려움이 온몸을 덮쳤다. 결국, 움직이지 않는 몸을 삐걱대며 주머니에 있던 몇백 원을 건넸다. 양아치들은 고맙다고 말하고는 유유히 다른 길로 사라졌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얼마 되지 않던 용돈이라도 이런 식으로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허무하고 분했다. 함께 있었지만 도와주지 않은 친구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친구였어도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주기 싫다고 말이라도 해볼 걸 그랬나. 혹시 그랬다면 주먹을 들었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표정이 굳어졌다. 다시금 학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친구가 사과를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날 친구는 학원이 끝난 후에 떡볶이를 사주었다. 친구가 건넬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을 것이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사계절이 바뀔 때까지도 우리는 변함없이 동네를 쏘다니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어린 시절을 함께 했다. 소중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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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탠 바이 미’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의 작은 마을 캐슬록에 사는 네 명의 단짝. 문학에 소질이 있는 ‘고디’와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밑에서 갑갑한 생활을 하지만 타고난 리더쉽으로 동네 꼬마들을 지휘하는 ‘크리스’, 그리고 2차대전의 영웅이었던 아버지를 존경하는 열정의 소년 ‘테디’와 양아치 형을 가진 착한 꼬마 뚱보 ‘’이 그 주인공이다.


어느 날 번은 형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며칠 전 행방불명된 소년의 시체가 저 멀리 숲 속에 있다는 것. 번은 친구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준다. 만약 시체를 찾아낸다면 마을의 영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네 명의 소년은 호기심과 모험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계획을 짠다. 하지만 운전은 할 수 없다. 그들은 철로를 따라 걷고, 강을 건너고, 숲을 가로지르며 48km의 여정을 떠난다.

 

 

 

1. 어린 날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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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네 명의 주인공은 각자 가족과 관련된 고민을 안고 있다.


테디의 아빠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테디의 머리를 짓눌러 귀가 탈 뻔했던 적도 있을 정도로 폭력적이다. 그런 아빠임에도 테디는 그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목에는 군번줄을 매고 다니고 아빠가 참전했던 노르망디 작전을 여러 번 언급한다. 여행 중에 날이 저물어 보초를 설 때도 군인 흉내를 낼 정도이다. 시비가 붙은 고물상 주인이 아빠를 모욕하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화를 내며 운다. 폭력을 가한 사람이지만 가족이기에 떨칠 수 없는 순수한 애정은 안쓰러움을 자아낼 정도다.


고디의 형은 누구나의 관심을 끄는 수준급 실력의 풋볼 선수였다. 아빠의 관심은 모두 형에게 쏠려 고디는 항상 밀려나기 일쑤다. 엄마는 가부장적인 아빠에게 밀려 명확한 의견 피력도 하지 못한다. 이런 고디의 재능을 알아보고 칭찬하는 가족은 형 데니 뿐이다. 하지만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데니는 목숨을 잃는다. 원래부터 형만 신경 쓰던 아빠, 충격에 빠진 엄마 때문에 고디는 집에서 투명인간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고디의 글도 찬밥 신세가 된다. 글쓰기를 즐기고 또 좋아하는 고디지만, 아빠의 무시 때문에 자신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한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너희를 따라 취업을 할 거라는 고디에게 크리스는 화를 낸다. “아이들은 누군가 돌봐주지 않으면 모든 걸 잃게 돼 있어.” 아빠가 해주지 않으면 내가 할 거라며 신이 주신 재능을 잃지 말라고 한다. 고디에게 작가로서의 확신을 실어 주는 건 어른이 아닌 친구 크리스다.


그렇게 어른스러운 크리스도 내면에는 고민을 안고 있다. 고디에겐 격려를, 테디가 울 때는 위로를, 어떤 위기 상황에도 침착하게 대처하며 이끄는 모습은 누가 봐도 훌륭한 친구이다. 하지만 크리스의 가족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크리스 역시 나쁜 아이일 것이라는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크리스는 한 번 학교의 우윳값을 훔쳤지만, 양심에 찔려 그 돈을 바로 선생님께 돌려주고 사과한다. 하지만 그 돈은 선생님께서 다시 빼돌려 자신의 이익을 채워버리는데 써버리고, 크리스의 결백은 증명되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정말 크리스가 훔쳤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며 우는 크리스는 영락없는 열두 살 소년이다. 그런 크리스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은 친구 고디다.


