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팅 힐(Notting Hill) - 염소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 순간 [영화]

글 입력 2020.12.2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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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어느 노래에는 세상만사 오르막길 내리막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 사람이 바라본 세상에 평지는 없었나 보다. 나는 세상을 끝도 없이 이어진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름의 레일의 연속으로, 나 자신은 그 레일을 따라 달리는 롤러코스터로 바라본다.

 

행복과 불행 중에서 어떤 레일이 더 긴지 혹은 길이가 똑같은지는 모르나 이 두 레일이 반복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반복이나 행복과 불행의 반복이나 비슷하게 들리겠지만 그사이에는 지금 나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으면 하늘을 향해 솟은 이 길은 오르막이며 땅으로 꺼지고 있으면 내리막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행복과 불행은 그리 친절하지는 않아서 구분이 어렵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불행만 눈에 띄게 분명하고 행복은 뚜렷하지가 않아서 행복의 레일을 따라 달리고 있어도 이게 행복인지 불행인지 모른다.

 

눈앞에 불행의 레일의 시작점이 보일 때가 돼서야 내가 지나온 길이 행복이었음을 알아차린다. 이는 인생 대신 사랑이라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탔을 때 더욱 분명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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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대커라는 이름의 영국 청년은 런던의 노팅힐에서 여행 서적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책방을 운영하고, 안타깝게도 카푸치노 한 잔조차 제대로 살 형편이 안 되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혼 경력까지 있는 완벽한 남자다.

 

이 눈물 나는 남자의 직장에 우연히 방문한 잘나가는 할리우드 여배우인 애나 스콧에게 윌리엄은 첫눈에 반한다. 그녀의 관심을 끌어보려 시답잖은 소리만 늘어놓다 보낸 후 카푸치노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아니나 다를까 모퉁이를 돌다 애나와 부딪히며 옷에 카푸치노를 쏟는다.

 

어찌어찌하여 윌리엄의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돌아가려는 길에 영문은 모르겠으나 그들은 서로 키스를 나누고, 이런저런 사건을 겪어 결혼까지 골인한다. 이 뻔한 전개 속에 담긴 애나와 윌리엄의 갈등과 노팅힐이라는 장소의 역사, 그리고 여행 서점이라는 설정의 조화로움은 뻔한 영화를 뻔하지 않게 만든다.


노팅힐은 본래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거리로 다양한 나라와 인종, 문화가 뒤섞인 영국 안의 미국 같은 곳이다. 우리가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부르는 현재의 미국말이다. 예술가들은 영화, 연극, 그림, 조각, 음악 등 다양한 형태로 작품을 남기고 그들에 대한 기록은 책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이어진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영화배우로 성공한 애나 스콧과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여행 서적 전문 책방을 운영하는 윌리엄 대커의 만남은 노팅힐의 역사를 또 다른 형태로 계승하며 삶 혹은 사랑에 대한 넋두리를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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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접하는 말 중에서 인생은 한 번뿐인 여행이라는 말이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인생은 무전여행이나 즉흥 여행이 될 것 같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돌발상황의 위험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것이 인생이다.

 

어딘가의 아무개와 나의 여행이나 아무개와 아무개의 여행 사이에서 각기 다른 비율로 공통적인 것이 존재할 수는 있더라도 세상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동일한 여행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여행이 저마다 다른 내용을 품고 있는 한 권의 여행 서적이 된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내용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인생을 채워가던 윌리엄 대커와 애나 스콧의 여행은 결혼이라는 동일한 결말로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며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추상적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은 힌트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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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는 대커의 집 주방 한쪽에 걸려있던 마르크스 샤갈의 결혼이라는 작품을 보며 대커와 애나는 행복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샤갈은 초현실주의 작가로 잘 알려졌으나 이는 그가 추구하던 화풍 중의 하나일 뿐이지 외길인생을 걷던 화가는 아니었다. 화가라는 인생에서 다양한 화풍으로 여행을 떠나는 그에게서 윌리엄의 서점이 보일 때의 미묘한 재미는 소소한 입가심이 된다.

