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달리는 펜스"

글 입력 2020.12.31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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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종종 걷기나 달리기에 비유된다.

 

나 역시 내 숨가쁜 삶을 달리기에 많이 비유하곤 한다. 몸이 민첩하지 못해 단거리 달리기는 늘 최하위권이었지만 1000미터, 1500미터 정도의 장거리 달리기는 잘 뛰었던 학창시절이 기억난다. 옆사람과의 경쟁보다는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과 저려오는 다리, 쉬엄쉬엄 걷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는 걸 더 잘했고, 더 좋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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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ning Fences (Project for the West Coast of USA), Collage 1972, Pencil, charcoal, wax crayon, fabric and staples, 22 x 28" (56 x 71 cm), Private collecion, Photo: Archive, © 1972 Christo

 

 

오늘은 2020년의 마지막 날. 올 한 해는 모두에게 지긋지긋하거나 고통스러웠던 해였겠지만, 나에겐 좀 다른 의미로 힘들었던 일 년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할 때에 대학교 마지막 학년을 보내고 있었던 건 사실 아주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었다.

 

통학하며 버렸을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아껴 졸업 이후의 삶을 차분히 그려볼 수 있었다. 성격상 자꾸만 바깥으로 나돌아다니게 되는데, 그런 일이 강제로 줄어들자 정작 휴학할 때에도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던 ‘성찰의 시간’을 참 오래 가지게 되었다.

 

늘 나 자신에 대해 많이 고민하며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왔는데, 막상 무언가를 진짜로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왔을 때 속절없이 흔들리는 마음이 당황스러웠다. 대학에서 보낸 5년간 누구나 인정할 만큼 열심히 달렸다. 중간중간 춤도 추고, 가끔 넘어지기도 하면서 달리긴 했지만 그 방향은 단 하나였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알게 됐고, 그 길로 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얼마만큼 해야하고 어느 정도 힘들지 조금은 감이 왔다. 그래도 ‘그래, 이 길로 한 번 가보는 거야’하고 마음을 먹었는데도 막상 입구에 서니 턱, 하고 걸려 풀썩 넘어지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뭔가. 돈인가? 명예인가? 안정인가? 사랑인가? 팔뚝에 부처의 전생 이야기로 알려진 마하사트바 왕자의 모습도 새겼다. 굶주린 호랑이에게 스스로 몸을 던져 먹이가 되어준 왕자의 용기와 신념을 닮아, 내가 믿는 것에 아무 생각 없이, 걱정 없이 그저 뛰어들고만 싶었다.

 

하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들었다. 집에 가만히 있게 되니 더더욱.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회야, 생각하다가도 좋은 작품과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야속하게도 마음이 누그러졌다. 약간의 의무감과 함께, 그러나 그보다 더한 갈증을 이기지 못해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글을 썼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아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겐 예술과 가까운 삶이 필요하다고 결국은 인정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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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 and Jeanne-Claude, Running Fence, Sonoma and Marin Counties, California, 1972-76, Photo: Wolfgang Volz, © 1976 Christo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냐는 질문을 두려워하지만 그래도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은 있다. 2018년 9월, 현대미술 강의를 들으면서 알게 된 작품이다. 교수님이 직접 쓰신 책의 표지에 있던 작품인데, 바로 대지 미술, 설치 미술가 듀오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와 장-클로드(Christo and Jeanne-Claude) 부부의 <달리는 펜스Running Fence>(1972-76)다.

 

5.5미터 높이의 하얀 천을 강철 지지대로 세운 이 펜스(울타리)는 캘리포니아의 보데가 만을 따라 무려 39.4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지다가 바닷가에서 끝난다. 물론 펜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만 멀리서 찍은 사진으로 보면 마치 하얀 펜스가 멀리서부터 산을 넘고, 강을 넘어 우다다다, 하고 달려가는 것 같은 속도감이 느껴진다.

 

이 작품을 보면 나도 함께 그 광활한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 것처럼 온몸으로 거스르는 바람이 느껴지고, 눈앞에 펼쳐진 해변이 보이는 것만 같아 심장이 쿵쿵 뛴다. 너무나 자유롭고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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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o and Jeanne-Claude, Running Fence, Sonoma and Marin Counties, California, 1972-76, Photo: Wolfgang Volz, © 1976 Christo

 

 

크리스토와 장-클로드 부부가 이 작품을 고안한 후 실제로 구현해내기까지는 42개월이 걸렸다. 긴 구간에 지지대를 세우는 설치 과정에서 기술적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설치 기간은 5개월에 불과했다.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이었다. 캘리포니아 주 측의 승인도 얻어야 했고, 작품이 지나가는 넓은 땅을 소유한 59명의 지주들을 각각 만나 허락을 구해야 했다. 그들의 프로젝트를 방해한 것은 물리적이거나 자연적인 요인보다 이 프로젝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의심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부부는 결국 작품을 완성했다. 펜스가 바다로 들어가는 부분 때문에 캘리포니아 해안보존의회에서 마지막 순간에 승인 허가를 거부했지만, 아무튼 부부는 꿈쩍 않고 그냥 작품을 완성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 펜스는 단 2주 동안 캘리포니아의 해안을 달릴 수 있었고, 그 후 곧바로 철거되었다. 작품은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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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 and Jeanne-Claude, Running Fence, Sonoma and Marin Counties, California, 1972-76, Photo: Wolfgang Volz, © 1976 Christo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에 있고, 난 이제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참이다. 정말 불안하고 막막했던 한 해였는데, 조금 분명해진 뒤에 돌이켜보니 또 한 번의 성장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완전히 확실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외롭다. 앞으로 얼마나 더 스스로를 의심하고 부정하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을 마주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무튼’ 갈 데까지는 가보고 싶다.

 

자유롭고 싶다. 아무렇게나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자유롭고 유연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타인을 대할 때에는 아집에 갇혀 멋대로 재단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일들을 해낼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을 갖추고 싶다. 그러려면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는 나만의 전문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여러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이것만은 분명하다. 오래오래 예술과 가까이 살고 싶다.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다. 처음부터 마구 달릴 필요 없이, ‘차근차근’ 숨을 고르며 체력을 다지고,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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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 and Jeanne-Claude, Running Fence, Sonoma and Marin Counties, California, 1972-76, Photo: Wolfgang Volz, © 1976 Chri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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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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