“내가 괴짜야?”

“그래서 뭐. 다들 괴짜잖아”


번의 형 역시 양아치다.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것이다. 네 명 모두 편견과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소년들은 같이 있을 때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하나에도 배꼽이 빠질 듯이 웃을 수 있다. 어리기 때문에 가감 없이 자신을 알리고, 위로하고, 순수한 감정을 나눌 수 있다. 어린 날의 우정은 짧기에 더욱 애틋하고 아련하다.

 

 

 

2. 철길의 시작과 끝에서 : 삶과 함께하는 죽음



같은 시작점에서 동시에 출발해 길을 걸어도, 도착점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서 있게 된다. 그 길을 어떻게 지나갔는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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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찾아 유명한 영웅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한 가벼운 모험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소년들은 죽음과 직면하는 여러 사건을 겪는다. 물려는 개를 피해 철조망을 넘고, 달려오는 기차를 피해 선로를 질주한다. 강을 건너다가 거머리한테 물리기도 하며 전진한 끝에 결국 시체를 발견한다. 그리고 뒤늦게 유명세를 노리고 온 양아치들에게 칼을 들이대며 시체를 내놓으라고 위협을 받는다. 수많은 위기를 헤쳐나가며 소년들은 지금껏 두려워했던 것과 마주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물리면 죽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고물상 집 개는 평범한 리트리버였다. 얇은 철조망을 넘으면 자신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할 수 없는 순간의 위협이다. 마을을 떠나기 전 고디와 크리스는 주먹을 들이대는 양아치의 위협에 모자를 빼앗겼다. 하지만 철도를 지나온 크리스와 고디는 칼을 들이대는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총으로 대담하게 맞서 시체를 지킨다.


양아치가 돌아간 후에 우리의 이름으로 시체를 제보하자는 테디의 말에 고디는 반대한다. 이런 식으로 영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각자의 고민으로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던 아이들은, 시체를 찾아 얻은 유명세로 그 허전함을 채우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형의 죽음을 되돌아보며 고디는 깨닫는다. 남의 죽음으로 이름을 알리는 것으로 우리의 결핍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가까스로 삶의 문턱을 잡은 자신들과 다르게, 문턱을 놓치고만 안타까운 생명이 있다는 것을. 결국, 이들은 익명의 제보를 통해 시체를 가족의 품에 돌려보낸 것으로 생명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


다시 돌아온 마을은 그들 눈에 작아 보였다.

 

 

 

3. 어른이 된 후 우리들은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친구들도 식당의 일꾼처럼 내 인생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후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소년들의 사이는 서서히 소원해진다. 고디는 테디, 번과 점점 뜸하게 만났고 졸업 사진 속의 두 얼굴로만 남게 된다. 번은 고교 졸업 동시에 결혼해서 아이 넷을 낳고 지게차 기사가 되었다. 테디는 여러 번 입대를 시도했지만, 시력과 귀 때문에 실패하고, 잡일을 하고 산다. 크리스는 그와 함께 대학 진학반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 변호사가 되었다. 최근 10년간 만나지 않았는데 신문을 통해 싸움을 말리다 칼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


이사하기 전까지 나와 친구는 껌딱지 같은 사이였다. 매일 학원에서 만나고, 누군가의 집에서 숙제도 하고, 싸우고 화해도 하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친구네 가족은 물론 친척까지 알 정도로 가까웠다. 이랬던 우정은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가끔 뜨는 카카오톡 프로필로만 안부를 확인한다.


비록 약간의 거리가 생겼지만, 어린 날 친구 집 옥상에서의 물놀이나 학교운동장에서의 피구, 함께 사 먹던 아이스크림은 내 기억 속에 여전하다. 언제든 떠올릴 수 있는 즐거운 추억을 함께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우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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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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