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트레이트4 [사람]

격투기가 필요한 때
글 입력 2020.12.2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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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간다.

 

해가 뉘엿 서산 넘듯 한, 여기 2020년이 가는 데에는 낯도 소리도 없건마는, 빈방엘 처해 글을 쓰자니 이런 `어쩔 수 없을` 감각이 먼저 나를 감돈다. 나 무얼 했던지. 역시나 이런 때면 작년 이맘의 나를 찾고, 기억 속에 그를 찾기가 어려울 제 비로소, 내 쓴 글을 다 본다. 써둔 글은 적어도 쓴 사람한테는 곧잘 잊히는 성질의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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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체육관-집, 다시 돌아보아도 내 한 해는 이것이 전부였다. 그 막연한 취업준비를 하자니 집은 나서야겠고, 나선 곳에는 그러나 따로 이정里程이 없어 헤매이게 마련이었다. 사위 트인 곳 광장의 감각, 길은 사위 어디로든 뻗어져 있어 어디로도 나는 발 떼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 광장에 멈추어 있었으니, 물끄럼 사방을 치어다나 본다. 방향을 찾지 못한 땅꾼이 물끄럼 땅 위로 길자리를 고뇌하듯, 못둑을 마침내로 이제 길을 다해버린 자가 이제 저 너머 지평 가까이 뿌려진 별나마 치어보듯, 나는 꽤 오래 멈추어 있었고나.

 

한 것이라곤 책 몇 자 구경하고, 그보다 기-인 시간 머리 뒤로 짐을 진 채 글감을 구상하고, 차창 바깥 아스팔트에 깔린 햇볕에는 주광빛이 오르고, 내 정서도 그를 닮아 달아오르듯 자괴를 토하고, 이윽고 황혼이 불에 탈 때에나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귀로의 정면으로는 지평 가까이서 커다랗고 붉은 것이 타올랐다. 나는 그것이 그다지 설웠고나. 이렇듯 올 상반기는 이러이러한 것들에 푹석 젖어, 글 쓰는 것이 내 한 일의 전부였다. 과연 그때 쓴 글이 길고 많다. 

 

심심한 끼니를 채운다.

 

해는 떨어졌고, 빈 방에 홀로 나는 이런 저런 생각에 짓눌리고, 대안을 찾기에는 너무도 많은 상념이 나를 짓누르고, 그러니 나는 체육관엘 가야지. 나는 체육관에 가야했다. 내 다니는 곳은 여기서 퍽 먼 곳이다. 저녁, 버스의 창자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서면, 아직 젊음이 마냥 즐거운 이들과, 이유야 어쨌건 눈에 상념 없는 이들과, 입은 코트의 무게에 버거워 보이는 이 몇, 그리고 초점 없이 바깥을 치어다 보는 할미꽃이 피어있다. 나의 초상은 그 사이 어디 즈음인지를 몰라 그저 창밖을 치어다본다. 체육관 가는 길은 언제나 밤길, 버스 차창으론 다만 흐릿한 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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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엘 오면, 밝은 불빛보다도 먼점 미트 치는 소리에 눈이 부시다. 상쾌한 파공음. 엘리베이터에 채 오르기 전부터 가죽이 내는 청명한 소리에 더불어 누군가의 기합소리가 맑다. 그러니 나는 체육관엘 와야지. 문을 열면 내 오뇌의 흔적은 감추이고, 반가운 인사 몇이 쏟아진다. 인사하고, 잡담을 나누며 몸을 풀고, 자세를 잡고, 이제 바라던 샌드백을 친다. 스트레이트. 너무 가벼운 잽도 아니, 온몸을 돌려치는, 그래서 정신 사나운 훅도 어퍼도 아니 아니, 다만 이런 상념들에 골몰하면서도 곧게 뻗치는 스트레이트를 친다.

