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도시의 유령들 - Anthropocene Korea X Brazil 2019-2021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1.08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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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눈이 내렸다. 조금씩 긁어모아 만든 흙이 섞인 눈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눈으로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 수 있을 만큼 펑펑.


이번 겨울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온 건 처음이지 않냐고 좋아했던 것도 잠시였지, 시계를 온통 덮어버린 하얀 눈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렇게 갑자기 눈이 많이 와도 되는 걸까? 연일 울리는 한파 특보에 한국도 이제 북극이 다 되었다며 우스갯소리를 건네는 마음도 편치 않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제트기류가 약해져 북극의 한기가 내려온 것이라 가시 없는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인류세'라는 개념이 다시 떠오른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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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학적 시대에서 기원전 약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간빙기를 홀로세라고 부른다. 홀로세의 안정적인 기후는 생명체가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며 인류가 문명을 이룩할 수 있게 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인류세 Anthropocene는 아직까지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지구가 이제는 홀로세를 지나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들어섰음을 주장한다. '인류'세라는 이름처럼 인류로 인해 지구 환경의 변화하고 많은 생물종이 멸종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류세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류세가 '인류가 지구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룬다는 것이다.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 온실가스 배출이 늘며 지구 온난화가 일어났고, 이것이 극심한 기후 변화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미세 플라스틱 등의 쓰레기 문제들은 생태계 파괴로 이어진다. 이러한 환경 문제는 다시금 인간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에 속도를 늦추려고 노력할 순 있어도 피할 수 없다.


더불어 인류에게도 많은 문제가 새겨졌다. 과학으로 쌓아 올린 유토피아를 꿈꾸며 시작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속 산업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소외된 인간들과 폭력과 전쟁, 자본주의의 무한한 경쟁.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앞으로의 인류세에서 인류는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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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의 온라인 스크리닝 전시 《Anthropocene Korea X Brazil 2019-2021》은 이러한 인류세에 대해 여러 작가를 통한 담론을 형성한다. 3부작으로 구성된 전시 중 1월에는 1부인 'Invited Curator'를 만나볼 수 있는데, 6명의 한국 작가들의 영상 작업들이 상영 중이다. 그중 인상 깊게 보았던 세 작품을 소개하려고 한다.


 

 

48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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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하윤의 '489 years'는 DMZ(비무장지대)에서 근무했던 한 군인의 기억을 VR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한다.


DMZ는 한국 전쟁 이후 정전 협정에 따라 만들어진 지역으로,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으로 2km씩 군사적인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남과 북 모두 감시초소가 설치되어 있어 극도로 긴장된 상태가 유지되는 곳이다.

 

DMZ의 독특한 공간성은 평화를 위한 완충지대가 오히려 전쟁의 긴장감이 맴도는 곳이라는 것과 더불어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천연 생태계가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만들어진다. 이곳은 많은 멸종위기종들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군인은 수색대로 활동을 하던 30년 전의 기억을 꺼낸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무렵 문이 열리면 언제든 적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굳은 육체를 움직이던 기억.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미확인 지뢰지역을 수색하는데 따라오던 팀이 오지 않아 멈추어 기다리던 때의 심정. 군인의 음성과 완벽하게 맞물리는 영상은 마치 우리가 그 군인의 눈으로 기억을 재생하는 듯하다.


캄캄한 밤, 야생 동물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생명체의 존재감이 등골을 스친다.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와 결코 숨겨지지 않는 거친 숨소리를 겨우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20분쯤 지났을까? 어느 순간 모든 소음이 사라지며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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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그때 봄을 보았다고 한다. 생전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광경의 자연을 보았다고. DMZ는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그 기억만큼은 잊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묵직했다. 평화의 이름으로 쓰인 공간 속 도사린 수많은 위험, 위험하기 때문에 인간의 손에 닿지 않아 아름다운 자연. 이 아이러니함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운드 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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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민의 '사운드 가든 Sound Garden'을 처음 재생했을 때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반딧불이처럼 나무들 사이로 무언가 반짝였다. 그렇게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는 작품인지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름답기만 한 영상도 아니다. 이 영상에서 들리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친 사람들에 대한 목소리다.


영상은 커다란 나무를 트럭에 싣고 이동하는 과정으로 가득하다. 그 위로 차분히 상담사로 일하는 네 명의 여성들의 목소리가 입혀진다. 주로 상담을 하면서 느꼈던 괴리감에 대한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 위기를 느껴 상담을 찾아오는데, 그들의 문제는 그 자신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원인이 될 때가 많다고 한다. 이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게 된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족에 대해서, 혹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람은 자신의 구조를 완벽히 탈출하기 어렵다.


'동물원을 탈출한 사자가 어디를 갈 수 있을까요?'


