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시한 일상과 폭죽 [도서]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 <리버스 엣지>
글 입력 2021.01.1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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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왜 그래?”


나는 새삼 그 말이 어색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는 건 정말 갑작스러웠던 걸까. 심지에 불을 붙이면 순식간에 터져버리는 폭죽처럼, 그 찰나에만 기댄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내게 있었던 크고 작은 ‘갑작스러운’ 일들이 떠올랐다. 거기엔 내가 당혹스러웠던 기억도 있고, 남을 당혹스럽게 했던 기억도 있었다.


학생 시절, 과제로 단편영화를 만든 적이 있었다. 대충 내용은 이랬다.

 

 
교정을 막 지나치고 있던 주인공은 학교 건물 4층에서 친구가 자살하려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 자살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4층으로 달려 올라간다. 같은 시각, 복도에서 축구를 하던 A는 발을 헛디뎌 공을 애먼 곳으로 차버리고, 계단을 청소하던 청소부 직원은 그 공에 맞아 쥐고 있던 대걸레를 놓치고 만다. 마침 빠르게 계단을 오르고 있던 주인공은 그 대걸레를 밟고 미끄러진 탓에 간발의 차로 친구의 자살을 막지 못한다.
 


과정은 사소하지만 빨랐고 점점 무거워졌다. A는 다리가 골절됐고, 청소부 직원은 뇌진탕이 왔으며, 주인공은 친구를 잃었다. 작은 순간들이 모여 끔찍한 상황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나는 영상으로 담아 선생님께 제출했다.


그때도 나는 나를 당혹하게 했던 일들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물론 지금에서야 그 단편은 너무 부끄럽고 어설픈 영화로 남았지만, 시시한 일상이 어떻게 가볍지 않은 사건이 되는 건지, 그때도 그런 게 궁금했다.


오카자키 쿄코의 이야기, <리버스 엣지>에도 반복되는 일상이 교차되고 쌓여가며 무게를 얻는 과정에서 그 궤를 함께하는 아이들이 있다.

 

 

 

<리버스 엣지River's Edge>오카자키 쿄코, 1994


 

 
“내 비밀 보물을 가르쳐줄게. 아무한테도 가르쳐주지 않은 거. 보여주고 싶어”
 

 

학교에서 남자아이들의 폭력에 시달리는 야마다는 두 번씩이나 자신을 구해준 하루나에게 자신의 보물을 보여주겠다며 강변 덤불로 그녀를 데려간다. 지저분하고 악취를 풍기는 강변에서 그가 보여준 보물은 살도 남아 있지 않은 해골, 다름 아닌 시체였다.

 

야마다는 남자아이들에게 강도 높은 괴롭힘을 당하거나, 게이인 자신이 거짓으로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음에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강변에 찾아와 시체를 보곤 했다. 시체는 야마다의 보물이지만 한창 활동하고 있는 인기 모델 요시카와의 보물이기도 했다. 그 둘만 알고 있던 비밀을, 야마다는 하루나에게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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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맞기만 하는 야마다, 거식증에 걸린 모델 요시카와, 그리고 그에 비해 언뜻 평범해 보이는 하루나. 연관 없어 보이는 이 셋은 강변 덤불 속 누워있는 시체를 공유한다.

 

셋은 시체를 보며 용기를 얻거나, 꼴좋다고 생각하거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얼떨떨해한다. 진짜 죽어버린 것을 내려다보며, 아이들은 동시에 어딘가 죽은듯한 자신을 비춰보게 된다.


빈 공간이 허전해서 그 안을 채우려 드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도 마찬가지다. 결핍이 있는 자는 동시에 욕망하기도 한다. <리버스 엣지>의 아이들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대상을 바라보지만 그 결핍은 원하는 대상으로부터 정확하게 채워지지 못한다. 마치 헛손질을 하는 좀비처럼, 각자의 욕망이 향하는 방향은 서로가 아닌 그 옆길로 미끄러져 교차한다.


그 헛손질이 공기를 가르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닌 별 볼일 없는 손짓으로 끝났다면 좋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좀비의 손짓은 그렇게 무해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욕망은 미끄러져 비틀린 대로 척척 맞아떨어지고,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작은 조합들은 결국 큰 참극이 되어 나타난다. 비틀린 욕망은 하룻밤 새에 누군가를 울게 만들었고, 누군가의 목을 조였고, 누군가를 베었고, 불을 질렀고, 자신을 불태웠다.

 

 

‘참극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참극은

천천히 서서히

준비된다.

진행된다.

 

시시한 일상,

지루한 매일

가운데

 

그것은―

 

그러다 그것은 풍선이

펑 터지듯

일어난다.’

 

<리버스 엣지>, p.196

 

 

풍선처럼 터져버린 그날 밤에 대해 아이들은 덤덤하다 못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알기 때문일까. 만약 잘못이 있다면 그건 각자가 담고 있던 욕망, 죄책감, 고마움, 미안함을 제때 정확히 말할 능력이 없었음, 정도가 될까. (그렇다면 제때라는 건 도대체 언제일까) 제때, 정확히 전달되지 못한 말들은 차곡차곡 쌓여 피할 수 없는 시간 앞으로 아이들을 데려다 놓았다.


악취와 먼지, 오물을 잔뜩 머금은 이곳에 그날의 밤을 묻고 유유히 각자의 길로 떠나버린 하루나, 야마다, 요시카와가 야속하지 않았다. 셋은 ‘진짜 죽어버린 것’을 본 유일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공업 폐수가 고인 악취 나는 강변, 때때로 고양이 사체가 굴러다니는 이곳에서 그들은 자각하지 못한 채 욕망 덩어리가 되어버린 게 아닌, 시체를 통해 자신의 비어있음을 확인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적어도 ‘선택한’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죽은 것을 보고 살아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야마다의 자위, 이곳의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려는 하루나의 작별, 실컷 먹고 다 게워냄을 반복하며 시체와 다름없는 몸으로 계속 살아가겠다는 요시카와의 긍정을, 왠지 미워할 수 없었다.


언젠가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 날들. 그건 사실 미워할 수만은 없는 작은 감정들의 퇴적층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크게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시시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최혜민.jpg

 

 

[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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