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깨끗한 마음으로 과거를 추억한다는 것

아름다움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
글 입력 2020.12.2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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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추억하고, 현재에 감사하며, 미래에 기대하는 마음을 품는다. 간단하면서 명랑하기까지 한 격언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때가 종종 찾아온다. 현재가 불만족스러울 때 마음은 탁해지기 마련인데, 시답잖은 현실을 등에 업고 있을 때면 이미 지나와버린 과거의 한 지점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회의적인 감각에 사로잡힌다. 이럴 때는 미래에 대한 기대도 품지 않는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한 지점을 그리워할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소설에서도 비슷한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쓰쿠루의 인생에서 소중하게 빛나던 때는 한 무리의 친구들과 멋진 우정을 나누던 고등학교 시절이다. 의문의 사건으로 쓰쿠루는 이 견고해 보였던 우정의 고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배제되었고 큰 상실감에 빠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늘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쓰쿠루의 허무주의는 꽤나 짙게 묘사된다.

 

 

"그렇지만 참 이상해."

 

"뭐가?"

 

"그렇게 멋진 시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온갖 아름다운 가능성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잠겨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우리는 지나온 시간을 '기억'한다. 꺼내어 열어보기 쉽게 편집, 또는 왜곡한다는 뜻이다. 지금 발 붙이고 있는 곳이 싫을수록 기억은 더 열심히 지난날의 장면들을 낭만스럽게 포장한다. 이 포장은 개인이 간직한 삶이라는 필름에 대한 걸 수도 있고, 한 시절이나 시대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나의 모습이 견디기 싫을 때면 미래에 변화될 모습에 기대를 하기보다는 이미 지나온 과거의 한 시점을 동경하기가 더 쉽다.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지금 속한 집단에서 묘하게 위축될 때면 몇 년 전 그곳에서 어울렸던 사람들이 나랑 참 잘 맞고 좋았는데 하며 그 시간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다 힘든 일이 겹쳐 삶을 인내하는 것처럼 몇 년을 보내다 보면 현시대가 엉망이라고 여기면서 현실이 아닌 시대를 지나치게 낭만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온갖 아름다움의 가능성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잠겨 사라지고 말았다는 하루키 소설 속 표현처럼 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을 둘러싼 관계에 대해서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미래에 기대하는 마음을 품는 대신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모두 현재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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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인생영화로 꼽는 미드나잇 인 파리. 개봉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이 영화를 꺼내 본건 최근의 일이다. 주인공 길은 약혼자 아네즈와 함께 파리를 찾는다. 길은 비를 맞으며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 낭만주의자다. 그런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향수'다. (이때의 향수는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시름'을 뜻한다.)

 

예술의 황금기가 펼쳐졌던 1920년대의 파리를 동경하고,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도 추억을 파는 '향수 가게'를 소재로 한다. 과거에 대한 낭만이 깊게 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실주의자 아네즈 옆에서 그는 꿈속에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길의 황금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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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파리의 거리를 산책하던 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클래식 푸조 한대가 다가온다. 길은 그 푸조에 올라타고 엉겁결에 1920년대의 파리의 한 파티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첫 번째로 인사하게 되는 사람이 스콧 피츠제럴드와 그의 연인 젤다. 자신에게 펼쳐진 꿈같은 상황에 얼굴이 잔뜩 상기되는 와중에, 구석에는 무려 해밍웨이가 앉아있다. 이윽고 피카소와 마티스, 초현실주의자 달리, 만 레이, 그리고 거트루드 스타인까지 만난다. 항상 동경해오던 시대에서, 거장으로 기록된 인물로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적 존재의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길은 이 시간여행에 몰입한다.


1920년대 파리는 영화에서 그리는 것만큼이나 찬란한 예술의 황금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운한 기운이 감도는 시기에 파리에서는 급진적인 미술그룹인 초현실주의가 형성되었고, 앙드레 마송,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만 레이 등의 예술가들이 파리에 모여 교류하고 전시를 열었다. 소설가이자 예술품 컬렉터로 유명한 거투르드 스타인의 집에는 피카소, 마티스가 드나들며 창작욕을 불태웠고, 스콧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개츠비>를 집필하고 어니스트 해밍웨이와 교류하며 이디스 워튼을 만난 것도 1920년대 파리에서다.