 

그러고 보면 이 운동을 한 지가 꽤 되었다. 중간중간 휴식기가 길어 실력은 도루묵이지만, 그래, 샌드백 친 시간만 다 이어보자니 퍽 길다. 몇 개의 체육관에서든 그 이유는 꼭 같았다. 운동부족도, 지방 감소도, 취미 활동도, 강해지는 것도 다 이유요 목적이었지만, 오직 가장 중하고 절실한 것 하나를 꼽자면 그것은 오뇌일 뿐이다. 위에 적어둔, 그런 이유였음이다.

 

유명한 말을 끌어다가 비유하자면 헝그리 정신을 가져다 댈 수 있을까 싶은. 내 생각기로 격투기가 필요한 때, 그리고 격투기에 가장 걸맞은 인간의 `때`는 어떤 아픈 절실함에 머물러 있는 시기이다. 나는 주먹을 뻗고 몸을 움직이지만, 그때 내가 바라는 것이란 상념에 짓눌려 정처하는, 나의 자아로 불어 흘러들어오는 흔들림이다.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어디로든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 길이 삶의 길이건, 아니 하다못해 수련의 길이건 나아가고 있다는 것, 자아가 정체된 때 필요한 것이란 오로지 이 감각에 지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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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쓰면서 보니, 참, 벌써 8년이 지난 그 옛날의 체육관과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재수생 시절, 그때도 나는 좁고 검은 고시원 안에서, 불안과 오뇌 속에서, 도서관-체육관-집의 순환 속에서 스트레이트를 뻗고 있었구나. 그칠 것 같지 않은 긴 터널 속에서, 보이지 않되 멈춰 있는 무언가를 열심히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때의 내 눈이 기억난다. 말없이 닫긴 채, 늘 화가 나 보인다는 눈, 그리고 그 안 깊은 곳이.

 

나는 늘 불안했고 화가 나 있었다. 불안과 불만과 분노가 내게서 피어 나에게로 향한다. 나는 좁고 검은 방 안에서 질기게 피어나는 이 상념들이 지겨워 체육관을 찾았고나. 참으로 검은 방은 오뇌의 자궁 같다. 체육관에는 이런 사념들이 터 잡을 둥지가 없으니 말이다. 밤이 늦도록 불을 켜두고 누군가의 땀과 누군가의 기합이 바닥을 흥건히 적신 곳, 고로 체육관은 이런 내가 찾아갈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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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정처하였거나, 오뇌의 트랩에 빠져 있거나, 고뇌의 늪에 빠져 있거나 무엇이 되었건, 질긴 고통의 터널 속에 처한 사람에게, 나로서는 체육관을 권하고 싶다. 눈에 화가 어리어 있거나, 비애나 절망이 스미어 있거나, 두려움이 베어 있는 이에게는 샌드백 앞을 권하고 싶다. 다만 아무런 말도 권하지 않고, 글러브 한 짝에 원투 시범만 툭 던져두곤 내버려두고 싶다. 기어이 글러브를 집어 든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묵묵하게, 어쩜 독하게 샌드백을 쥐어패고 있을 것이다. 그 이의 내면이 어떠할지 알 것 같기에 그렇다. 원투를 치는 손끝에 깊이 박힌 두 눈 너머로 깊숙이, 어떠한 것들이 영사되고 있는지 알 것 같기에. 몸을 움직이는 와중엔 너무 깊이 골몰하지를 못해, 비로소 적당한 거리를 둔 채로 치어다보는 자신의 고뇌. 치는 것은 원투지만 쥐흔드는 것은 오뇌와 자아이다.