 

이런 그의 화풍 중 하나인 초현실주의는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난 갈등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이를 더욱 강조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이렇게 들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이해가 안 된다. 행복에 대한 애나의 한마디를 듣기 전에는 여인과 그 옆에서 염소가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말 같지도 않은 광경도 뜬금없이 왜 등장하는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초현실주의라는 화풍은 윌리엄 대커와 애나 스콧이 겪는 갈등이 숨겨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샤갈의 작품은 그들의 여행을 따라가는 이정표가 된다. 서로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는 모습은 작품 속에서 꽤 직설적으로 전개된다. 애나가 다시 한번 찾아왔을 때 윌리엄은 애나의 행복을 위해서 그녀의 고백 아닌 고백을 거절하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시킬 이유를 열심히 찾는다.

 

자신과의 타협이 성공 직전에 이를 때쯤 스파이크가 등장하며 시원하게 욕설을 퍼부어 머저리 같은 결정을 내린 윌리엄을 질책하고 윌리엄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의 대사를 뱉은 직후 애나에게로 향한다. 이 외에도 독백을 통해 직접적으로 뱉어내거나 표정을 숨기지 않는 등 전반적으로 인물의 내적 갈등이 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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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이런 전개 방식이나 스토리 보다는 윌리엄의 대사처럼 염소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 말도 안 되는 장면을 그려놓은 그림이었다. 염소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리를 듣기 전에는 진짜 행복이 아니라는 애나의 한 마디로 그 그림은 이 영화가 내게 주던 인상 자체를 더욱 강렬한 게 변화시켰다. 독백과도 같은 이 한 마디가 그 추상적이고 흐릿하던 행복을 비현실적인 시간을 사는 것이라는 명쾌한 정의를 가진 것으로 변모시킬 열쇠였다.


행복에 빠진다. 행복에 취했다. 행복에 절었다. 행복을 표현하는 말들을 늘어놓고 살펴보면 행복이라는 대상에게 우리가 집어 삼켜진 듯이 서술하는 경우가 많은데 행복에 취했다는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술에 취하거나, 안 좋은 예시로 약에 취할 때에는, 사리 분별이 안 되고 이성적인 사고회로가 정상적으로 작동을 안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데 행복은 술과 약을 부작용 없이 한계치를 초과하여 복용한 것과 같다.

 

행복한 시간에 취해 있을 때면 우리는 간혹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 의심한다. 정말 이게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인지 믿기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사실이라 믿고 싶은 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그것이 찾아왔을 때 염소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이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지는 우리가 콩깍지에 씌는 것은 염소가 바이올린으로 거는 주문의 효과일 수도 있다.

 

*


도로시 데브스라는 사람이 제시한 용어 중에 리머런스(Limerence)라는 것이 있는데, 내 의지와는 별개로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그 사람의 관심을 얻고자 별짓 다 하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별 시답잖은 이야기부터 집에 돌아와 다시 생각해 보면 왜 그딴 소리를 했을까 하며 이불을 걷어찰 것 같은 말까지 주절주절 늘어놓는데, 그 사람의 관심을 얻고 싶다는 것이 그 행동에 대한 유일한 이유다. 온갖 쇼를 해서라도 그 사람의 관심맏 얻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에 행복을 느낀다. 윌리엄 대커의 시답잖은 넋두리에 공감하는 순간이다.


행복과 사랑은 서로 다른 존재이고 저마다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지만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가기보다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가는 존재라 생각한다. 사랑은 행복을 데려오며 행복은 사랑을 소개한다. 누가 먼저 오던 결국 이 두 가지를 함께 맞이하게 되고 예의 그 비현실감이 찾아와 이게 현실인가 싶다.

 

윌리엄과 애나도 그들을 맞이하며 이 비현실감에 젖은 체 노팅 힐의 노을을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둘의 귓가에는 염소의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그 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가 될지 기다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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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팅 힐 (Notting Hill)

1999. 07. 03 개봉

멜로/로맨스, 코미디

영국

124분

유니버설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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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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