영상 속에서 한 기업 안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힌 상담가는, 상담의 과정 역시 회사의 자본주의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기능을 복구시키는 용도로 상담을 간주한다는 것이다. 왜 상담을 오래 받았는데 고쳐지지 않았냐고. 로봇의 망가진 기능을 고쳐내는 것도 아니고 오직 생산성을 위한 부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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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들의 목소리 뒤로 흐르는 영상 속 나무들은 훈련목이다. 훈련목은 어느 환경에서도 예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훈련되어 도시의 가로수, 아파트숲 등으로 심어진다. 크고 예쁘고 잘 자란다는 기능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계속 옮겨 다니는 나무들을 보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잘 자랄 수 있는 나무를 만들기 위해 영양제를 주입하고 필요 없어 보이는 가지들을 쳐낸다. 잘라낸 가지는 불에 태워 없앤다. 나무들은 다시 어디론가 이동한다. 이동하는 그곳에서는 오랫동안 깊게 뿌리내릴 수 있을까.


인간도 이렇게 어떤 사회에서든 단단히 자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잘라내야 하는 걸까? 영양제를 꾹 맞으면 아픈 속을 감추고 망가지지 않은 척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제 몸집만 한 커다란 나무를 싣고 빠르게 달리는 트럭이 터널을 지나는데 반짝 비상문이 눈에 띄었다. 인생에서도 잠시 도망칠 수 있는 비상문이 있으면 좋을 텐데 싶었다.

 

 

 

Wild S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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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정의 '야생종(Wild Seed)'은 이상우의 소설 '배와 버스가 지나고'와 '야생종(Wild Seed)'를 번역한 영상 작업이다. 전시되고 있는 작품 중 20분 정도로 긴 편이지만 가장 몰입적으로 빠져들었다. 스토리와 영상 자체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생존 2321일째." 영상은 한 여성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높은 파도가 출렁이고 그 파도는 목소리를 따라 내 목 아래까지 들어찬다. 턱 아래까지 물이 차 있는 상태로 여성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생존의 나날을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매일 주변 사람이 죽어나간다. 어떤 목숨만 선별적으로 온정이 차고 넘치는 사람들에 의해 구해진다. 사람들의 죽음은 휘발되고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한다. 여성은 떠내려가던 아빠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의 몸을 '입는다'. "아빠가 되자 사람들은 정중했다."


누군가에게 김기철 씨를 아시냐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김기철은 전화 수신인의 아버지다. 경찰은 중국의 한 섬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떠내려갔는지 의아하다고 말한다. 엄지와 검지가 잘려있는 상태인데 아마도 죽기 오래전에 잘린 것 같다고 한다. 시신의 송환 여부를 묻기 위해 전화했는데 익사체라 보지 않는 걸 추천한단다. 수신인은 보겠다고 대답한다. "제대로 죽었는지 확인해야겠어요." 경찰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중국에서 같이 일했다는 중국 여성은 김기철에 대해 잘 모른다고 대답한다. 썩은 생선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는 게 전부다. "이미 죽은 사람에 관해 묻는다면 나는 나의 안위를 위해서만 진술할 것이다. (중략) 그의 이름을 찾는 일에 아무런 보탬이 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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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김기철로 추정되는 남성의 목소리. 그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이 기억에 나지 않는다고 한다. 딸 때문에 이곳에 왔는데 딸을 발견할 수가 없다고, 딸을 만나고 싶다고 한다. 그는 기억에 도움이 될 법한 메모가 몇 가지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아무도 관심 없는 세계에서 매일 지도에서 사라지는 생각을 했다고. "도시는 나를 단일한 품종으로 개량된 몸속에 가둔다." "나는 여전히 이 도시의 유령이다.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 거세지는 것 같다. 합류할 수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 목숨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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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는 파도와 함께 숨이 막힐 것 같은 영상은 빠른 속도로 도시를 주행하는 차와 교차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물에 빠져 있는 여성에 대해 시작된 고민은 김기철과 그의 자식, 중국 여성에게까지 확장되며 혼란스러워진다. 각 인물들이 하는 의문스러운 말들은 단서가 하나씩 드러나 연결될 때마다 흥미로워진다.


이 도시의 유령이 되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떠다니고 있을 여러 야생종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울리는 냄새 같았다. 사실 이 도시는 비린내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


세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세에 대한 논의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역시 그 생태계 속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는 생존과 직결하는 문제가 된다.

 

인류가 지구의 많은 부분을 뒤집어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만들어놓은 이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어쩌면 우리는 자연을 벨 때 자연 속의 우리 역시 베어버렸을 것이라 막막하다가도 이 전시에서 보이는 연대의 모습들에 마음이 울리기도 했다. AI가 범접할 수 없는 최후의 인간적인 행위가 상담일 것이라고, 개는 우리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주체라고, 소를 도축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일상이 목욕을 시켜주는 것이라고 곱씹고 다시 곱씹고 싶은 장면들이 많았다.

 

나이지리아 난민인 오스카에 대한 이야기 'Lack of Evidence'와 생명체의 사랑으로 시작해 인류의 종말로 끝나는 'the love story of Khora, Plesiosaurus & Leviathan'도 꼭 추천하고 싶다.


더불어 이번 전시는 온라인 스크리닝이라는 점에서 권유하고 싶다. 전시장에서는 끝까지 다 보기 어려운 긴 작품들도 차분히 볼 수 있었다. 모든 작품을 샅샅이 관람할 수 있어 작가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어느 누구의 인류세가 아니라 내 앞에 놓인 인류세로서 우리의 미래를 같이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거세지는 파도를 결코 홀로 버티는 것이 우리의 미래는 아닐테니까.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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