 

그런 때, 어떤 펀치가 가장 적합한가. 가볍게 치는 잽, 아니. 온몸을 비틀어 상념마저 흩어지는 훅이나 어퍼도 아니. 덕킹과 위빙을 섞으며 치는 바디블로우, 아니. 그냥 가만 서서 팔을 앞으로 쭉, 그리고 거세게 쏟아내는 스트레이트가 제격이다. 돌려 깎는 것도, 감아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발산하듯 쏟아내는 스트레이트가 제격이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하기로는 뭐, 그렇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잽-잽-스트레이트와 원투-덕킹-스트레이트. 앞손 잽으로 거리를 재고 셋업을 하며 도사리다가 일순 거세게 나아가는 스트레이트. 거센 펀치는 그에 걸맞은 거센 반작용을 낳는다. 아니, 아니지. 샌드백의 정면으로 곧게 뻗은 스트레이트의 뒤에야 징한 반작용이 몸을 타고 오른다. 잽은 체중의 전부를 걸어 치는 펀치가 아니기에. 그리고 훅은 타점을 때리곤 스치듯 지나, 몸으로 감으며 회수하는 펀치이기에. 그렇기에 오직 스트레이트만이 전신을 울리는 충분한 반작용을 준다. 쿠웅-하고 울리는 샌드백, 그리고 찰나의 차이로 주먹 끝과 팔꿈치 관절과 어깨와, 상반신을 받치고 있는 기립근과 장딴지에까지 경미한 흔들림이 타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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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 나는 그 울림이 좋았다. 세게 칠수록 거세게 돌아오는 이 파동이 좋았다. 그것에 무슨 거창한 이름을 지어줄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나는 그저, 그렇게 온몸이 흔들리는 것이 그다지 좋았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잠에서 깨고 싶었던 것일까. 잠깐만큼만 아찔하고 아득해지는 감각, 질긴 잠을 깨우는 이 감각은 분명 상쾌하다.

 

그 겨울, 2월, 이제 체육관을 나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내가 기억 속에 잇따른다. 내 고시원이 저기 보인다. 창문도 아니 닫기는 작은 내 방, 내 몸에서는 우스울 정도로 짙은 김이 뿜어나고 있었다. 저기 추운 내 방, 그러나 귀로의 때만큼은 별생각이 아니 들어 좋았다. 대략 이런 식이다. 실컷 피로해서 좋았고, 때 낀 자아에 찬바람이 돌아 좋았고, 정신이 맑아 좋았고, 몸은 헤져 피로하니 더 좋았고, 몸에 열이 물큰 달아올라서, 춥지 않아서 좋았고… 아직껏 생각하기에도 앓는 자아에는 이러한 것들이 제격이다. 그리고 특히, 스트레이트가 제격이다.


이제 다시 꿈을 깨어 지금, 글 쓰는 내 방으로 시야를 돌린다. 조용하구나. 올 연말에는 그 시원한 가죽 소리가 들리지 않아 섭하다. 신나게 가죽 샌드백을 쥐어패고, 반작용으로 내 몸도 곤죽이 될 때까지 흔들어놓고, 몸을 놀려 사념을 죽이고, 땀 바가지 시원히 내버리고 하다가 체육관 식구들이랑 송년을 핑계로 맥주 한 잔이나 할 수 있더라면…

 

물론 술자리에는 또 체육관의 미래와, 어느 싱글대디의 고민과, 곧 초등학생 들어가는 아이의 학원비 걱정과, 계약직에 대한 두려움과, 취업에 대한 막연함 등, 제 인간의 안줏거리들이 올라오겠지만 걱정 없다. 다들 자신의 스트레이트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까. 오뇌의 무게를 덜고서 뱉는 푸념은, 그냥 담배 연기 같이 쉬이 흩어지곤 마는 것이다. 그냥 서로 아아, 엏허이, 하고는 맥주나 홀짝. 찾을 답도, 애초 바랄 답도 없는 푸념이 늘어지다간 이내 지루해서, 에이, 연말이네, 20년도 다 갔다, 하곤 싱겁게 마는 것이다. 그리곤 또 맥주나 홀짝. 대략 이런 식이다. 그럴 수 있는 가벼움이 좋았고, 그렇게 만드는 스트레이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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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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