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구매하고 싶은 그림 [시각예술]

엄유정의 그림들
글 입력 2021.01.0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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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태양이 뜨겁게 내 머리 위를 눌러대 머리가 터질 듯했던 여름이었다.

 

우린 안국역 근처에 있었고, 점점 가팔라지는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언덕의 정점에서, 더위로부터 피신하듯 쏙 들어갔던 작은 공간엔 아크릴과 유화물감으로 그린 42점의 빵이 전시되어 있었다. 공간이 너무 소박해서 어디 숨어 땀을 식힐 수도 없었던 우린 잠깐의 민망함을 무릅쓰고 어중간한 위치에 서서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몸에 열이 점점 식어가고 숨이 고르게 쉬어질 때쯤이 돼서야, 벽에 걸려있던 빵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회화 작가 엄유정의 그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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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전경, 정독도서관 북촌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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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크림 롤케이크 Cream Roll Cake, 42x56cm, oil on paper, 2018

 

 

식빵, 크루아상, 브레첼, 생크림 롤케이크….

 

42점의 빵 그림은 온전한 모양의 빵부터 뭉개지거나, 포크로 헤집어진 상태까지 다양했다. 그것들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다가가자 선명한 작가의 붓터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빵 하나에 표현된 여러 방향의 붓터치는 빵이라는 정체성과는 별개로 그들만의 세계를 이룬 듯 보였다.

 

평면 회화에서 아주 얇지만 분명 두께감을 가지고 있던 저마다의 붓결은 서로를 엎치락뒤치락 넘나들고, 우회하고, 흐르고 있었다. 빵 안에서 이뤄지는 그 생동감을 한참을 지켜봤다. 과연 전시의 제목처럼 제빵이라는 과정을 거친 형태들에, 난 완전히 매료되었다. (Baked Shapes)


이 안의 고요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에 몰입하는 와중에 먼지가 켜켜이 묵은 초등학생 시절의 작은 기억이 떠올랐다. 난 이미 어릴 적 빵 안에서 이뤄지는 이 많은 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주말마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의 엄마는 제빵 역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집 부엌 바닥 한쪽엔 늘 제빵 발효기가 놓여 있었다. 한때 주말마다 엄마는 발효기를 사용해 꼭 식빵을 만들었다. 밀가루와 노른자와 소금 등 재료를 넣고 뚜껑을 덮은 뒤 버튼을 누르면 기계 내부가 규칙적으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재미없는 리듬감이었다.

 

우리 집 제빵 발효기의 뚜껑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 안을 한참 지켜보는 일을 좋아했다. 따로 놀고 있던 재료들이 섞이기 시작하더니 한 덩어리가 되어 위 반죽이 아래 반죽을 삼키고, 아래 반죽이 다시 위 반죽을 역전하는 상황을 반복했다. 반죽이 겹쳐지면서 생긴 금이 언제쯤 사라질까 지켜보는 것도 꽤 중독성 강한 묘미였다. 재미없는 기계 소리가 멈추고 나면, 반죽은 아슬아슬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픽 하고 꺼졌다.


작품을 구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중 가장 많은 상상의 가능성을 남겨둔 붓터치를 가진 빵을 골라, 내 방에 침대맡에 두고 싶었다. 빵 속 무너지고, 엉키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붓의 표현을 보고 있자면 그 안에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매번 다른 상상을 소환하는 데에 온 시간을 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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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빵 White Bread, 42x56 cm, oil on paper, 2018

엄유정 작가는 빵을 보다가 가끔 사막의 형태와 질감을 떠올렸다고 한다.

사막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 이 중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곤 한다.

 


그렇지만 당시에 패스트푸드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던 학생이었던 내게 작품을 사기란 무리가 있었다. 나는 아쉬운 대로 도록을 구매했다. 빵의 결을 따라 교차하면서 얹어진 물감의 미세한 겹들이 매력적이었던 그림들은 다시 종이라는 매체 위에 하나의 두께로 납작해졌지만, 2년 전, 눈으로 느꼈던 미세한 단차와 질감을 떠올리며 다시금 펼쳐 보곤 한다.


그때부터 줄곧 나는 엄유정의 그림을 좋아했다. 최근 서울에서 2인전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이번엔 피부 속 뼈가 붙들려 꿈쩍 못하겠을 정도로 날카롭고 얼얼한 겨울바람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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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윙-또르르> 전시 전경,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그녀는 사실 빵보다 사람을 더 많이 그려온 사람이다. 이번에 찾은 전시, <사각사각-윙-또르르>에는 그녀의 인물들이 걸려있었다. 언 손으로 출입 명부를 힘겹게 작성하고, 우린 각자 뒷목을 만지는 등 손을 녹이면서 전시장의 한바퀴를 슥 돌았다.


엄유정이 그린 인물 드로잉은 대게 선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얼굴이나 몸의 세부 묘사는 간단하게 표현되거나 그마저도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그림 속 인물은 한 명일 때도 있고, 여러 명일 때도 있다. 한 명인지 여럿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 인물들은 저마다의 상황에 놓여 있다.


인물은 얇은 선으로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 선으로 이루어진 인물은 내게 단순한 테두리로 구성된 인물이 아니라 실은 속이 꽉 차 있어 무게감이 꽤 나가는 인물로서 다가왔다. 작은 얼굴과 그렇지 못한 비대한 몸집, 두꺼운 손목과 발목이 그렇다. 많이 생략된 얼굴에 반해 꽤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거나 심지어는 손톱까지 묘사된 손가락은 집중의 차이를 만들었다. 그 손으로 무얼 하고 있는지 인물 자체보다 포즈로부터의 상황이나 감정을 집중하게끔 하였다. 인물의 형태를 빌려, 고유한 감정과 의지로 꽉 찬 묵직한 인물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여기에 있는 많은 그림 중 하나를 구매하고 싶었는데, 골똘히 사색하는 듯한 인물 드로잉을 특히 원했다. 어떤 사색을 하고 있을까. 혹시, 저 귀여운 양말을 살까 말까 따위의 고민을 저렇게  심각하게 하고있는 걸까. 내가 매일 하는 가볍고 순전한 생각들과 비슷할까. 가장 궁금한 게 많았던 그림이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매일매일 새로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투박하고 커다란 손이 나와 닮았다는 점도 어느 정도 호감 상승에 이바지했다. 저런 묵직한 손을 괴고 하는 고민이라면 그것이 설령 양말을 살까 말까 하는 망설임이라도 어떻게 무겁지 않을 수 있을까?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건, 매일 조금씩 다르게 느껴진다는 말과 같다. 전시장에 비치되어있는 가격표를 괜히 확인하게 되는 엄유정의 그림들이 그랬다.


아, 결국 나는 여전히 그림을 구매할 돈이 없었고 이번에도 아쉬운 대로 그녀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달력을 구매했다. 이번 해가 지나가도, 나는 아마 그 달력의 인물들을 심심찮게 꺼내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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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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