 


벨 에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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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그곳에서 '아드리아나'를 만나는데, 자신과 같은 취향과 낭만을 갖고 있는 그녀에게 금방 사랑에 빠진다. 이 두 사람 앞에 또 한 번 시간여행의 문이 열리고, 둘은 나란히 1890년대 벨 에포크 시대에 도착한다. 이들은 바이올린 연주가 분위기를 띄우고 풍성한 치마를 펄럭이며 캉캉춤을 추는 '물랭 루주'에서,  테이블에 앉아 스케치를 하고 있는 툴루즈 로트렉과 고갱, 드가까지 만난다.


벨 에포크 시대는 좋은 시대라는 의미로, 프랑스의 정치적 격동기가 끝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기간을 이르는 말이다. 이 시기는 산업혁명을 거쳐 프랑스에 풍요가 깃들면서 예술가들이 파리에 모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물랭 루주는 에펠탑이 세워지던 때와 같은 해 개업한 화려한 댄스홀로, 스타 댄서들이 출연하여 흥행의 선두를 달렸다. 툴루즈 로트렉은 지정석을 두고 매일같이 드나들며 이 역동적이 화려한 풍경을 그림에 담았다. 영화에는 고갱과 드가도 등장하는데, 실제로 이 시기에 고갱은 타히티에서 파리로 돌아와 작품을 출품하고 경매를 열었고, 에드가 드가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영감을 받아 인물의 동작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을 남겼다.


아드리아나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우리 여기에 남아요"라고 말한다. 길의 황금시대에 사는 그녀는 1890년대를 황금시대로 품고 있었던 것이다. 길은 아드리아의 상기된 얼굴에서 자신을 본다. 우리가 그토록 동경하는 과거도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졌을 땐, 찬란하다느니 황금기니 하는 거 없이 그저 삶을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저들에게 황금시대는 르네상스라잖아요."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우린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환상들은 없애야 해요. 과거에 살았다면 행복했을 거라는 환상도 그중 하나일 테죠."


아드리아나라는 청자를 빌어 자기 자신에게 저 말을 하면서 길은 비로소 과거와 화해하고 현재적 존재가 된다. 1890년대도, 1920년대도 뒤로 하고 2010년의 파리로 돌아온 길에게 비치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따분하고 삭막하기만 한 현재가 미래의 누군가에겐 풍요롭고 안온했던 황금시대로서 동경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삶이 그렇다. 동경하던 그 과거에 머문다면 그곳이 현재가 되어버릴 거고 그곳은 더 이상 황금시대가 아니다. 현재란 그렇게 불완전한 것이다. 삶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부정이야, 고통스러운 현재의 부정. 다른 시대가 현재보다 나을 거라는 착각은 현실에 적을 못하고 로맨틱한 상상이나 하는 사람들의 허점이지."

 

 


깨끗한 마음으로 과거를 추억하는 것



영화 속 길의 시간여행을 몰입해서 따라가다 보면 삶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투명한 물처럼 밀려온다. 사실 몰랐던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껴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현실에 발 붙이기로 마음먹고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는 길이 프레임에 담길 때, 에펠탑이 빛나는 아름다운 현재가 엄연한 실체로써 현현한다. 현재를 꼭 붙들고 있을 때야 비로소 미래에 기대하는 마음을 품을 수도, 과거를 깨끗한 마음으로 추억할 수 있는 것이다.

 

슬플 때는 눈물이 가슴에 고여 남지 않도록 열심히 울고, 기쁠 때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행운에 지레 불안해하지 말고 온 세상을 가진 것처럼 웃기를. 마음을 다른데 두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꼭 붙여놓기를.


사진첩에서 작년 재작년 사진들을 꺼내보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잦게 한 한 해를 보내며, 일상의 흐름에서 벗어난 시간들이라며 마음을 다 쓰지 않고 매번 한 발 정도 빼고 있었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을 껴안고 살아갈 것.'

 

친구들과 소식을 물을 때마다 죽상을 했지만, 12월이 되어 반추해보니 나쁘지만은 한 해였다. 온 가족과 함께 하는 매 끼니, 반려견과 꼭 붙어서 수업을 듣는 시간, 새로 들인 식물 같은 것들. 마음을 모두 '지금'에 두지 않을 이유가 없다.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그 사이 어딘가의 감정을 느끼거나 할 때에도 현재를 꼭 껴안고 순간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참고로, 다자키 쓰쿠루도 소설이 전개되며 자신의 한정된 세계에서 나와 매일 조금씩 깊이와 넓이를 더해 간다. 완전히 아름다움의 가능성이 잠겨 사라진다는 것은 없다.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태도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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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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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원이제
    • 시간에 관한 소재를 소설과 영화에 접목하는 시선이 아주 좋은거같아요. 당시 역사에 관한 지식을 알고있다면 더욱 흥미로울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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